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01
00101 [열여섯 번째 역] 둘 아닌 셋 =========================================================================
대니얼도 화가 났다며 돌아가버렸다. 리건은 혼자가 되었다. 새벽이 깊어갈 즈음 파블리아 저택으로 돌아왔다.
저택에 들어가기 전 정문 화단에 핀 장미 덤불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꺾었다. 헨슨이 그를 맞이했다. 리건은 카렌디 백작에게 들은 사과 서신에 대해 헨슨에게 물었다. 헨슨은 그것은 전부 잉그리드에게 바로 전해졌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그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이야기도 했다고. 리건이 병신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지랄을 할 때 잉그리드는 말없이 정리했던 것이다.
침실로 향했다. 큰 침실에 잉그리드는 없었다. 리건은 장미를 든 채 작은 침실의 잉그리드를 찾으러 갔다. 만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해명하고, 아니라고, 이제는 아니라고. 정부 따위 없다고. 이미 제가 지껄였던 말들은 사람과 사람의 입을 타고 퍼져나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을 테지만 앞으로는 정말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작은 침실의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초 하나만 덩그러니 켜져 있다.
잉그리드는 잠이 들었는지 인기척이 없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옆자리에 조용히 몸을 기대어 앉아, 흐트러진 백금발의 머리칼 끝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들고 있던 장미는 잉그리드와 그 사이에 내려놓았다.
인기척을 느낀 잉그리드의 눈꺼풀이 열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서서히 그에게 초점을 맞추어 왔다. 울기라도 한 것처럼 부은 눈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들어왔네요.”
잉그리드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불 위에 걸쳐 있던 장미가 툭 굴러떨어졌다. 잉그리드가 고개를 숙여 바라보았다. 리건이 그도 모르게 잉그리드의 손을 쥐었다.
“꽃?”
“……들어오다가……”
……생각이 나서.
목이 잠겼다. 쓰레기 같은 말은 쉽게도 뱉으면서 정작 제 속에 있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후회할 말들은 그렇게나 쉽게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정작 목구멍에 걸려버려서.
벨라가 문제가 아니라 제가 문제였다. 자신이 문제다. 알면서도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조차도 모르겠다.
거의 한 달 가까이를 데면데면하게 지내다가, 느닷없이 꽃을 가져왔으니 잉그리드도 이상하다 싶을 것이다. 분홍색의 장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잉그리드가 힘없이 미소를 그렸다. 리건의 가슴은 그것만으로도 두근거렸다.
“……뭐예요, 정말.”
이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아니라고 사과부터 해야지.
막상 무언가를 말하려 하니 입술이 얼어붙었다. 그런 리건의 얼굴을 바라보던 잉그리드가 잠기운이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요?”
“너, 눈이 왜 그래.”
“……좀 피곤해서.”
시선을 내리는 잉그리드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잉그리드는 어제 파르네세 공작저에 다녀와 심란한 소식을 듣고 난 후 그녀는 우울의 늪에 빠졌다. 어머니와 오빠들 앞에서는 걱정할 것 없다 말했지만,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잉그리드는 파블리아 저택으로 돌아오기 전 한때 면식이 있던 에블린가를 찾아가 그들의 주치의 상담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마약이 아기와 산모에게 미치는 영향과, 임신 초기 테임 티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잉그리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형, 정신장애, 사산…….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귀에 담으며 잉그리드는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회의했다.
리건과 결혼할 때는 잘 알지 못했다.
마약이 정확히 얼마나 나쁜 것인지도 몰랐고다. 아기 문제가 생길 줄도 몰랐고, 아기를 임신했을 때 이런 문제를 직면하게 될 줄도 몰랐다. 그냥 결혼을 하고, 적당히 리건과 사이좋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게 결혼인줄 알았다.
스스로 잘 버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제 인생이 조금 떨어진다 해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기는 죄가 없지 않나. 단순히 자신의 인생과 리건의 인생이 얽힌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의 삶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울었다. 리건을 생각하면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 잠들지 못했던 매일 밤을 독한 약차를 마셔 잠들었던 지난날이 후회가 되었고, 더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자신이 후회가 되었다. 저는 이렇게 힘든데 그림자 한 가닥 비춰주지 않는 리건이 미워 울었다. 그냥 울었다.
느닷없는 새벽에 찾아와 장미 한 송이를 쥐여 주는 손을 보는 순간 울음만 북받쳤다.
