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ection RAW novel - chapter 12
“어, 왔냐?”
“뭘 그렇게 집중해서 보는데?”
“응? 아- 이거? 영화.”
“영화?”
“응. .”
“왜? 검사 그만두고 연기하려고? 그래, 잘 생각했다. 나도 이제 네 뒤치다꺼리···.”
“아니. 여기 곽도원 선배님의 검사 연기가 아주 리얼해서 공부 좀 하고 있었다. 은근 이런 게 도움이 되더라고.”
“야, 야.”
“왜?”
“야, 다 집어치우고. 판례나 하나 더 봐. 아니면 신호진 강사님의 형법 강의를 보던지. 도움은 개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알았어, 알았어. 너는 요새 화가 많아. 너, 그거 갑상선 때문일 수 있다. 가서 체크해 봐. 사장님, 여기 고추짬뽕 하나랑 간짜장 하나 주세요.”
주문한 지 5분도 안 돼, 칼집이 잘 들어간 갑오징어와 중새우, 홍합이 가득 올려진 짬뽕과 큼지막하게 썰린 양파와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간짜장이 그들의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어찌나 맛있던지, 들어오자마자 쉴새 없이 티격태격하던 둘은 면을 반쯤 먹고 나서야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정도다.
“아침에 병원에 들러서 정혜 잠깐 보고 왔다.”
동생의 이름에 순간 목이 컥 막힌다.
주연은 옆에 따라져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녀에 관해 물었다.
“별일 없지?”
“많이 힘들어해. 네가···아니 네 몸이 아직 저러고 있으니 걱정이 많아. 살도 많이 빠졌고.”
동생 정혜한테 비밀을 털어놓는 것이 과연 현명한 행동일까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가 어떻게 발생한 건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주연은 일단 말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흥식이야 불알친구이기도 했고, 상황상 그의 도움이 절실했기에 찾아왔지만, 여동생 정혜는 조심스러웠다.
그녀를 믿지 않는 게 아니었다.
못난 오빠에게 교통사고가 난 것도 모자라 자신을 그렇게 만든 상대방 운전자의 몸으로 깨어났다고 밝히는 게 동생의 정신건강에 오히려 해가 될 것 같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네가 잘 좀 보살펴줘.”
주연은 평소답지 않게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기는 하는데···. 그래도 언젠가는 말해야 하지 않겠냐?”
“······때가 되면···. 지금 좀 더 지켜보고.”
“······그래.”
그 부분에 있어서 굳이 말하자면 흥식도 정의에게 동의했다.
“네가 나 대신 더 챙겨줘.”
“언젠 안 그랬냐?”
“더 더 챙겨주라고.”
“더 더 더 챙겨줄 거다.”
피식-
“알았다. 고맙다.”
“고맙긴, 새끼···. 근데, 너는 맨날 이렇게 나와서 먹어도 되냐? 너의 팀에서 네가 막내라면서? 그럼 네가 ‘밥 총무’ 아냐?”
검찰청에 오래된 관습 중에 하나로 부서의 막내급 검사가 점심, 저녁 식사 총무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매일 선배들의 식사 여부를 확인하고 메뉴를 선정하는 일을 맡았다.
“밥 총무? 우린 그런 거 없던데? 가끔 와서 묻기는 해도 다 각자 먹는 분위기던데.”
“어? 진짜? 그새 문화가 바뀌었나?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너 왕따 아니야?”
“왕따?”
그러고 보니, 지검에 와서 같이 밥 먹자고 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설마 혹시···.
“왕따네, 이 새끼. 왕따야.”
늙은 사기꾼과 연기파 검사 (2)
“그런데 그때 그 박주헌 변호사 사건에서 그 사람 핸드폰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그런 것도 보여?”
장동장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흥식은 문득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말 안 했던가? 장면 중에 보였어.”
“그 장면이라는 게 손을 잡은 채로 눈을 보고 있으면 스르륵 지나가는 거라며 그럼 그 와중에 그걸 캐치한 거냐? 아니면 네 머릿속에 남는 거야?”
“음···전자라고 하는 게 맞을 듯싶네. 근데, 또 이게 영화를 보듯이 길게 보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휙 지나가기는 하거든. 그런데 마치 그 장면을 천천히 본 것 같은 느낌은 든단 말이지.”
“그게 뭔 소리야? 휙 지나가는데 천천히 본 거 같은 느낌이라는 게.”
“그니까, 그게···음···너 봤지? 마치 내가 거기 나오는 퀵실버가 돼서 그 사람 과거의 장면을 휙 한번 둘러보고 온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
“이해가 안 돼?”
“응, 안 돼.”
