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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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문
란더베르트는 기사다. 하지만 이름만 대면 알만한 라야의 십대기사 같은 대단한 기사는커녕, 서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풋내기 기사다. 그나마도 섬기고 있는 귀족의 기사단 정원이 부족해서 임시로 부족한 자리를 메우기 위해 급히 서임된, 흔히 말하는 대리 기사다. 좀 더 속되게 말하면 땜빵 기사라고도 한다.
하지만 대리든 땜빵이든 간에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니면서 이십대가 되기도 전에 기사에 서임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어쨌든 그 빈자리를 메울 실력은 있다는 소리니까. 그래서 란더베르트는 이번 토너먼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대리라든가 땜빵 같은 수식어를 떼어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선배 기사들과 대련이나 시합을 할 때만 해도 자신감이 넘쳤던 그였지만, 막상 수도에 올라와서 다른 기사단에 속한 자들의 훈련 모습을 보고, 실제로 그들과 교류하며 연습 시합 같은 것을 치러보게 되자 란더베르트의 자신감은 급속하게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아직 세상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그렇게 위축되니 모처럼의 휴식 시간이 주어져도 감히 다른 기사들처럼 수도를 돌아본다든가, 예쁜 도시 아가씨들을 꼬신다는가 하는 식의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밖에 나갔다가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촌뜨기라는 소리까지 들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날 점심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완전한 기사가 되지도 못한 상태라 따라 종자나 하인을 들이지도 못한 란더베르트는 어쩔 수 없이 숙영지에서 제공되는 맛없는 군대 식사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는데, 그 날 따라 요리사가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식사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자격지심에 일단 부모님이 챙겨준 정장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가능하면 기사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끼니만 해결하고 바로 막사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는 순간 어디선가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져 왔다. 이게 뭔가 하고 바라보니 다리 옆의 노점에서 풍겨져 나오는 냄새였다.
달짝지근하면서 푸근한, 정말 뭐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의 냄새에 란더베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차피 끼니만 해결하면 되는데 굳이 시내까지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하고.
“우, 추워라… 응?”
방수포를 젖히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웬 등짐장수 하나가 황홀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생긴 건 우락부락하게 생겨가지고 마치 첫사랑과 키스를 나눈 직후 같은 얼굴로 볼을 발그레하니 붉히고 있는 그 모습이라니. 보는 순간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혹시 뭔가 엉뚱한 가게에 들어온 건 아닌가 싶은 느낌에 멈칫하는데, 문득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인사를 하며 자신에게 작은 그릇 하나를 내민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 참 춥지요?”
“네, 뭐…”
고작해야 실파를 조금 뿌린 것 뿐인 국물 약간이다. 하지만 그것이 눈앞에 놓여진 순간 란더베르트는 모든 감각이 그 작은 그릇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도대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손을 뻗어 그릇을 감쌌다. 그러자 따뜻한 국물의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전해진다. 그 냄새와 온기만으로도, 어쩐지 란더베르트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그릇을 들어 국물을 마셨다.
“아!”
순간 움츠러들어 있던 란더베르트의 심장이 활화산처럼 격렬하게 맥동하기 시작한다. 수도에 도착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제대로 펴지지 않았던 그의 어깨가 확 펴지며 전신에 활기가 가득 차기 시작한다.
도대체, 도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혹시 기사들이 전투시 사용한다는 비약 같은 건가. 아니다. 비약과는 다르다. 비약이라면 이 맛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노점에서 파는 음식에 비약이라니, 그런 식으로 음식을 만들었다가는 재료비도 건지지 못한다.
“메뉴는 옆의 분이 드시고 계신 가락국수 하나 뿐입니다. 한 그릇 드릴까요?”
방금 전까지 헤벌레한 표정으로 감격에 젖어 있던 등짐장수는 마치 졸린 닭이 물을 마시는 것처럼 한 입 먹고 멍 때리는 모습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란더베르트는 등짐장수가 왜 저러고 있는지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주, 주십시오.”
란더베르트는 그날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고작 노점에서 파는 주화 세 닢짜리 국수 한 그릇을 먹고 광활한 우주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리라고 과연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놀라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홀린 듯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란더베르트는 그날 오후 훈련에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제법이군. 어쩌나 싶었는데, 그 정도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가, 감사합니다!”
