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875
“이것이 옳다.”
앙케 라는 기만하지 않는다.
차갑기 때문이다.
“울티마 시스템은 곧 해체될 것이다. 너에게 인간을 주마. 두려워하지 않을,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오직 너를 찬양하는 인간을 만들 것이다.”
“흑……흑…….”
무릎을 꿇은 채 땅에 머리를 처박은 이카엘의 어깨가 쉴 새 없이 떨렸다.
이카엘이 제불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사티엘이 그녀를 발견하고 빠르게 날아왔다.
“천사장님!”
넋이 나간 듯한 이카엘의 얼굴에 움찔했으나, 그보다 거핀에 대한 걱정이 컸다.
“앙케 라 님은 만나셨나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죠? 거핀은 어떻게 됐나요?”
거핀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이카엘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자의 이름을 내 앞에서 입에 담지 마라.”
“네?”
“회담을 빌미로 앙케 라 님에게 이빨을 드러낸 자다. 사기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이카엘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리고 나까지 능멸했지.’
앙케 라와 사생결단을 낼 생각이었으면서, 그녀에게는 언질조차 하지 않았다.
‘날 이용한 거야. 그 녀석의 마음에는, 애초부터 나 같은 건 있지도 않았어.’
“하지만 천사장님, 거핀은…….”
“사티엘.”
이카엘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본 사티엘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두 번 말하게 만들지 마라.”
이카엘이 자신의 방으로 나아가자 사티엘이 천천히 길을 열어 주었다.
“아라보트의 성소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마라. 천사장으로서 내리는 명령이다.”
***
앙케 라는 천사들에게 울티마 시스템의 해체 방법을 찾아낼 것을 지시했다.
해답은 카리엘이 찾아냈다.
“일화의 술. 가이아인을 통합시키는 거지. 소정화 이후 블랙 엘릭서의 양은 넘치고도 남아. 채취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하지만 천사를 보내면 문제없을 거야.”
유리엘이 물었다.
“통합이라고? 그건 오히려 적을 더 강하게 만드는 꼴이 아니던가?”
“단순하기는. 울티마 시스템의 핵심은 다양한 개성이 하나의 옳음을 추구하는 것에 있다. 여태까지 그 하나를 파괴하지 못했지. 그렇다면 다양한 개성 쪽을 붕괴시키는 거야.”
사티엘이 백경의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저는 반대입니다! 거핀의 생사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가이아인을 소멸시킬 수는 없어요! 모든 절차는 전말이 투명하게 공개될 때에야 진행될 것입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일화의 술로 만들어진 거인은 다시 인간으로 분리될 테니까. 울티마 시스템을 제거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그게 살인하고 뭐가 다른데요?”
“이해를 못 하는군. 살인이 아니라니까? 인류는 전보다 더 번성할 거야. 우리의 통제 아래에서.”
사티엘이 참지 못하고 이카엘을 돌아보았다.
“천사장님! 뭐라고 한 말씀 해 주세요!”
천사들의 시선이 이카엘에게 집중되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는 모습은, 이제 백경에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회담이 있고 벌써 긴 세월이 흘렀으나 그녀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하지.”
이것 또한 익숙한 말이었다.
“하아.”
이카엘은 침대에 누워 밤새도록 뒤척였다.
‘어째서 이러는 것인가? 모든 게 끝났다. 세상은 안정되었고 나는 천사장이야.’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될 거라 여겼건만, 오히려 심마는 밤마다 커져 갔다.
‘날 이용했잖아! 거짓말쟁이!’
분노가 치밀어 치가 떨리면서도.
‘정말 그럴까?’
혹시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었다.
‘다 거짓이었다고? 그 모든 게?’
너무나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내왔기에, 천사의 이성으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거핀…….”
그의 이름을 한 번 입으로 되뇌어 보는 순간 울컥 감정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흐윽!”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이카엘은 아라보트의 첨탑을 향해 날아갔다.
성소에 도착한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문을 노려보았다.
‘이곳에 거핀이 있다.’
그녀의 속도로 1초면 오는 거리.
충동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곳에 찾아온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카엘은 간절하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고 싶어. 아니,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러면 모든 걸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은 착각이다.
앙케 라의 말이 떠오른 순간, 이카엘은 입술을 깨물며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을 움켜쥔 그녀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성소의 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고요했다.
‘끝났어.’
슬픈 표정으로 몸을 돌린 그녀가 빛의 날개를 활짝 펴고 처소로 돌아갔다.
‘모든 게 끝난 거야.’
또 한 번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착각일지라도 (1)
블랙 엘릭서로 인간을 녹여 거인으로 통합시키는 술법, 일화의 술.
최초의 목적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울티마 시스템을 해체하기 위함이었다.
술법의 특성상 기술의 발전은 실험의 질보다 양에 좌우되었고, 카리엘의 주도하에 아주 긴 시간 동안 가이아인의 숫자는 줄어들어 갔다.
“빨리 움직여! 신성한 의식이다! 율법의 죄를 깨끗이 씻어 내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야!”
마라들이 다그쳤으나 일화의 술 대상자들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가이아인 중 누구도 후세를 낳지 않았고, 이제 그들이 마지막 남은 100명이었다.