“그니까 내가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악수하는 순간은 짧지만, 그 사람의 기억은 슬로우 모션으로 다 보이는 그런 상대성이론 같은 느낌적인 느낌. 오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물은 내가 잘못이다. 그래도 조심해라. 지금까지는 초범들을 많이 만나서 네 그 잡기술이 통했는데. 상습범들은 눈앞에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들을 하니까.”
“알았어, 알았어. 야, 너, 그 소리 벌써 몇 번째인 줄 아냐?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그래?”
“야, 너는 뭐 나이 안 들었냐?”
흥식의 반박에 정의는 건방진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줘패버리고 싶은 표정은 뭐냐?”
“나는 이제 갓 서른이잖아.”
“어쭈 지랄은. 야, 몸뚱이가 젊으면 뭐 하냐? 안에 들어있는 게 삼십 대 후반 아저씨인데. 너 그러고 어디 젊은 애들 가는 데 가봐라, 말투가 빼박 틀딱이라고 다 뺀지 놓지.”
“야.”
“왜?”
“농담이잖아. 왜 이렇게 화를 내고 그래.”
순간 친구의 다시 찾은 젊음이 부러워 욱한 흥식이었다. 창피했는지 귓불이 살짝 빨개진다.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화냈잖아, 방금.”
“안 냈다.”
“낸 거 맞는데. 너, 진짜 가서 갑상선 꼭 확인해 봐라.”
“야!”
“왜!”
“너 내가 밖에서는 형이라고 부르고 했지.”
“아, 넵. 형님, 식사는 맛있으셨습니까? 괜찮으시면 제가 달달한 커피 한잔 사겠습니다, 형님. 가실까요, 형님?”
둘 사이는 늘 이런 식이다.
언제나 티격태격.
이제는 정말 익숙해진 친구의 새 얼굴이었다.
“아, 맞다. 내가 차장님으로부터 미제사건을 하나 맡았거든?”
“미제사건?”
검찰에서 미제사건이란, 미해결 사건으로 주로 피의자나 참고인의 소재 불명으로 기소가 중지된 사건을 의미한다.
“응. 투자사기 사건인데 관련 서류가 말도 마라. 한 트럭이야, 트럭.”
“투자사기 사건들이 원래 그래. 내용도 복잡하고 서류도 많고. 근데, 차장검사가 너한테 직접 줬다고?”
“응.”
보통, 고소 사건이 검찰청에 접수되면 사무국 사건과에서 이를 분류하여 차장검사에게 보고하고, 차장검사는 사건 유형에 따라 해당 부서 부장검사에게 배당한다. 그러면, 부장검사는 업무 분담을 고려하여 다시 밑에 있는 검사에 사건을 맡기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검찰의 사건 배당 시스템이다.
미제사건 재배당도 비슷하다. 인사이동, 휴직, 연수 등의 이유로 이전 주임검사가 사건을 처리하지 못할 경우, 시스템상 부서 후임에게 승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차장검사가 평검사를 불러 미제사건을 던져주는 건 드문 일이었다.
“너 차장검사한테 찍혔니?”
“아니.”
“근데, 왜 너를 따로 불러서 미제사건을 줘?”
“그야 나도 모르지. 내가 좀 잘해서?”
“야, 검찰이 어떤 조직인데, 차장검사가 잘한다고 평검사를 불러서 사건을 줘. 너, 그룹 이사가 평사원을 불러서 일 주는 거 봤냐? 똑같은 거야. 실수해서 꾸짖으려고 부르는 거면 몰라도 따로 절대 안 부르지. 그것도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거면.”
“그런 거 없는데. 마주친 적도 별로 없어. 여기는 회식도 잘 안 해서 얼굴 볼 기회가 더 없더라.”
농담 반 진단 반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차장검사가 평검사에게 직접 사건 배당을 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기에 흥식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잘해, 인마.”
“잘하고 있어.”
“그 뜻이 아니고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괜히 이곳저곳 불려 다니다 가짜인 거 들통난다.”
“야, 그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아냐. 증명할 수가 없는데.”
맞는 말이다. 최악의 상황에 ‘이런 놈이 어떻게 검사가 됐지?’ 의심할 수 있을망정, ‘가짜 검사’라는 걸 증명할 수는 없으니까.
“아, 근데, 내가 왜 조마조마하냐.”
“너, 그거 갑상선 때문이라니까.”
“이게 진짜···.”
“너야 조마조마하는 게 맞지.”
“왜?”
“너 옛날부터 심장이 콩알만 해서 거짓말도 잘 못 했잖아. 너는 직업을 잘못 선택했어.”
“왜?”
“검찰에 오는 변호사들 보니까 거짓말들 잘 하두만.”
“안 그런 변호사도 많다. 그리고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왜?”
“몰라서 묻는 거냐?”
