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982
피카라스가 손가락을 튀겼다.
“키야, 이제 보니 우리 비서실장님, 안색이 어두운 게 다 이유가 있었군요. 이런 때일수록 아랫사람이 제대로 모셔야 하는데요. 저부터 신경 쓰겠습니다!”
“껄껄, 뭐, 잘하는데 뭐.”
피카라스가 조용히 펜을 건네자 모노라스가 결재란에 피의 서명을 했다.
“브라보! 역시 화통하셔!”
서큐버스들이 까르르 웃으며 박수를 치는 가운데 피카라스가 손을 휘저었다.
“밖에서 뭐 하냐? 빨리빨리 가져와라!”
술과 음식을 한가득 담은 수레가 끝없이 들어와 테이블을 채우고 빠져나갔다.
“한잔하셔야죠. 지금 성에도 들어오지 못한 서큐버스들이 줄을 서 있습니다.”
“껄껄껄! 그으래?”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나는 동안 후작은 무려 일곱 장의 결재 서류를 통과시켰다.
“자, 이번에는 불의 댐 통제권에 대한 마이드런 후작령과의 분쟁인데요.”
“야! 이제 좀 놀자!”
피카라스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모노라스에게 상체를 기울였다.
“이게 끝입니다. 진짜! 마지막! 맹세!”
그리하여, 화공사에서 한창 화두로 떠오른 제78지류 분쟁 상황이 종결되었다.
“아우.”
레테가 왼쪽 어깨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요즘 왜 이렇게 어깨가 아프지?”
리오나가 고개를 돌렸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심령권 닫히고 잠도 못 자고 일만 하셨잖아요. 제가 주물러 드릴까요?”
“아직은 괜찮아. 여기서 더 빌어먹을 일만 터지지 않으면. 그나저나 빨리 대공이 와야 할 텐데.”
피로에 잠긴 레테의 얼굴을 바라보며 리오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유능한 분이신데.’
그녀가 아니었다면 심령권이 닫힌 이후 지옥은 큰 혼란에 빠졌을 터였다.
“대공이 오시면 고칠 수 있을까요?”
“모르지. 그래도 히든 코드를 다루는 걸로는 지옥에서 1인자니까. 그러고 보니 한번 봐야겠다. 리안을 담당하는 인포메이터가 누구지?”
“비비안일 거예요.”
“그래…….”
레테는 어깨를 두드리며 비비안의 자리로 향했다.
“게헨나의 사슬. 지금 뭐 하고 있어?”
“쉬지 않고 전진하고 있어요. 방향으로 봤을 때 화공사가 목적지인 것 같아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디쯤인데?”
“이제 곧 통곡의 벽을 지날 것 같아요. 그런데 사장님, 통곡의 벽만 지나면…….”
비비안이 화면의 고도를 높였다.
“조만간 라비에트인데요. 마도 공학의 도시. 비서실장님이 출장 간 곳 아니에요?”
“응?”
레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맞아! 그냥 거기서 리안의 오류를 수정하면 끝나는 거잖아? 모노라스가 하면 되겠네!”
그녀가 소녀처럼 박수를 치는 가운데, 비비안은 다시 고고도의 화면을 살폈다.
‘도착했네.’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지르고 있는 시커먼 벽이 시로네와 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우우!
도착하기 전부터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통곡의 벽이구나.’
상하좌우 어디를 살펴도 벽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아마 두께도 비슷할 터였다.
리안이 걸음을 멈췄다.
“엄청나군.”
벽의 크기에 비하면 그들의 존재는 먼지보다 작았다.
“괴로워……. 여기서 꺼내 줘…….”
얼마나 많을까.
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인간의 육체였다.
“끔찍하다.”
고름마저 썩어 기름처럼 검게 변하고, 표면은 튀어나온 얼굴과 팔다리로 그로테스크했다.
“배고파……. 목, 목이 말라…….”
누구 하나 큰 소리를 낼 기력조차 없음에도 워낙에 수가 많아 시끄러웠다.
“화공사로 가려면 이 관문을 지나야 해.”
전체에 비했을 때 균열보다 작은 틈새가 벽을 수직으로 양분하고 있었다.
“좋아. 가자, 시로네.”
게헨나의 사슬이 언제 발동될지 모르지만, 리안의 나침반은 언제나 직진이었다.