란더베르트는 생각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노점에서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을 때 느꼈던 강렬한 느낌이 자신의 잠재되어 있던 힘을 일깨웠던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놀라운 실력의 요리사가 혼신의 힘을 다한 요리에는 먹는 이의 숨은 힘을 이끌어내는 경이로운 효과가 있다고.
과연 수도. 기껏해야 다리 옆의 노점에서 파는 국수가 이런 놀라운 기적을 보여줄 수도 있다니.
다음 날이 되었을 때, 란더베르트는 서둘러 점심을 먹기 위해 숙영지를 벗어나려다가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수련장에서 돌아오는 동료의 모습을 발견했다.
기사는 냉엄한 경쟁 사회다. 기사로 서임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력이 부족하면 그 자리는 곧바로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신예들에 의해 채워지고 자신은 밀려나 버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래대로라면 그냥 모른 척 지나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모태신앙으로 희망과 생명의 여신을 섬기고 있는 란더베르트는 이 순간 축 처진 동료의 어깨를 보며 호구신의 교리를 떠올리고 말았다.
“이봐, 젠크”
“응?”
“점심 먹으러 같이 안 갈래? 내가 좋은 곳을 아는데.”
“됐어. 별로 생각도 없고. 대낮부터 무슨.”
좋은 곳이라는 말에 흔히 남자들이 일컫는 좋은 곳을 떠올린 젠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란더베르트는 얼른 다가가 그의 팔짱을 끼고는 억지로 잡아끌었다.
“잔말 말고 따라와.”
“자, 잠깐. 괜찮다니까.”
그렇게 반항했지만 강압에 가까운 란더베르트의 행동에 젠크는 결국 수련복 차림 그대로 다리 옆의 노점으로 끌려와야만 했다.
“저기다.”
“저기? 노점?”
“그래.”
“저기야? 좋은 곳이라는 데가.”
“그래. 속는 셈치고 따라와 봐. 넌 아마 나에게 감사하게 될 거다.”
“…”
혹시 노점 주인이 끝내주게 예쁜 미인이라거나 육감적인 미망인이라거나 한 건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던 젠크는 노점과 가까워지면서 느껴지기 시작한 감칠 맛 나는 음식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고 말았다.
“냄새만으로도 끝내주지?”
“그, 그러네.”
방수포를 걷어 젖히자, 어제 보았던 그 등짐장수가 이번에도 헤벌레한 표정을 지은 채 멍 때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어제와 다른 점도 분명히 있었다. 등짐장수 외에는 달리 손님이 없었던 어제와는 달리, 어느새 자리가 꽉꽉 들어차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자리가 꽉 차서.”
젠크의 예상과는 달리 가게의 주인은 여자가 아니라 호감 넘치는 인상의,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외모의 젊은 사내였다.
자리가 없는 걸 보고 기다리든가 다른 가게를 찾든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젠크는 란더베르트가 곧바로 내놓은 대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밖에서 서서 먹어도 괜찮습니다. 제발 주문을 받아주십시오.”
“엥?”
둘 다 땜빵 기사에 불과하지만 서류상으로는 분명히 제대로 서임 받은 정식 기사다. 그런 자신들이 길거리 노점에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먹어야 하다니. 도대체 이 녀석 제정신인건가!
젠크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노점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혹시 다 먹고도 따뜻한 노점 안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버팅기고 있는 사람이 없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젠크의 눈에 들어온 것은 감격에 겨워 몸을 바르르 떨고 있거나, 등짐장수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게다가 그 구성원도 기이하다. 등짐장수처럼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은 물론이고, 란더베르트 못지않게 차려 입은 중년 신사부터 시작해서, 파티에나 가지 왜 이런 노점에 앉아 있나 싶은 기품있는 느낌의 귀부인과 아름다운 아가씨까지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모여 앉아서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경건하게 섭취하고 있었다.
뭐냐. 이거. 도대체 이 노점, 뭐냔 말이다!
“그건 제가 너무 죄송스러운데…”
노점 주인의 말에 란더베르트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죄송스럽기는요. 괜찮습니다. 잠시 기다리는 것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럼… 잠시만요.”
노점 주인은 작은 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물을 담고 실파 썬 것과 고춧가루를 살짝 푸리더니, 거기에 꼬치 하나를 얹어서 내밀었다.
