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64
“단테.”
부르는 목소리에 단테가 다시 돌아섰다.
“응?”
“전쟁이 끝나면…….”
한마디 말을 건네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운 이루키의 눈은 너무나 외로워 보여서.
“같이 술 한잔하자.”
울음이 차오른 단테는 목이 잠긴 것을 느꼈음에도.
“……그래.”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붉어진 눈시울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단테는 곧바로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머저리 같은 놈! 지가 무슨 영웅이야?’
단테가 빠르게 멀어지자 플루는 보폭을 넓게 하며 자연스레 따라잡았다.
‘이제 전장은 토르미아로 옮겨졌다. 협회가 전면에 나서게 될 거야. 시온의 요인에 대해 파악해야 돼.’
하지만 생각은 잠시, 단테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이성적인 사람인데…….’
엄청난 분노였다.
‘빌어먹을! 개 같은 마족들! 다 죽여 버린다!’
“…….”
단테의 주먹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한 플루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화花족들의 은신처.
루피스트는 생화의 씨앗을 받는 대가로 플라리노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
세계 각지에서 고통받는 300명의 동족을 구출하고 안전한 보금자리를 제공한 것.
한때는 스펙트럼의 방위부 장관이었던 플라리노도 이제는 평범한 화족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플라리노 씨.”
그래스 혈통의 남자가 플라리노를 보고 담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화족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바이올렛 티아라의 혈통은 태양 아래 더욱 빛이 났다.
“오늘은 정말 햇살이 달콤하군요. 이런 날은 ‘정원’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최고죠.”
플라리노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맞아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햇살을 받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죠. 같이 가실래요?”
“하하, 물론이죠.”
플라리노가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렸다.
“저는 이곳이 너무 좋아요.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조용하니까요.”
“전부 플라리노 씨 덕분이죠.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고마워하고 있어요.”
“에이, 아니에요. 저도…….”
손사래를 치던 플라리노의 동공이 멀리서 다가오는 자를 보고 흔들렸다.
“왜 그러시죠?”
플라리노의 시선이 향한 곳에, 루피스트와 단테가 나란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루피스트…….”
플라리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여기 있었군. 마침 잘됐어.”
플라리노에게 성큼성큼 다가온 루피스트는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너희 족장 어디 있어? 안내해.”
이미 거래는 끝났고, 루피스트는 화족의 삶에 관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무, 무슨 일이신데요?”
“말할 시간 없어. 긴급 사안이야. 소세계창유의 능력을 우리가 좀 써야겠다.”
플라리노가 소리쳤다.
“약속했잖아요! 생화의 씨앗도 다 넘겨줬잖아요! 우리는 그냥 평화롭게 지내고 싶을 뿐이에요!”
“평화?”
플라리노의 멱살을 붙잡은 루피스트가 강하게 끌어당기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날 봐.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화족의 남자가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플라리노의 턱이 벌벌 떨렸다.
“내가 지금 제정신으로 보여? 무슨 생각으로 여기 왔을 거 같아? 다 뒈질래?”
“흐으…… 흐으으으…….”
화족의 특징인 ‘극단적 수동성’이 발현되면서 그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떻게 이런 눈을 할 수 있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동물의 정점에 있는 눈빛이었다.
“마지막 기회다. 족장에게 안내해.”
플라리노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냐고 묻는다면, 그녀의 대답은 단연코 인간이었다.
차가운 세계 (3)
***
단테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벽과 지붕이라는 개념 대신 태양길이라는 독특한 주거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나무들이 엉킨 곳을 따라 태양이 들어오면 땅은 마치 별처럼 빛났다.
‘그들도 음식을 먹지만, 극한의 상황에서는 물과 태양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하지.’
물론 육식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천장이 일자로 열린 태양길을 따라가자 플라리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아, 이 햇빛 좀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인가요. 여러분도 이 태양길을 걸으며…….”
화족의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었으나, 돌아오는 건 루피스트의 차가운 눈빛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예상과 달리 루피스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을 좋아하나?”
“네? 아, 당연하죠. 화족에게 태양은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선물인 걸요.”
“나도 좋아해.”
플라리노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그렇다고 이유 없이 올려다보지는 않지. 인간 중에 하늘이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왜요? 이렇게 좋은데. 햇살을 받으며 가만히 눈을 감으면 행복하잖아요.”
“행복?”
루피스트가 비웃었다.
“지금의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버린 게 뭔지 알아? 개체의 행복이야. 전체 인구의 고통을 동력으로 삼는 거지.”
화족 남자가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아무도 행복할 수 없다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너희들을 지배하기 위해.”
“…….”
“우월할 수 있다면 행복도 포기하는 게 인간이지. 최고를 향한 광기라고 할까? 그런데 우리보다 더 광기에 사로잡힌 시스템이 등장했단 말이야.”
화족들은 영역을 벗어나지 않지만, 소세계창유를 통해 정세는 읽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미쳐 있느냐에 따라 시스템의 승자는 갈리게 될 것이다. 알겠어? 인간은 이런 세계에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태양이 어쨌다는 둥, 행복이 어쨌다는 둥.”
플라리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도 실패한 종족이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이렇게 숨어 사는 거잖아요.”
“아직 단정 짓기는 이르지.”
플라리노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루피스트가 검지로 허공을 찍었다.
“어쨌든…… 날씨는 죽이잖아.”
하늘이 있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얼마 만이던가?
