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grid the White Deer RAW novel - Chapter 153
00153 [스무 번째 역] 자장가 =========================================================================
파르네세 공작부인도 이번만큼은 조금 동요했는지, 차분히 내리깐 눈동자에 착잡함이 어렸다. 파르네세 공작은 분한 얼굴로 그 기자를 바라보다가 ‘알았으니 돌아가시게.’하고 냉랭히 내쳤다. 솔직히 저 여기자가 매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구태여 리건이 7개월이나 지나 거의 잊혀져가는 그 때의 스캔들을 테이블 위로 끄집어낼 이유가 없었다.
파르네세 공작도 그에 관하여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리건은 한결 적대감이 흩어진 파르네세 공작부처를 찬찬히 바라보며 긴장되는 입술을 잠깐 물었다가 뗐다.
“잉그리드를 제게서 감추려 하시는 건 불법입니다. 국왕 폐하께서 공인하신 잉가의 법적 보호자는 접니다. 제 동의가 없었다는 건 파르네세 공작부인께서도 아실 겁니다. 그렇게 예의 차리시는 분이 큰 실례를 하신 거지요.”
“전 르제나 백작부인의 허락이 있었지요. 당신의 어미 말입니다.”
“밀로아의 영주성에서 영주인 제가 있는데, 제 어머니의 권한이 우선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 에스펜서 공은 판단능력을 상실하셨지 않습니까. 당연히 대리인의 권리가 선행되어야 하지요.”
“조금 힘들 때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제 의사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월권이었다는 건 부정하실 수 없을 텐데요. 아, 그리고 제가 왕궁부터 들렀다는 이야기는 들으셨는지.”
파르네세 공작의 눈매에 더 힘이 들어갔다. 리건이 쐐기를 박았다.
“왕비 전하를 꾀어내셨던데, 원래 그 분은 저를 싫어하셨다곤 해도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집안 싸움에 왕실까지 분탕질을 치셨다고.”
“…….”
“왕비 전하의 의중은 아직 모르겠지만 국왕 폐하께서는 저와 잉그리드의 결혼과 이혼 문제에 전적으로 제게 권한이 있음을 인정해주셨습니다. 뭐, 인정 안하실 수가 없는 게 법이 왜 있겠습니까?”
리건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자조했다. 법이라니, 적당히 법 따위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놀아났던 제가 무슨 성인군자나 되는 양 떠드는 게 비웃음 사기 딱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실 겁니까.”
애초에 리건이 그렇게 재활시설로 갈 만큼 정신이 나간 상태가 아니라면, 초기에 어떤 형태로든 마무리 되었을 일이었다. 처음에는 ‘파르네세 가문의 제 가문 출신의 출가외인에게 억압이 과하지 않은가.’하는 여론도 있었다. 뭐, 그래도 그 때는 리건이 저질렀던 일들이 하나 둘씩 폭로되면서 그들의 과한 처우도 어느 정도 용인 받기는 했지만.
파르네세 공작도 리건이 저렇게 국왕에게 먼저 답까지 받아왔다 하는 상황에서는 섣불리 말을 꺼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녀는 고요할 뿐이었다.
파르네세 공작이 골이 아픈 기분으로 이를 갈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새끼에게 잉그리드를 돌려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도 손을 떨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재활치료소에 다녀온 이후 인간이 더 시건방지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리건의 폭력성과 위험함을 파르네세 공작은 예전부터 염려했다. 그래서 연말에 그 사건이 터지고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그와 아무런 상의도 않고 일을 쳤을 때 묵묵히 잉그리드의 이혼에 힘을 얹어준 것이다.
파르네세가의 명예는 그 순간만큼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간에서 파르네세가 자신들의 권력만 믿고 다른 가문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할 만큼 오만하다며 손가락질해도. 그 정도의 각오도 없었다면 반년이나 지리멸렬하게 끌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리건의 푸른 눈동자가 파르네세 공작의 입술에 머물렀다가 느리게 파르네세 공작부인에게로 옮겨갔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의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틀어 올린 백금발을 눈에 담으며, 잉그리드의 머릿결을 떠올렸다. 그를 마주보는 보라색의 속모를 눈동자를 응시하는 동안에는 잉그리드가 그를 바라보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잉그리드를 참 많이 닮았다.
전에도 언젠가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정말로 많이 닮았다. 새삼 잉그리드의 그 단정한 몸가짐과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히 하는 버릇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느껴졌다. 문득 지금 그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의 온기가 그들이 그를 대신해 맞섰던 잉그리드를 바라볼 때의 온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잉그리드는 그가 없는 엘뷔니에서, 먼 곳에 떨어진 그를 지탱해주며, 가족들과 다투어 왔을 것이다.
그렇게나 제 가족을 사랑한다 말했던 여자인데, 저런 눈빛을 받으며 반 년이나 홀로 견뎠을까. 가슴 안쪽이 꽉 조이는 기분이 든다.
얼마간 그를 쏘아보던 파르네세 공작이 냉정히 말했다.
“어찌 할 지는 조만간 알게 되겠지……, 그러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지. 불쾌하니.”
“잉그리드를.”
“잉그리드는 내 집에 없네.”
