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28
시간 : -1초.
공간 :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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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없는 나무 (1)
시로네의 정신이 빛에 스며들었다.
이보다 더 밝을 수 없는 빛무리 속에서도 눈을 뜰 수 있는 이유였다.
‘여기는…….’
육체가 사라지고 정신만 남은 것처럼, 서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손을 들어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고 어디든 볼 수 있었으나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마저 상실한 이스타스 상층부의 0시 0분의 마이너스 1초에서, 그렇게 시로네는 거핀을 마주하게 되었다.
“헥사.”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정신을 돌리자 저 멀리에서 아른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외형이 또렷해졌으나 그 이상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빛의 물결이 선명함을 교란시켰다.
‘정말 인간인가?’
시로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검은 실루엣은 분명 얼굴과 팔다리가 있지만 빛의 왜곡으로 인해 전신이 막대기처럼 길었고 어느 부분은 끊어진 듯 가늘었다.
“당신이 거핀인가요?”
거핀은 대답이 없었고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시로네는 초조해졌다.
“대답해요! 당신은 나에게 말을 해야 할 의무가 있어! 도대체 나는 누구죠? 이카엘의 자식인가요?”
“헥사. 너는 결과다.”
시로네는 헥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지 않았다.
“알아듣게 말을 해요.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으니까.”
말을 고르는 듯 대답이 없던 거핀의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너에게는 원인이 없다.”
“뭐…….”
세상에 원인이 없는 존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너는 결과다. 절대적인 우연이다. 그렇기에 자유롭고, 그렇기에 싸울 수 있다.”
거핀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부모도 없고, 태어나야 할 이유도 없다는 말인가요?”
우주에 떠다니는 먼지조차도 이보다는 더 존재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대답해요! 이카엘이 내 어머니가 아니란 건가요?”
“한때는 어머니였을 때도 있었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말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요! 이쪽으로 나와! 거기에 숨어 있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란 말이야!”
“나는 네 앞에 있다. 네 앞에 내가 없을 뿐.”
거핀은 정신이 이상한 것인가?
분명 같은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석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전체로 받아들여 하나가 되어라. 그것이 바로 울티마.”
시로네는 직지의 상태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말소. 당신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거군요.”
존재하지 않기에 그 무엇으로도 부를 수 없고, 시로네 또한 그를 앞에 둘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단지 납득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나는 누구죠?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죠?”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장난도, 말을 돌리는 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사고를 초월한 거핀에게는 오직 이것만이 가장 확실한 대답인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의 기준으로 풀이하자면 진리의 끝에 도달해야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무한을 넘어.”
천국의 유적에서 가이아인의 기록을 보았을 때 마지막에 남겨진 문구였다.
“무한을…… 넘어?”
가까스로 거핀과 대화를 이어 나가는 시로네지만 이것만큼은 풀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무한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할 터였다.
“끝이 없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가 있어요?”
“어째서 끝이 없다고 생각하지?”
“당연한 거 아닌가요? 수는 끝없이 이어지고…….”
“수의 끝에, 도달한 적이 있는가?”
시로네는 입을 다물었다. 물론 도달한 적은 없지만 그렇기에 무한이라 부르는 것이다.
“무한이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가장 큰 개념일 뿐이다. 궁극을 보아라. 무한의 끝에서 무한을 넘어라.”
시로네는 다시 물었다.
“수에…… 끝이 있단 말인가요?”
“있다.”
거핀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내가 있다.”
거핀의 실루엣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나는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모든 것을 전했다. 나의 존재함도 여기가 마지막.”
상층부가 닫히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거핀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궁극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거핀이 점으로 줄어들며 사라진 자리에서 막대한 빛의 폭풍이 밀려들었다.
어떤 외력도 담기지 않았지만 시로네의 정신은 파도에 휩쓸리듯 어지러웠고 급기야 가장 작은 단위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기다려. 기다…….”
빛이 사라지면서 거핀을 향해 내밀고 있는 손등이 보이고, 그 시점에서 시로네의 눈이 감겼다.
***
“시로네! 괜찮아? 시로네!”
안찰이 뺨을 두드리자 시로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허억!”
마치 분해되었다가 다시 합쳐진 듯 모든 감각이 재구성되는 충격이 밀려들었다.
“여긴?”
“이스타스 밖이야. 네가 문밖으로 뛰쳐나갔잖아. 곧바로 따라왔는데 쓰러져 있었어.”
감각이 안정되면서 시로네의 눈이 반쯤 감겼다.
“거핀은 만난 거야?”
잠에 빠져들기 직전 안찰이 물었다.
이 또한 이스타스 상층부의 핵심 정보였으나 시로네는 확신하지 못했다.
‘내가 거핀을 만났던가?’
빛 속에서 대화를 나눈 기억은 나지만 꿈을 꾼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실물감이 없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이건 확실해.”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뿌리가 없어.”
시로네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그래서, 떠나겠다고?”
교감 올리비아는 짐을 싸 들고 찾아온 안찰을 마주 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모두 얻었으니까. 황제 폐하에게 보고를 드려야 해. 물론 발키리에도. 그러면 삼황계와 칠왕성 모든 국가가 알게 되겠지.”
과연 안찰이 순순히 기밀을 타국에 넘겨줄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정치에 끼어들 마음은 없었다.
“어쨌든 당신에게도 좋은 일일 거야. 상층부가 닫혔으니 이스타스를 폐쇄할 필요도 없고.”