‘나도 은퇴할 때가 됐나?’
언제부터 감상에 잠기게 되었지?
“오셨군요.”
해가 잘 드는 자리에, 흑발의 머리를 늘어뜨린 여성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저 여자…….’
공기에서 풍부하게 맡아지는 연꽃의 향기에 루피스트가 걸음을 멈췄다.
“화족의 직계인가?”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네. 로터스 혈통의 프로테아라고 합니다. 누추한 곳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래의 대가로 살 곳을 주었으나 족장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마을이 생기고 난 뒤에 자력으로 찾아온 화족이 있다는 보고를 들었을 뿐이다.
‘로터스 혈통. 남아 있었군.’
화족의 시초는 연꽃으로 알려져 있다.
“아주 먼 옛날, 이름 모를 부처가 연꽃에 앉아 4만 년의 시간 동안 구도에 매진했지요.”
프로테아가 말했다.
“그 연꽃은 시들지도 죽지도 않은 채, 부처와 함께 인간의 삶에 대해 들었다고 합니다.”
루피스트가 받았다.
“그리고 부처가 떠나는 날, 연꽃 또한 화신을 깨달아 인간이 되었다. 그게 화족의 탄생 설화.”
속설일 뿐이지만, 사실이 아니고서는 화족의 혈통이 다양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날 수 없어. 최초의 화족이 소세계창유를 통해 전파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눈앞에 있는 로터스 혈통은 부처에게 깨달음을 얻은 화족의 직계인 것이다.
‘짜증 나는군.’
다른 화족이라면 윽박지르면 그만이지만, 프로테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래요. 저희들의 은인이신 루피스트 씨께서, 무슨 연유로 이곳에 들르셨나요?”
“알고 있잖아?”
직계의 능력이라면 마을을 넘어 숲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후. 네, 사실은……. 루피스트 씨의 시스템에 대한 철학은 잘 들었습니다. 생화를 정밀하게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나 보군요.”
단테가 순순히 시인했다.
“네. 초거대 구조물입니다. 따로 인터페이스를 구축했지만 정밀 작업에는 수십 명이 동원되죠.”
“반면에 소세계창유라면 화족 1명이 신경 단위까지 통제할 수 있을 테고요.”
루피스트가 나섰다.
“알면 얘기가 빠르겠군. 우리가 패하면 너도 살아남을 수 없다.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화족의 판단은…….”
프로테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거절입니다.”
예상 밖의 대답이지만 루피스트는 거침이 없었다.
“그럼 죽어.”
그녀를 중심으로 칼날이 치솟자 플라리노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물러섰다.
“너 하나 없다고 전략이 변하지는 않아. 네 목을 들고 돌아다니면, 다른 화족들도 동참하겠지.”
단테가 물었다.
“왜죠? 이미 세상의 절반은 마족에게 넘어갔어요. 인간이 패하면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어요.”
화족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생화는 고대 병기, 화족 전체를 동원하는 것으로 봤을 때 최소한 수백 기가 있다는 거겠죠. 그런 강력한 무기로도 막을 수 없는 적이라면, 우린 희생양이 아닌가요?”
루피스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도 그만큼의 대가를 치를 거다. 전부 얻기 위해 전부를 거는 것, 그게 전쟁이야.”
“인간의 전쟁일 뿐입니다. 화족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을 제시하세요. 아니면 협조는 불가능합니다.”
숲에서 듣고 있던 화족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소세계창유를 발동했다.
숲이 우수수 흔들리고, 지면 아래로 신경 다발이 지나가는 듯 꿈틀대는 감각이 전해졌다.
“흥.”
루피스트가 콧방귀를 뀌는 순간, 그의 옆에 사람보다 거대한 칼날이 솟아올랐다.
“크윽!”
몇몇 화족들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프로테아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겁박은 소용없습니다. 여태까지 우리를 마음대로 다뤘지만, 죽음만큼은 스스로 택할 겁니다.”
“제, 제가 할게요.”
모두의 시선이 플라리노에게 집중되었다.
“제가 생화를 움직일 테니 싸우지 마세요. 이미 해 봤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프로테아가 눈을 부라렸다.
“플라리노, 뭐 하는 거냐? 화족 전체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야. 선택권은 없다.”
“선택권이 없다면 적어도 싸워야죠. 인간이 패하면 화족도 멸망하고 말 거예요.”
“아니, 어차피 멸망할 거라면 인간 따위는 돕지 않을 거야. 여태까지 그들이 한 짓을 생각해. 너의 육체를 희롱하고 너의 정신을 능욕했어! 가장 이기적인 게 인간이다!”
“알고 있어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루피스트 씨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다면…….”
플라리노의 시선이 루피스트에게 향했다.
“처음부터 화족의 마을도 마련해 주지 않았을 거예요. 이곳은 정말로 우리가 원했던 장소인 걸요.”
최적의 장소였다.
“너는 속고 있는 거야. 저자가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우리를 이용하기 위해…….”
“날씨가 좋다고 했어요.”
플라리노가 말을 이었다.
“햇살의 따스함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녀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었다.
“알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더 차갑게, 차갑게…….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거죠?”
“아니. 난 원래 차가운 놈이야. 그리고 인간은 악하다. 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루피스트가 여자를 대하는 게 어려운 이유였다.
‘이상한 데서 감성적이야. 짜증 나게.’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적이 다가오고 있는데 착한 놈이든 나쁜 놈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