술 냄새도 났고 시가 냄새도 났다. 이래서야 아기에 대해 말하고 싶어도 말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얼마나 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아했던 사람이었다. 생각해본다고 말했다가 금세 변덕을 부려 번복했던 사람이었다.
“또 술을 마셨어요?”
“……조금.”
“또, 약도 했어요?”
실망감이 밴 목소리가 묻는다. 리건이 입술을 꾹 당겨 물었다. 잉그리드의 손을 더 세게 잡고 싶었다. 하지만 잉그리드는 아예 손을 이불 속으로 감추어 숨겼다. 가슴이 철렁한다. 리건이 잉그리드의 어깨를 당겨 안으며 가까스로 숨처럼 뱉어냈다.
“미안해. 잉그리드, 아직 많이 화났어? 응?”
“……”
“벨라 랜스터가 떠들었던 말들, 전부 내가.”
잉그리드의 어깨가 조금 굳어졌다가 서서히 풀어졌다.
언제고 리건이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 놀랍지는 않았다. 카렌디가와의 일에 리건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의외였지만, 지금 당장은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할 여념이 없었다.
“리건, 숨 막혀요. 놔줘요.”
“내가 그거, 있잖아? 예전에…….”
“……나 그 여자 얘기하기 싫어요.”
“……정부 같은 거 없어. 벨라랑은 다 정리된 지 오래고, 그 계집애도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이해하겠어? 응? 내가 했던 말은, 예전에, 내가…….”
리건의 말끝이 늘어졌다. 그 스스로도 이게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굳이 입에 올려봐야 최초의 순간부터 그가 얼마나 잉그리드를 싫어했는지를 떠드는 격이 될 것이었다.
“리건, 그만해요.”
잉그리드가 홱 리건을 밀어냈다. 가뜩이나 복잡한 속을 더 헤집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잠들고 싶었다. 임신의 가능성도 잊고, 리건의 정부도 잊고, 자신이 후회하는 걸까 생각하는 것도 잊고.
“오늘은 나 그냥 자게 두면 안 될까요?”
잉그리드는 등 돌려 누웠다. 리건은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입매를 애써 꾹 다물어 참았다. 잉그리드가 혼자 생각하고 싶다, 당분간 내버려둬 달라. 그리 말한 지 한 달 가까이가 되었다. 디어 축제가 잊힐 만큼 긴 시간이었다.
늘 먼저 다가오고, 늘 외면하지 않을 것처럼 그를 두드렸던 여자였다. 아무리 한심한 꼴을 보였어도 포용해주었던 잉그리드가 등을 돌려 누웠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야윈 어깨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불빛 아래 실루엣만 뚜렷했다. 못 본 새에 어쩐지 더 마른 듯 했다. 힘없이 늘어진 백금발을 손가락 끝으로 얽었다. 잉그리드의 침묵이 그를 더 조바심나게 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체 그녀의 뒤에 바짝 기대어 누워 말햇다.
“잉그리드. 내가 이렇게 사과하잖아, 응?”
왜 애원이라도 하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잉그리드는 꿈쩍도 않고 반대편의 반쯤 열린 창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리건은 잉그리드의 허리를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지다 꽉 쥐었다 힘을 풀었다했다. 잉그리드의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계속 말했다. ‘필요한 거 있어?’ ‘기분 풀어줄게, 말만 해. 다 해줄게.’ ‘응? 잉그리드, 잉가. 응?’
잉그리드의 손이 자신의 홀쭉한 배위를 맴도는 리건의 손등에 닿았다. 잉그리드가 힘주어 그 손을 잡아주자, 리건은 한 겹의 불안을 걷어낼 수 있었다. 힘주어 그녀의 등을 꽉 끌어당겨 안았다.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잉그리드, 내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야……. 어떻게 해야 사람새끼처럼 사는 건지 모르겠어. 그래도 노력할 거거든, 응? 그러니까 한 번만 기분 풀고……”
“……”
“내가 어떻게든…… 내가, 진짜, 어떻게든.”
미동 없이 누워있던 잉그리드의 마른 음성이 울렸다.
“리건, 있잖아요.”
리건은 말을 멈추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예전에 아기 갖자고……. 축제 둘째 날 그렇게 말했던 거. 진심이었어요?”