“하긴, 졸업반 애들에게는 희소식이겠군. 강력한 경쟁자 1명이 사라졌으니.”
“물론 나는 프로지만…….”
안찰은 그간의 학교생활을 되짚어 보았다.
“현재 졸업반은 상당히 강해. 단테, 카니스, 페르미도 그렇고.”
올리비아의 머릿속에도 각인되어 있는 이름이었다.
“왜 나에게 말해 준 거지? 상층부에서 있었던 사건은 극비 아니었나?”
안찰이 피식 웃었다.
“나를 안 믿는군. 정말로 발키리와 정보를 공유할 거야. 하나의 제국이 품고 있기에는 너무나 큰 덩어리니까. 그리고…….”
안찰은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시로네를 떠올렸다.
“어차피 내가 함구한다고 해도 사건의 당사자가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까.”
“하긴…….”
안찰에게 들은 상층부의 비밀은 놀라운 것이었다.
“욜가가 미로의 마음에 파문을 던졌고, 그 파문이 이어져 시로네에게 미로의 시공에서 나갈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일까?”
“단정 지을 수는 없지. 난 이렇게 생각해. 시간이 정해진 게 아니라, 똑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신념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죽음을 알고서도 나아갔던 욜가처럼.
“신념이라.”
안찰이 배낭을 걸치고 일어섰다.
“그만 가 봐야겠어. 시간이 촉박해서. 시로네에게 대신 안부 전해 줘.”
“이번 일로 시로네에게 타격이 가는 건 아니겠지?”
“장담할 수 없지. 나 또한 제국의 부속품일 뿐이니까. 하지만…….”
잠시 생각하던 안찰이 말했다.
“진천우주국의 국장으로서 최선을 다할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전해 줘.”
“그러지.”
진천 제국에서도 기밀을 다루는 국장과 연락이 닿는다는 것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네트워크였다.
“그럼…….”
“잠깐. 한 가지만 더.”
문으로 향하는 안찰을 올리비아가 불러 세웠다.
“시로네에게 선택할 기회를 줬다는 것은 미로가 상층부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잖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거핀 말소 이후 미로는 욜가의 사망에 대해 잊어버렸어야 정상이었다.
“글쎄.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의문이야. 어쨌거나 미로는 인간을 초월했다고 불릴 만큼 강하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 어쩌면 욜가의 죽음은, 기억만이 아니라 미로라는 인간 자체를 바꿨던 것이라고.”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
안찰은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가정일 뿐이야. 진실은 오직 미로만이 알고 있겠지.”
“그래.”
오직 미로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
“빠레이!”
로블랑 왕국, 마리카 호텔 지하 2층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호텔에 죽치고 있는 미로를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고, 그녀는 무려 스물한 잔의 폴카를 비우는 것으로 선술집의 최고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엄청나구먼, 이 아가씨! 폴카 스물한 잔이라니! 내가 열여섯 살 때 전설을 본 당사자인데 오늘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나?”
“한 잔만 더 마시면 최고 기록을 달성하는 거라고! 무려 34년 만에 말이야!”
그 얘기를 들은 미로가 비워 버린 술잔을 내밀었다.
“최고라는 수식어 뒤에는 내 이름이 빠질 수 없죠!”
사람들이 찬사의 함성을 내지르는 가운데 세인이 질린 표정으로 미로를 끌어왔다.
“그만 마셔. 너, 지금 진짜로 취했어.”
“에이, 뭐 어때?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호텔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비밀 회담에서 미로가 밀어주고 있는 정치인이 안건을 관철시킨 날이었다.
“곧 떠날 텐데 로블랑의 명물을 실컷 즐기고 가야지.”
“아무리 너라도 이렇게 마셨다가는 제정신으로 버틸 수 없어. 위기 상황도 생각해야지.”
양쪽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미로가 흐트러진 자세로 손가락질을 했다.
“에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거지? 엉큼하기는. 좋아, 어디 해보자고.”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은 미로가 외쳤다.
“도전합니다!”
“좋았어! 어이, 모두들 모여!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는 순간이니까!”
세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로,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
노는 것이라면 빠지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이렇게 폭음을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세인, 이 술은 폴카라는 거야.”
테이블에 턱을 받친 미로가 잔을 채우는 두 가지 색상의 물줄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고 싶지도 않아.”
“오래전부터 로블랑의 어부들은 두 종류의 술을 즐겼대. 북부에서 만든 폴트는 증류주고 남부에서 만든 엥카는 발효주야. 그래서 먼바다에 나갈 때는 어느 술이 더 좋은지 북부와 남부 출신 간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어. 그러다가 보다 못한 선장이 제안을 했지. 이렇게 싸울 바에는 차라리 섞어서 다 함께 마시자고. 그게 폴카의 시초야.”
잔에서 회오리치는 폴트와 엥카를 바라보며 세인은 비로소 미로의 마음을 깨달았다.
“빠레이는 무슨 뜻이지?”
“너와 나, 우리 모두.”
“…….”
폴카가 완성되었다.
“자! 이것만 마시면 아가씨가 최고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미로는 두 팔을 들고 활짝 웃었다.
“좋았어! 시작합니다!”
미로가 술잔을 잡자 모두가 소리를 죽였고, 독한 술이 그녀의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넘어갔다.
“어어……!”
선술집의 모든 술꾼들이 마지막 한 방울이 비워지는 것을 확인하더니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