흑승(1)
통곡의 벽을 양분하는 틈새는 멀리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협소했으나, 막상 다가갔을 때는 폭이 20미터로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하아. 하아.”
그저 숨을 쉬는 사람들.
“저기, 자네. 물을. 나에게 물을 줄 수 있겠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
리안은 어떤 것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들어온 길도 나가는 길도 보이지 않을 무렵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시로네, 이들은 뭐지?”
아니, ‘이것’이라고 불러야 할까?
“정화되지 못한 자들.”
시로네는 통곡의 벽에 튀어나온 수많은 손과 발이 꿈틀대는 걸 보았다.
“통곡의 벽은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야. 이면 세계의 곳곳에 퍼져 있지. 현실로 따지자면, 토목공사에 필요한 창고라고 할까?”
“창고? 인간이 재료라는 말인가?”
“흑승이라 부르는 존재가 있어. 아니, 사실은 시스템에 가깝지. 정화 시스템의 적극적 공격 형태로, 이곳에 떨어진 생물을 잡아들이는 역할이야.”
“그들이 여기에 인간을 쌓았다는 건가? 왜? 네 말대로라면 정화시켜야 하잖아?”
“지옥은 현실의 이면이니까. 속성이 반대일 뿐, 살아가기 위해 많은 것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야. 현실에서는 유기물과 무기물이 있지. 유기물은 식량으로 사용되고, 무기물은 수많은 구조의 재료가 돼.”
리안은 이해했다.
“지옥은 그 반대라는 거지.”
“응. 마족의 식량은 지옥 불에서 탄생한 마魔, 즉 정제된 마족이야. 사실 이렇게 들으면 동족을 먹는 것 같지만, 마족이라고 다 같지는 않아. 인간도 생물이라는 범주에서 닭이나 돼지를 먹잖아. 물론 쌀이나 밀도 그렇고.”
시로네는 벽을 가리켰다.
“반대로 지옥에서 무기질의 역할을 하는 것은 정화되지 않은 마魔. 즉 인간의 탁한 감정 그대로야. 하지만 무기질이란 게 필요할 때는 대량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별한 창고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통곡의 벽이 되었다.”
“응. 이 정도 규모라면 불의 강의 댐 공사나, 도시 확장 공사에 동원될 거야. 통곡의 벽을 가공해서 운반하는 하청 업체가 따로 있다고 하는데…….”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구조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면 되겠지. 리안에게는 너무 가혹한 말이야.’
현실과 이면을 동시에 아우르는 시로네에게 통곡의 벽은 그저 시스템일 뿐이지만, 리안은 달랐다.
“그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흑승이야. 지옥 각지에서 붙잡은 탈주범들을 데려올 테고, 분명 여기에도 있을 거야. 물론 워낙에 거대한 규모라 부딪힐 확률은 적지만.”
현실로 따지면 대형 물류 창고에서 관리자를 만나는 정도의 확률이었다.
리안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흑승이든 뭐든, 나타나면 베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쉽지 않을 터였다.
‘흑승의 사슬은 이면 세계에서 가장 구속력이 강한 히든 코드. 게헨나의 사슬을 끊었다고 해도…….’
생각에 잠겨 있는 그때, 리안이 걸어가는 좌측 벽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 주시오.”
가급적 시선을 돌리지 않았던 리안이었으나, 간절한 목소리는 이겨 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자 얼굴과 두 팔이 양각처럼 튀어나온 노인이 울고 있었다.
“너무 괴롭다오. 나 좀 여기서 꺼내 주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소. 제발…….”
“시로네.”
리안의 말을 듣기도 전에 시로네가 답했다.
“불가능해.”
“절대로 방법이 없는 거야? 예를 들어 게헨나의 사슬로 벽을 정화시키면…….”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리안, 잘 들어. 여기에 있는 자들은 현실의 인간이 아니야. 그들의 감정이지.”
“알고 있어. 하지만 도움을 구하고 있잖아.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리안은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지.”
그렇기에 존경하는 친구지만, 시로네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옥 불을 정화시켰을 때와는 달라. 그건 순수한 마의 결정체니까. 게헨나의 사슬을 따라 너를 태우고, 너는 그것을 이겨 낼 수 있어. 하지만 이들은 아직 정화되지 않은 혼탁한 마魔야. 만약 여기에 게헨나의 사슬을 꽂게 되면…….”