“추운데 기다리시는 동안 이거라도 드십시오. 서비스입니다.”
“아,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애초에 주화 몇 개 벌려고 나온 장사가 아니다. 주화 따위 인벤토리에 만 단위가 넘게 담겨 있다. 이건 일종의 연습이고, 명장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수련이기도 하다. 애초에 돈을 벌기로 생각하고 나섰으면 이런 노점이 아니라 제랄딘이 제안한 그럴 듯한 음식점을 차렸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란더베르트는 감격했다. 아직 냄새만 맡았지 제대로 맛을 보지 못한 젠크가 이 녀석이 고작 해야 길거리 노점 주인 따위에게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나 싶은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일단 주는 것을 받아들고 노점 밖으로 나왔다.
“너 외상이라도 졌냐? 왜 그래?”
슬쩍 묻는 젠크의 말에 란더베르트는 마치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기 전의 모습처럼 가만히 심호흡을 하고는 젠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단 먹어봐. 먹어 보면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
그렇게 말한 란더베르트는 젠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일단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후아아아아…”
바로 이거다. 내 몸은 이 맛을 원하고 있었다. 란더베르트는 안타까움마저 섞인 탄식을 터뜨리며 전율했다.
“…”
반면 젠크는 그런 란더베르트의 모습을 보고는 왜 저러나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그릇 안에서 풍겨오는 냄새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후아아아아…”
그리고는 방금 전 란더베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절절한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을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혀가 녹는다는 것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표현일가. 국물을 입에 머금는 순간, 마치 매마른 땅이 물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몸 자체가 스스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그런 맛, 아니 거부라는 단어 자체를 연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그런 맛이다.
단순히 맛만 좋은 것이 아니다. 먹는 순간 싸늘하게 느껴지던 주위의 차가운 공기 자체를 잊게 만드는 기이한 효과마저 갖추고 있었다.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절로 펴지고,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 마음껏 무기를 휘두르고 싶은 그런 기이한 힘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길래.
“도, 도대체 이건…”
떨리는 목소리로 란더베르트에게 물었지만, 이미 그는 꼬치에 꿰어진 잘 익은 무를 한 입 배어 물고 있었다. 깨무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는, 국물이 한껏 배어들어가 있는 무의 식감이 다시 한 번 란더베르트의 몸과 정신을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즐거움으로 인도한다. 아삭한 대파의 식감으로 일깨우고, 부드럽고 쫄깃한 어묵에 이르러 다시 한번 폭발하는 그 맛을 과연 무엇이라 일컬어야 한단 말인가!
이미 물어도 소용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젠크는 슬그머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국물과 꼬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란더베르트가 어제 그러했듯이, 젠크 역시 맛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계에 눈 뜨고 말았다.
“너희들 어떻게 된 거야? 란더베르트는 그렇다 쳐도 젠크까지 이렇게 돌변하다니. 설마 우리 모르게 비약이라도 퍼먹는 거냐?”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의 고참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전까지만 해도 빌빌거리던 젠크가 오후 들어 갑자기 미쳐 날뛰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이다.
“크흠… 그게, 실은…”
란더베르트와 젠크는 결국 고참들의 압박에 못 이겨 자신들이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말도 안 돼! 그 정도의 실력을 지닌 요리사가 고작 노점을 하고 있다고? 그게 말이 돼?”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어제 오늘 저희들의 모습을 보셨으면 아실텐데요.”
“…”
고참 기사들은 그곳이 어디냐고 앞장서라고 했지만 란더베르트는 다시 말했다.
“저도 혹시나 해서 다시 저녁 때 나가 봤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물어보니까 점심때만 잠깐 하다 만다고 하더군요.”
“그런!”
결국 란더베르트는 고참 기사들의 등쌀에 못 이겨 다음날 점심에 그들을 안내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헉!”
하지만 하루 만에 노점 주위의 풍경은 또다시 바뀌어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선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쩌죠?”
“그게…”
새치기 같은 것은 꿈도 못 꾼다. 딱 봐도 제법 잘 나가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기사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사람들도 얌전하게 줄을 선 채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새치기를 했다가 무슨 꼴이 나려고.
“거짓말이 아니었나본데.”
“좀 더 일찍 나올 걸 그랬나.”
결국 란더베르트와 그의 기사단 동료들은 찍 소리도 못하고 줄을 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