뻔한 거짓말에 주먹을 꾹 쥔 리건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피차 좋은 소리 주고받을 생각 없이 한 방문이었다. 필요하다면 에드원 파르네세가 밤사교회에서 벌였던 일들 중 심한 것들만 몇 가지 꺼내 협박을 해서라도, 잉그리드를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지금 이 저택을 다 뒤지면 나오겠지. 잉그리드는 그가 왔다는 걸 알면 기꺼이 함께 해줄 터다.
잉그리드를 지킬 수 있는 게 권력이라면 제 아비에게 잘 보여서라도 권력을 쥘 것이다.
잉그리드를 풍족하게 해줄 수 있는 게 부유함이라면 헤젠을 더 굴려서라도 밀로아의 영지를 부흥시킬 것이다.
잉그리드가 원하는 게 아이라면, 앞으로 더 노력하고 조심해 두 번의 실수 없이 그녀와 아이를 낳아 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잉그리드가 잃어버리는 게 가족이라면, 리건은 그것만큼은 어떻게 자신이 찾아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리건은 잉그리드에게 물었다. 대체 왜 그 귀하디귀한 왕비자리를 걷어차고 제게 와 이러느냐고. 잉그리드는 담담히 말했다.
‘왕비라는 귀한 자리만을 보고 혹하기에는 세베루스는 제게 아무것도 아닌 곳이에요. 저를 위로해줄 가족도, 친구도 없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리 말했구나. 잉그리드는 가족도, 친구도 없을 그녀의 삶이 싫다 그에게로 찾아왔다. 리건은 주머니에 쑤셔 박아 두었던 손을 꺼냈다. 그리고는 일어선 그대로 소파 옆으로 몇 걸음 가 섰다. 파르네세 공작은 마지막까지 그를 노려볼 심산인지 눈에 힘을 풀지 않은 채였으나,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그마저도 관심 없단 눈빛으로 흔들림 없이 그를 외면했다.
솔직히 지금 리건은 자신이 파르네세가에 가지는 감정이 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저 같은 새끼한테 딸을 보내는 게 미친 거라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으니, 이 자들이 드디어 제정신이 되었구나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리건이 가진 것 중, 잉그리드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독보적으로 대단했던 건 하찮은 자존심뿐이었다. 잉그리드와 그를 갈라놓으려는 파르네세들 앞에서만큼은 꺾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냥, 잉그리드를 꼭 닮은 파르네세 공작부인을 바라보는 동안 계속해서 홀로 가족들과 싸워왔을 잉그리드가 맴돌아서.
하찮은 자존심과 함께 무릎이 구부러졌다.
부드러운 카페트를 짚고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한 번만.”
제 아집을 한 겹, 한 겹, 뜯어냈다.
“한 번만 더 기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때 문이 열리며 벤디트가 돌아왔다. 벤디트는 지금 잉그리드를 가둬버리겠다고 뒷 건물로 가버린 에드원을 잡지 않고 상황을 살피러 온 참이었다. 당황했다. 파르네세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이 새끼가.’ 이제와 제 지난 만행을 잊고 딸을 내놓으라는 리건의 태도에 파르네세 공작은 그간 쌓였던 울분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리 방자하게 떠드시다가, 이제 와서? 기가 차는군!”
리건이 최대한 공격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뭉개는 기분이 들어도, 참았다.
“…….약도, 술도 마시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못 미더운 거 압니다. 실망하실 게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실망하신 것도 압니다. 그러지 않더라도 잉그리드가 제게 과분하다는 거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도 정말, 한 번만 이번 다툼에서 물러나주십시오. 한 번만. 제가 잉그리드에게 많이 잘못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가는 것이 점점 힘이 들었다. 죽은 아기가 살던 텅 빈 배를 안고 돌아가던 그 새벽의 마차가 소리가 떠올랐다. 병신처럼 아무것도 못하고, 버림받을까봐 겁에 질려 바라만 보았던 것이 그였다. 잉그리드를 위한 위로 한 마디 하지 못했고, 죽은 아기에 대한 슬픔조차 그로인해 잉그리드가 떠나갈까 하는 공포였다.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꽉 매인 목에 힘이 들어갔다. 병신 같은 아버지를 만나서, 불릴 이름조차 없이 죽어버린 아이에게도 속죄하지 못했다.
“제가, 함부로 제 인생을 살아서, 늘 미쳐있었습니다, 제가, 하지만 이제는.”
미동 없는 파르네세 공작부인, 조금 당혹한 듯 눈썹을 슥 올린 파르네세 공작, 문가에 굳은 채 서있는 벤디트 모두가 끊길 듯 이어지는 리건의 목소리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눈물은 없었으나, 애원처럼 절실했다.
처음의 마지못한 것처럼 이어가던 말은, 어느 새 파르네세 공작도 예상하지 못했던 구걸이 되어 있었다. 리건의 등을 바라보던 벤디트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건은 헤집어지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고르며 젖어드는 눈을 세게 깜빡였다.
무덤같은 정적 끝에, 파르네세 공작부인이 일어섰다. 파르네세 공작부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걸음으로 리건의 곁을 우아하게 지나치며 변함없는 태도를 고수했다.
“더 들을 것도 없는 듯하군요, 이만 돌아가세요. 에스펜서 공.”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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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승객여러분. 오랜만에 기장입니다. 슬슬, 완결이 다와가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 앞으로 남은 역은 두 개입니다. 본 기장이 이렇게 운행하는 게 빨리 완결치고 도망치고 싶어서라는 걸 요즘 자주 들킴. 쉿.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