“아- 야, 나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눈 떠보니 이 모양인 걸 어떡하냐. 아무튼 됐고, 나 이제 들어가야 하는데, 기소중지 미제사건을 해결하려면 뭐부터 해야 하냐?”
“뭘 뭐부터 해. 피의자부터 찾아야지.”
—*—
서울중앙지검, 425호실.
오후 6시가 거의 다 되어가는 시각.
“계장님,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성낙현 씨 투자사기 사건 기록 좀 가져다주시고 퇴근하셔도 돼요.”
한 달에 평균 100~200건을 배당받는 검사가 하루에 처리해야 하는 사건 수는 토, 일요일을 모두 근무한다고 해도 적게는 서너 건에서, 많게는 일고여덟 건이다.
아홉 시 출근해서 피의자·참고인 조사, 대질신문 등 하루종일을 사건 수사에 소비하고 나면, 그제야 밀린 공소장을 쓴다던지 새로 배당받은 사건 파일을 검토할 짬이 생긴다.
검사 출신 변호사 친구가 공소장 작성을 도와주고 귀신같은 능력으로 피의자 자백을 받아내도 야근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일과를 끝낸 주연은 공인철 수사관에게 부탁했다.
“그 깡치사건이요?”
‘깡치’란 ‘찌꺼기’를 의미하는 북한말로 검찰에서 ‘깡치사건’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사안이 복잡해서 품은 많이 드는 반면 해결해도 누가 알아주지 않는 사건들을 말한다.
짬밥도 많고 지검 내에 발이 넓은 공인철 수사관은 해당 사건이 주연에게 배당되었다는 것을 듣고 형사1부의 이전 주임검사실에 슬쩍 물어본 모양이었다.
“깡치사건이요?”
짬이 고작 삼 개월 남짓한 주연은 ‘깡치’라는 은어를 처음 들었다. 그래서 반문했을 뿐인데, 인철은 해당 사건이 왜 까다로운 사건인지를 설명했다.
“이 사건 피의자가 나이 칠순 넘은 할아버지인데, 지난 이십 년 동안 사기로 고소당한 건수만 오십 개가 넘는다더라고요. 중앙에만 오십 건이고 다른 지검에도 몇십 건 있었다고 하니까, 사기꾼 중에서도 아주 급이 다른 놈이죠.”
“오십 건이요?”
“네. 보통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다고 멋모르는 투자자들 꾀어서 돈 뜯어내고는 입 싹 씻는 수법인데, 수완이 어찌나 좋은지 피해자들이 고소했다가도 나중에는 포기하거나 결국 합의로 끝내서 한 번도 기소된 적이 없다고 하네요.”
“네? 한 번도요?”
사기란,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는 범죄행위다.
법전에 쓰인 건 단 한 줄의 정의이지만, 사기죄가 성립되려면 몇 가지 구성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기망행위, 즉 속이는 행위가 있어야 하고, 피고의 기망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착오에 빠진 상태에서 재산의 처분을 결정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며,
행위 시점 기준으로 피고에게 고의와 불법영득의사, 즉 타인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갚을 능력도, 의사도 없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백만 원을 빌려 갚지 않았을 경우에 그가 말재주가 좋은 거짓말쟁이라면, 사기죄를 증명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사기 중에서 투자사기는 훨씬 더 증명하기가 어렵다.
말 그대로 투자란 손해를 입을 수 있는 위험부담을 알고 하는 것이기에 ‘투자’라는 말이 앞에 붙으면, ‘너도 알고 돈을 준 거 아니야?’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이십 년 동안 수십 건에 달하는 고소를 모조리 다 피해갔다는 말이 주연의 관심을 끌었다.
“네. 세상에 그런 놈들 생각보다 많아요, 검사님.”
“많다고요?”
“네. 기록을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투자금에 년 2~30%씩 수익이 나는 사업이라고 꼬셔서 처음에는 그렇게 주다가 피해자가 걸렸다 싶으면 투자금을 확 늘려서 땡긴 다음에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안 돌려줬을 거예요.”
성낙현 투자사기의 실제 구조는 훨씬 더 복잡하고 그 안의 플레이어들은 최동훈 감독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다이내믹했지만, 대충 골조는 비슷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기소가 안 되었던 거죠?”
“서류는 바지사장 명의로 다 처리하고 이렇게 문제 생기면 바지사장을 해외로 빼돌려서 그렇죠, 뭐. 운 좋아서 바지사장을 잡혀도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시간 끌다가 돈 잃은 피해자들 목말라 죽을 때쯤 해서 원금의 5~10% 되는 금액에 합의하고 고소 취하하게 하는 거죠.”
이런 사기에 걸려드는 사람은 돈이 많은 부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