오늘 이후로 일화의 술은 신민이라 불리는 새로운 인류를 통해 진행될 터였다.
가히 역사적인 날.
이카엘은 청동 거인상으로 걸어가는 가이아인들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저항도, 억울함도 없어 보였다.
이유는 알고 있다.
그들이 거핀의 의지를 받들수록, 진정 신에 가까운 존재가 누구인지 명확해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헛수고야.’
이카엘의 성광체가 건조한 빛을 발했다.
‘앙케 라와 거핀의 회담을 아는 존재는 이 우주에서 오직 나밖에 없다.’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는 한 누구도 알 수 없고,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의미가 없는 투쟁이라는 것을 어째서 모르는가?’
광장의 중심에서 사티엘이 소리쳤다.
“일화의 술을 중단하세요! 이미 할 만큼 했잖아요! 가이아인의 명맥만큼은 이어 가게 해 주세요!”
거인과 요정, 신민이 등장하면서 천국의 계급은 세분화되었고 대천사의 직급은 하늘을 찔렀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귀에 못이 박혀 자동으로 음 소거가 되는 것이었다.
‘딱하기는. 아직도 인간을 믿느냐?’
이카엘은 여태까지 일화의 술이 치러지는 동안 단 한 번도 끼어든 적이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저 100명의 인간이 사라지고 5명의 거인이 태어나는 일일 뿐이다.’
자아를 상실한 거인들은 요툰하임에서 새로운 율법을 부여받고 돌아오게 된다.
‘이것으로 가이아인의 역사는 영원히 사라진다.’
영원히.
‘…….’
마지막이라는 단어에는 마법의 주문이라도 걸려 있는 것인지, 이카엘의 신경이 곤두섰다.
‘사라진다고?’
거핀을 알고 있는 모든 가이아인이 천국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시는 거핀의 이야기를 물을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뇌리에 꽂힌 순간.
“두렵지 않으냐?”
이카엘은 어느새 일화의 술 대상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천사장님!”
천국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에 마라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황급히 길을 열어 주었으나, 이카엘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가이아인에게 다가갔다.
“거인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겠지? 너희들의 정신은 짓이겨지고 뭉개져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백지상태에 새로운 율법이 적히는 거야.”
섬뜩한 말이었으나, 가이아인은 감정의 변화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더욱 화가 났다.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보는 게 어떠냐? 그 위대한, 그것도 최후의 가이아인이지 않으냐? 정말로 두렵지 않으냐? 아니면 원통한가? 너희들은 무슨…….”
한 노인이 이카엘의 말을 끊었다.
“날씨가 좋군. 이런 날은 빨래를 널어야 하는데.”
당장 죽을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황당한 소리에, 이카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긴.”
노인이 이카엘을 돌아보았다.
“의미 없는 잡소리에 잡소리로 답했을 뿐이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이카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마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냐? 좋다, 내가 말해 주지. 그건 착각이자 오류다. 거핀은 사기꾼이야. 지금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려 줄까?”
노인이 쯧쯧 혀를 찼다.
“제정신이 아니구먼.”
이카엘에게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뭐라? 감히 하찮은 인간 따위가 천사장을 능멸해?”
하지만 노인은 상대하기 귀찮은 듯 순순히 사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됐소. 미안하오.”
“기다려!”
이카엘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다! 일화의 술과는 별개로 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야!”
“하아.”
한숨을 내쉰 노인이 내뱉었다.
“대체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 뭐요?”
계속해서 말을 쏘아붙이려던 이카엘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입이 닫혔다.
“거핀에 대해 궁금한 것이오? 좋소, 말해 주지. 당신의 말대로 거핀은 사기꾼이오. 이제 만족하오?”
이카엘은 침묵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 줄까? 거핀은 사기꾼이 아니오.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지. 이러면 기분이 좀 풀리겠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애꿎은 말장난은 그만하고, 당신의 일이나 잘하시오. 정신 좀 차리라고, 이 천사장아.”
인간의 무례는 이제 정신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거핀은 나에게…….”
“아니, 아니.”
노인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저었다.
“틀렸어. 나에게 거핀은, 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
“아니야.”
이카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렇게 떠날 거였으면서, 나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고.”
노인은 깊은 눈으로 이카엘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에게 말을 한 적이 있소?”
“그건……!”
이카엘이 황급히 입을 열려고 하는 그때, 노인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래,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게야. 복잡한 상황 때문에, 혹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까 두려워서. 어쨌든 그런 수많은 이유들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면 말이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노인이 말했다.
“거핀도 그러지 않았을까?”
“…….”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이카엘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왜 당신만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왜 남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울티마 시스템의 본질은 말이오.”
노인이 자신의 가슴에 손바닥을 얹었다.
“남들도 나와 똑같이 마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오. 따라서 당신이 하기 힘든 일은…….”
노인이 슬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핀에게도 힘든 거야.”
이카엘은 온몸에 전율이 치밀었고, 상체가 부르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던진다고 표현하지. 마음은 던지는 거야. 돌아올 수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 그래서 당신의 말대로 착각일지도 몰라. 하지만.”
노인이 행렬의 뒤를 따라가며 내뱉었다.
“속은 시원하잖아?”
한참 동안 그의 말을 곱씹던 이카엘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밀었다.
“아, 저기…….”
“나서지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