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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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문
막상 줄을 서긴 했는데, 이렇게 되자 걱정이 앞선다.
“아까 점심때만 잠깐 하고 끝낸다고 그러지 않았나?”
“그랬지.”
“그럼 자칫하다가는 맛도 못 보고 그냥 돌아가야 할 수도 있겠는데.”
“어, 진짜 그러네.”
날씨도 쌀쌀한 마당에 바람 솔솔 불어오는 강변에서 줄을 서는 것도 고역이다. 게다가 대부분은 어제 오늘 형진의 노점에 들렸던 사람들이 데리고 나온 사람들. 이미 한 번 그 맛을 본 사람들이라면 기다림 뒤에 찾아올 극락의 순간을 반추하며 기다릴 수라도 있지, 그렇지도 않은 사람들은 내가 왜 여기서 노점 음식 따윌 먹어보겠다고 덜덜 떨며 기다려야 하나 싶은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결국 안 되겠다 싶었던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뜨려하던 그 때,
푸르르르.
말의 투레질 소리와 함께 화려한 마차 한 대를 선두로, 짐을 실은 마차 몇 대가 다리 앞에 멈춰 선다. 저게 뭔가 싶어 바라보던 사람들은 화려한 마차에서 머리에 동물의 귀가 솟아난 작고 귀여운 수인 아가씨를 선두로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우르르 내리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엘님?”
“손이 부족하실 것 같아서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괜찮죠?”
형진은 미엘이 데리고 온 시녀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긴 하다. 자신도 가보겠다며 나서는 제랄딘을 뜯어말리는 미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사실 이 정도 인원은 유아와 림만 데려왔어도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다. 그러나 둘은 사정으로 인해 적어도 수도에서는 직접 나서서 형진을 돕기가 어려운 상황. 요리야 그렇다쳐도 접객까지는 감당할 여력이 안 되던 형진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나서서 도와주겠다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여러분들께 폐를 끼쳐서 죄송하군요.”
그러자 미엘을 따라온 시녀들은 하나같이 고개와 손을 붕붕 휘저으며 대답한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저렇게 일제히 같은 동작을 칼군무 추듯이 취하는 모습을 볼 때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마저 든다.
“폐라니요. 저희가 하고 싶어서 자청한 일인 걸요. 도와드릴 수 있어서 저희가 오히려 영광이죠.”
“이거 참, 쑥스럽군요.”
미엘이나 시녀들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형진의 손은 미친듯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메뉴까지 하나 더 늘어난 덕분에 손이 더 바쁠 수밖에 없다.
“저희들이 뭘 도와드리면 좋을까요?”
미엘의 말에 형진은 옆에서 은근하게 끓고 있는 솥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안에 들어오신 분들은 제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계신 분들입니다. 따뜻한 국물이라도 조금씩 나누어 드리세요.”
“실은 천막을 조금 챙겨 왔습니다. 노점 옆에 세워 놓고 그곳에서도 먹을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요.”
“아,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역시 미엘님이십니다.”
“별 말씀을요.”
곧바로 미엘이 데려온 일꾼들이 뚝딱거리며 노점 옆 강변에 천막 두 채를 세웠다. 그리고 뒤이어 쟁반을 받쳐든 시녀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국물을 돌리며 새로 세워진 천막으로 유도한다.
“어떻게 된 거지?”
“글쎄. 원래 가게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가?”
“그럴지도. 하지만 저 정도 인원을 동원할 정도면 상당히 큰 가게를 가지고 있을 텐데, 왜 굳이 이런 강변에서 노점을 하는 거지?”
“내가 보기엔 귀족가의 사람인 것 같다. 저 아가씨들, 몸에 배인 동작을 봐. 귀족가 시녀들이 틀림없어.”
“그러고 보니 타고 온 마차도 굉장히 화려했지?”
그렇게 사람들이 수근대는데, 문득 조용히 줄 서있던 귀족 아가씨 하나가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치며 말했다.
“아! 누군가 싶었더니, 제랄딘님의 시녀분 아니신가요?”
바로 미엘을 보고 한 말이다. 어지간해서는 귀족들의 사교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그녀지만, 제랄딘의 본가에서 연 모임에서는 몇 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고, 미엘의 모습은 한 번 보면 쉽게 잊혀지기 힘든 특색 있는 외모이기도 하다.
“먼저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르드노르 영애.”
“역시!”
제랄딘의 이름이 나오자 줄을 서있던 귀족들은 대번에 그게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사람은 얼마 안 되지만, 적어도 이 나라 최고 명문가의 금지옥엽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설마 이 노점의 주인이 브라드로슈 가문의 사람인가요?”
아르드노르 영애가 묻자, 미엘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제랄딘님께서 이번 토너먼트를 위해 특별히 초빙해서 저희 본가의 별채에 머무르고 계신 분이시죠.”
“아…”
아닌 척 하면서 실제로는 숨죽인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귀족들은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성을 터뜨린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줄을 서고 있던 귀족들 대부분이 형진을 자신의 가문으로 끌어들일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이야 말로 기필코 라며 주먹을 불끈 쥐고 찾아온 사람들도 있고, 이렇게 추운 날씨에 줄을 서야 하는 상황이 마땅치 않아 차라리 자신의 집에 데려다 놓고 마음껏 요리를 즐기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미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 안타까운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그 제랄딘이 일부러 초빙해서 별채까지 내준 사람을 중간에 가로채는 건 적어도 황족 클래스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고, 그나마도 다른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많은 양보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이런.”