시로네가 찝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들의 모든 감정이 너에게 전달될 거야. 자칫하면 너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
그렇더라도 하는 성격이지만, 아마도 리안은 이쯤에서 고집을 꺾을 터였다.
“……그래.”
시로네를 위험에 빠트리는 어떤 행동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안해, 리안.’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시로네도 마음이 답답했다.
“부디…… 살려 주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노파의 처절한 몰골을 잠시 눈에 담아 두고 있던 시로네가 고개를 돌렸다.
“그만 가자. 오늘 안에 통곡의 벽을 빠져나가려면 쉬지 않고 걸어야 해.”
벽에서 시선을 거둔 리안이 시로네의 뒤를 따르려는 그때, 광풍이 불었다.
바람에 섞여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리석은 죄인들이여.
하늘을 살피자 검은 구름처럼 생긴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흑승이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시로네와 리안은 벽에 등을 대고 모습을 숨겼다.
‘상당히 많은 숫자야.’
폭 20미터의 틈새로 살피는 것임에도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리안이 물었다.
“불필요한 위험을 피하는 건 찬성이지만, 그렇게 강력한 놈들이냐?”
만일의 사태 때 흑승과 상대하려면 적의 전력을 파악해 두는 편이 좋았다.
“시스템의 문제야. 놈들의 사슬은 정화되지 않은 마魔에게 엄청난 구속력을 발휘하니까.”
“흠.”
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는 그때, 뒤에서 앙상한 팔이 넘어와 목을 휘감았다.
“여기…….”
조금 전에 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한 노파였다.
“여기 있다! 탈주범들이 여기 있다!”
바로 옆에서 들린 소리에 귀가 아팠으나, 그보다 먼저 생긴 감정은 의문이었다.
‘왜?’
리안의 마음을 비웃듯 벽에 박힌 수많은 얼굴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두 놈이 숨어 있다! 빨리! 빨리!”
목소리가 계속 전달되면서 벽을 타고 올라가더니 마침내 하늘에 도달했다.
이어서 검은 구름이 틈새로 들어오더니 무서운 속도로 시로네와 리안에게 낙하했다.
“피하자, 리안!”
리안은 노파의 팔을 뜯어 버리고 돌진했다.
“여기! 여기!”
벽에 있는 수많은 손가락이 그들을 향해 흔들리고 괴성이 날아들었다.
“이쪽으로 간다! 빨리 잡아!”
시로네의 옆을 따라잡은 리안이 물었다.
“왜 우리를 고발하지? 흑승에게 공을 세우면 통곡의 벽에서 풀려나는 건가?”
“아니, 저들은 지옥에서 무기물과 같은 취급이야. 해방은 절대 불가능해.”
“그럼 이유가 뭐야?”
이들이 흑승에게 고발한 이유.
시로네의 생각에는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우리가 불행하기를 바라니까.”
“뭐?”
“저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없어. 그저 우리가 더 나은 상태인 게 싫은 거야. 그래서 기를 쓰고 끌어들이려는 거지. 똑같은 불행을 겪게 하려고.”
조금 전까지 눈 뜨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자들이 고성을 꽥꽥 내지르고 있었다.
“여기! 여기라고!”
그들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리안은 가슴의 불꽃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일 뿐이다.
‘시로네를 지킨다. 오직 그것만 머릿속에 박아 두고 움직이면 되는 거야.’
흑승이 오고 있었다.
넝마 같은 천이 펄럭거리고, 그 어둠 사이에 하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해골? 아니, 그것보다 저들이 걸친 망토가 문제야. 움직임을 읽을 수가 없다.’
세상에 없는 물질.
마치 기체, 액체, 고체의 세 가지 상태가 동시에 섞인 듯한 물리적 변화였다.
-어리석은 죄인이여.
“리안! 지금이야!”
길목의 앞뒤를 차단한 흑승들이 망토에서 검은 사슬을 쭉 하고 뽑아냈다.
동시에 시로네와 리안이 위로 날아올랐고, 리안은 벽을 밟으며 상승했다.
콰아아아앙!
아래를 살피자 검은 사슬이 거미줄처럼 복잡한 패턴으로 벽에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