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75
‘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돼. 오직 개념으로서 나네를 견제해야 한다.’
헥사의 존재 이유였다.
“일단 제단에 집중하죠. 바리케이드가 설치되면 가장 가까운 곳부터 시작할 거예요.”
토르미아는 상아탑에서 멀고, 그렇기에 인간적인 결정이 아니었으며, 마음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루버가 말했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어디까지나 인류를 구하기 위한 결단만이 가능한 상황이니까요.”
뜻밖의 냉정한 말에 미니가 고개를 돌렸으나 루버는 인자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는 법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시로네가 눈을 깜박거렸다.
***
토르미아 왕국.
크레아스 도시에 있는 에이미의 본가에는 무장 병력 200명이 철통같은 진을 치고 있었다.
마법협회 크레아스 지부에 다녀온 에이미의 아버지 샤코라가 차가운 눈빛으로 저택에 들어왔다.
“여보! 어떻게 됐어요?”
심령권이 귀족 구역까지 확장되면서 길가에는 죽은 마족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산간 지방에 큰 피해가 생겼어. 전국적으로 사망자 수만 7천 명. 그래도 일단 막아 내기는 한 모양이야.”
“앞으로 토르미아는 어떻게 될까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 앞에서는 제1급 귀족의 안주인도 일개 인간에 불과했다.
“화력 시위로 마족들의 발을 잠시 묶었을 뿐, 바리케이드도 오래 버티지 못해.”
에이미가 집에 있지 않았다면 이미 마족들의 밥이 되었을 이시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로네가 상아탑에 들어갔다면서요.”
전투의 피로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이미가 처음으로 이시스를 돌아보았다.
“확실하지는 않아. 그래도 이번 사태를 막아 내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모양이더군.”
샤코라가 접수한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시로네가 있는 곳은 마족들에게서 안전하다던데…….”
상아탑과 시온만이 끔찍한 재앙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유이한 곳이었다.
“혹시 우리 가족들이 거기로 갈 수 있다면…….”
“엄마!”
에이미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떻게 우리만 살자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에이미, 엄마에게 뭐 하는 짓이냐.”
끔찍한 시체들을 보고 집에 돌아온 샤코라의 신경도 날카로워져 있었다.
“너는 군인이 될 테지만, 모두가 군인은 아니야. 싸울 수 없는 엄마가 두려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말도 안 되잖아.”
이시스가 답답한 듯 말을 토해 냈다.
“왜 말이 안 돼? 상아탑에 가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왕국이 이 지경이 됐는데 기별이라도 와야 하는 거 아니니? 너랑 보통 사이도 아닌데…….”
에이미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건…….”
모든 인류 사이에 시로네와 나네가 있다.
그저 생각하는 갈대인 인간이 상극을 관철시킨 두 사람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
하지만 세상이 멸망 직전에 놓인 지금, 가장 진리에 가까운 해답을 도출한 것도 그들이었다.
“미안해.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서 잘게.”
“에이미…….”
가장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이 딸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시스가 말을 꺼내려 했으나 에이미는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말을 실수했나 봐요.”
“내버려 둬요. 이런 일로 상처받지 않아. 한숨 푹 자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겠지.”
그날 밤, 에이미의 꿈에 루버가 나타났다.
격동의 시대 (2)
***
“언제는 다른 남자 만나라더니!”
이시스의 잔소리를 피해 방으로 들어온 에이미가 씩씩대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누군 뭐 속이 좋아서 가만히 있는 줄 알아!”
화는 금세 가라앉았다.
이시스의 말도 일리는 있었고, 그녀의 두려움도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다.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세계는.’
세계 각 지역에 생긴 심령권은 마족이 출몰하는 문제 이상으로 세계정세를 뒤흔들 것이다.
‘수많은 사망자, 내란, 타국과의 전쟁…….’
군인은 가장 험난한 직업이 될 것이다.
어쩌면 공인 시험을 준비하는 에이미에게 꿈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는 유일한 기회였다.
‘시로네.’
졸업을 했을 때만 해도 함께 미래를 꿈꾸며 즐거운 인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너에게 나는 뭐야?’
마족들과의 싸움으로 녹초가 된 에이미는 어떻게 침대에 누웠는지도 모른 채 스르르 잠이 들었다.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오랜만입니다, 에이미 양.”
“어?”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어딘가 낯이 익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콧수염을 기른 인자한 미소의 노인.
오직 그만이 살아 있는 듯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고, 심층 6단계 렘의 영역으로 이성이 밀려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풍경이 선명해지면서 온갖 진귀한 꽃들이 피어 있는 푸른 벌판이 드러났다.
“어라? 어?”
가끔 꿈을 꾸다가 가위에 눌린 경험이 있지만, 이토록 완벽하게 각성한 적은 처음이었다.
비로소 깨달은 에이미가 노인을 돌아보았다.
“설마?”
“네, 꿈지기 몽인 루버라고 합니다.”
특별한 훈련을 통해 루시드 드림 자격증을 딴 사람만이 루버를 찾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저에게 직접 오신 거예요?”
“네. 본래 꿈지기가 개인의 꿈을 강제로 각성시키는 것은 테라포스 우주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미 테라포스 대법관에게 통보했고, 시로네가 인류의 대표라는 점을 감안하여 승인되었다.