“스카웃은 물 건너갔군.”
란더베르트를 앞세워 찾아온 고참 기사들 역시 혀를 찼다. 사실 그들은 요리 그 자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는, 란더베르트와 젠크의 실력을 그 정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요리사라면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스카웃할 생각으로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상대가 브라드로슈 가문이어서야 명함도 내밀어 보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당했다.
눈부신 속도로 요리를 만들어 가고 있던 형진 역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제랄딘이 시녀를 보낸 건 단순히 일손을 돕는다는 식의 의미만을 지닌 행동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미리 침 발라 놓은 인물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인지시키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제는 별로 그런 사람이 없었지만, 어제 오늘은 특히 여러 가문 등에서 스카웃 제의를 하는 통에 그것을 거절하느라 골치가 아팠다.
미엘 덕분에 그런 골치 아픈 일은 사라지겠지만, 아무래도 이곳에서 더 이상 장사를 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모르긴 해도 수도의 사교계에 오늘의 일이 퍼져 나가는 데는 채 몇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 오늘은 어떻게 버틴다 해도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단 3일 만에 이런 상황까지 치달았으니, 4일 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과연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시녀들이 접객을 도와준 덕분에 장사는 어떻게든 끝마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난처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 왔을 때처럼 터덜터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랄딘이 보내준 마차에 포장마차와 당스바겐을 연결하고 시녀들이 타고온 마차에 동승했는데, 밀폐된 공간에 아리따운 아가씨들과 동승하자 그녀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형진에게 마구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녀들이 보기에 형진은 참으로 군침 도는 먹이가 아닐 수 없다. 그가 만들어내는 요리가 먹음직스러운 거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이런 놀라운 실력을 지닌 요리사라면 그녀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랄딘 같은 최고 귀족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실력의 요리사라니, 어떤 평민이 그런 호사스러운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물론 형진 옆에는 유아라는 이름의 아리따운 메이드가 붙어 있다. 그냥 메이드도 아니고 무려 사제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료의 능력과 얼굴 전체가 화사하게 빛나는 듯한 후광의 효과까지 생각하면 암담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남녀 관계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무리 뛰어난 골키퍼가 있어도 위치 선정만 잘하면 어떻게든 어거지로 골 한 번 정도는 넣을 수도 있는 법이다.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있고, 실질적으로 가능할지 의문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렇게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면 가슴이 뛰고 욕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형진은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남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애타는 눈길만 보낼 뿐 형진에게 직접적으로 의사를 전달한다든가 유혹을 해본다든가 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바로 형진의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미엘의 존재 때문이다.
미엘은 단순한 시녀가 아니다. 스스로가 놀라운 실력을 지닌 마법사이기도 하며, 외모는 어려 보여도 나이 또한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어릴 때부터 제랄딘을 실질적으로 키워낸 인물이기도 하고, 현재는 가문 내의 어르신들도 거의 제랄딘의 의자매 정도로 대우하고 있을 정도의 인물이다. 괜히 아까 아르드노르 가문의 영애가 함부로 말을 낮추지 못한 게 아니다. 다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가 옆에서 딱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간 큰 시녀라도 함부로 형진에게 대시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거… 좀 무섭군요.”
맹수와 같은 우리에 들어가 앉게 된 어린 양의 심정이 이럴까. 자신을 바라보며 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는 맹수 같은 시녀들의 모습도 무섭고, 그런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키고 앉아 있는 미엘도 무섭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통.”
“…”
미엘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렇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미엘로서는 이 남자가 시녀들로 인해 곤란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노점의 일을 돕기 위해 나서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추우니 이거라도 들어보라며 내민 국물 때문에 그녀는 질겁을 하고 말았다. 아니, 실파 조금 뿌린 국물 따위가 특제요리면 도대체 어쩌자는 건가. 자칫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본신을 드러낼 뻔했다는 사실 때문에 미엘은 살짝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나는 거고, 앙큼한 계집애들이 형진을 노리는 걸 가만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요즘 따라 확연하게 기색이 달라진 유아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이전에는 형진에게 연심이라기보다는 호감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던 유아가, 며칠 사이 확연하게 바뀌어 버린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엘만큼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문제의 소지가 있는 일을 만들어서 유아의 마음을 아프게 할 필요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시녀들만 보내도 되는데 굳이 미엘이 참여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3일째의 영업은 그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4일째가 되었을 때, 형진은 더 이상 다리 옆의 자리에 노점을 열지 않았다. 뒤늦게 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은 사람들은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형진의 모습으로 인해 더 강렬한 궁금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이미 한 번 이상 그의 음식을 맛본 사람들은 그 기억을 반추하며 환상을 키워갔다.
평민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귀족들은 결국 궁금함을 견디지 못하고 별채의 손님에 대해 제랄딘과 브라드로슈 가문에 문의를 넣기 시작했다. 연회까지는 아니어도 상관없다. 간단한 오찬이나 티타임 정도라도 상관없으니 별채 손님의 실력을 보여줄 수 없겠느냐고.
“소문이 계속 퍼지고 있어요. 이미 황실까지 얘기가 들어갔다는 말도 있고.”
일단 한번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제랄딘과 미엘이 가져온 소문의 내용을 들은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무안단물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정도다.
결국 형진은 쓴웃음을 지은 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제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