잉그리드를 안고 있던 리건의 팔이 굳어졌다. 그 물음 이후 잉그리드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침묵했다. 잉그리드의 손끝이 그의 손등을 쓸어내리는 타성적인 감촉이 아니었다면 리건은 그녀가 잠든 것은 아니었을지, 죽은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리건은 병신 같은 짓을 했던 지난 날을 수치스럽게 상기했다.
국왕인 아버지에게 불려갔을 때, 잉그리드가 세베루스의 국왕을 단호히 밀어내는 것을 볼 때까지 그치지 못했던 의심이었다. 정신병자처럼, 의심하고, 의심했다. 혹시라도 이 여자가 도망가버릴까봐 정신을 놓고 들러붙어 빨아대며 뇌까렸다. 아기, 갖자. 그냥, 아기부터 갖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끊으려 해도 며칠 견디지도 못하고 다시 약과 술에 들러붙는 중독자였다. 참아봐야 다시 입에 대면 수포로 돌아가는 걸 알고도 조금 참고, 다시 하고 그 짓만 반복하는 다 망가진 새끼였다. 주치의인 소이어가 심각하게 권고했다. 이 상태에서 정상적인 후사를 보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여자에게 병신새끼를 안겨줄 수는 없었다.
잉그리드가 그 사실을 알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리건이 간신히 말했다.
“아니.”
“……”
“그렇지만 잉그리드, 너와 아기를 갖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상황이 지금은 적당하지 않다고……”
“약을 해서 그래요?”
잉그리드의 처연한 목소리가 울렸다. 에드원도 그렇게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리건이라고 모를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리건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아기를 거부했던 것일 수도 있다. 잉그리드는 혼자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늦게 알아버린 것도.
“일부러 나한테는 말 안한 거예요?”
잉그리드의 젖어드는 목소리에 리건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슴이 우그러지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발끝부터 그를 갉아먹었다. 잉그리드가 그가 자식새끼 하나 제대로 갖게 해주지 못할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정신머리 멀쩡했던 헥트르 에이버리와, 사지 멀쩡하고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나았던 세베루스의 빌헬른의 그림자가 미처 그의 뇌리에서 가시기도 전이었다. 잉그리드의 배 아래로 떨어진 그의 손이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급하지도 않고, 당장은 애 같은 거 필요하지도 않고 거치적거리기만 할 테니까. 잉가, 아기는 조금만 참고……”
잉그리드가 뒤척이듯 어깨를 움직여 리건을 밀어냈다.
“……나가요. 지금 당신이랑 더 얘기하면 후회하게 될 것 같아.”
조금의 여지도 없는 일침이었다.
리건은 멍청하니 잉그리드의 뒷모습만 바라보다가 텅 빈 그들의 침실로 돌아가 누웠다. 사랑은 좆같다. 멈출 수도 없고 괴롭기만한 끔찍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질 만큼 질척하기도 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제 밑바닥 아래 또 다른 밑바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렇게’가 어떤 이렇게인지는 모르겠다. 미친 새끼처럼 살고 싶지 않은 건지, 사랑하고 싶지 않은 건지조차도 모르겠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잉그리드가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간신히 버티는 기분으로 숨을 쉬었다. 잠깐이라도 멈추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뛰는 이 가슴이 그냥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 작품 후기 ============================
[안내방송]
오늘도 어김없이 질주하는 기장입니다.
이로써 열여섯 번째 역 ‘둘 아닌 셋’역의 마지막 명소가 끝났습니다. 기장의 소리를 찾아주시는 승객분들이 계시더군. 지난 명소가 백 번째 명소라며 축하해주신 승객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팁 계속 꽂아주시는데, 그러면 기장 돼지됩니다. 내일 생일이신 승객분도 축하합니다.
요 며칠 기장은 아주 재미있게 팝콘을 튀겨 먹었다. 결혼식 역 – 헥트르 에이버리 역에서 한번 난장판이 되었던 누가 제일 쓰레기인가 토론의 장의 불이 붙으니, 흥미롭다.
어차피 흰사슴호에는 정신머리 멀쩡한 놈이 1명도 없는데, 그 안에서 멀쩡한 캐릭터를 찾으려 하시는 승객분들이 귀엽군.
기장의 소리는 희소가치를 가져야 하므로 바로 다음역 안내로 넘어갑니다.
다음 역은 ‘밀로아’, ‘밀로아’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창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