“어째서 저를 찾아오신 거죠?”
“에이미 양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분의 꿈과 연결시켜도 될는지…….”
몽인이 존칭을 쓰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에이미는 살짝 긴장이 되었다.
“누군데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에이미 양에게 뺨을 맞을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생각에 잠겨 있던 에이미가 흔쾌히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어차피 꿈인데요, 뭐.”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루버의 육체가 점차 투명하게 변하더니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뭐야?”
에이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이미.”
어깨를 움찔한 그녀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천천히 몸을 돌리자 시로네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너, 너……?”
“미안해, 이런 식으로 찾아와서. 하지만…….”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얼굴을 보자마자 여태까지 마음을 앓았던 울분이 폭발했다.
“이 나쁜 자식아!”
시로네의 멱살을 잡은 에이미가 소리쳤다.
“어떻게 연락조차 안 할 수 있어? 우리 아빠를 통해서 내가 들어야 돼?”
시로네는 그저 미안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엄마는 다른 남자 만나라고 그러지, 사람들은 버림받았다고 수군대지!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시로네가 에이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에이미는 알았다.
너무나 거대하고 간절해서, 어떤 과장된 언어로도 수식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알아. 나도 알고 있단 말이야.’
마음은 우주보다 크다.
“하아. 어쨌거나 왔으니 용서해 줄게.”
에이미의 어깨를 붙잡고 몸을 떨어뜨린 시로네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반드시 확인할 게 있어!”
대체 이 녀석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꿈을 통해서 왔다고 했지? 네 성격상 나만 만나러 온 것은 아닐 텐데. 내가 몇 번째야?”
“당연히 첫 번째지.”
황급히 답한 시로네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듯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은…… 부모님 먼저 만나 뵙고 오는 길이야.”
에이미는 함박 미소를 지었다.
“그럼 첫 번째 맞네. 가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 줘야 할 거야.”
에이미의 손을 맞잡은 시로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원 위를 달렸다.
꽃밭 위를 빛의 파편처럼 날아다니는 나비들이 있는 곳에 작은 집이 보였다.
온통 분홍빛으로 색칠되어 있었고, 무의식을 들킨 에이미가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테라포스에서 꿈의 연결을 금지한 이유였다.
하지만 상대가 시로네였기에, 민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짜릿한 기분이었다.
“……들어가자.”
에이미가 수줍게 말하고, 시로네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에이미, 할 말이 있어.”
“알아. 급하기는…….”
시간이 많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시로네는 우선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부터 말해 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촛불들이 다양한 변화를 일으켰고 마침내 전말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방은 어두침침했다.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에이미가 시로네의 말을 끊었다.
“어째서 연락하지 못했는지, 앞으로 네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촛불이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나도 확실한 목표가 생겨서 좋네. 함께 힘을 모아서 나네를 끝장내는 거야.”
“아니.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야.”
인간의 마음으로 누군가를 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기에, 시로네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에이미, 나는 이제 너와 함께할 수 없어.”
“뭐?”
에이미의 집이 완벽하게 어두워졌다.
“너와 이렇게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 견딜 수 없을 만큼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
“그런데 뭐가 문제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바로 이거야. 내가 너무 행복하다는 것. 결국 나는 너에게 집착하고 말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시로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네는 반드시 그걸 이용하겠지. 내가 너를 사랑할수록 너는 점점 위험해져.”
“나네는 부처라며? 무슨 부처가 그런 비겁한 짓을 해?”
“그것도 인간의 감정이야.”
시로네는 어둠 너머에 있는 에이미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나네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무야. 세상을 닫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원래부터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선악의 개념을 초월했어. 모든 선과, 모든 악을 섭렵한 끝에 도달한 신의 영역.”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지키며 그런 자와 싸울 수 없어. 그러니까 에이미, 이제 그만…….”
“알았어. 그만하자.”
갑자기 들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던 시로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아,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이런 시국에 무슨 연애야. 앞으로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너는 네 자리에서 하고 싶은 대로 나네와 싸우면 되는 거야. 이제 됐지?”
거침없이 내뱉었으나 바깥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내가 갈 테니까.”
바람 소리처럼, 에이미가 흐느꼈다.
“네가 지킬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해질 테니까. 그래서 반드시, 반드시 너한테 갈 테니까…….”
에이미를 품에 안은 시로네의 가슴에서 뜨겁고 축축한 것이 번지고 있었다.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갈게. 어디에서 누구와 싸우고 있든, 내가 네 옆으로 갈게.”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나네의 얼굴을 주먹으로 둘려 버릴 것이다.
“에이미…….”
시로네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고,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손길로 쓰다듬었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안을 수 있다면.
‘꿈이니까. 우리 둘만의 꿈이니까.’
거의 달라붙을 뻔했던 입술이 길을 잃은 채 헤매고, 그저 두 사람의 감정만이 무섭게 휘몰아칠 뿐이었다.
“갈게. 조심해야 돼.”
“안 돼. 가면 안 돼. 시로네…… 잠깐만…….”
각오가 끝났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에이미.”
차라리 세상이 끝장나기 전까지 미친 듯이 사랑하다가 모두 함께 막을 내려 버리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