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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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탁
그 날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형진은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총괄 지부장을 찾아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다른 신의 사제와 관련된 문제라 사실 좀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진님께서 아끼시는 사람의 문제라면 저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겠지요.”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번거롭기는요. 제가 하는 일이 본래 그러한 것인데요. 허허.”
상사의 괴롭힘이 좀 덜한 탓인지 탁스 두겐의 모습이 확실히 여유로워 보인다. 그래봐야 얼마나 가겠나 싶긴 하지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바로요?”
“제가 좀 일처리가 빠른 편이지요. 덕분에 지부장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
대장장이 길드의 상사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지켜보고 있는데, 탁스 두겐은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눈꺼풀 아래로 눈알이 급히 움직이는 모습이 조금 괴기스럽다.
“답이 왔습니다.”
“벌써요?”
“공포와 죽음께서 반응이 좀 빠르신 편이지요. 다른 신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
탁스 두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설마 공포와 죽음께서도 이런 사람인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이 떠오른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공포와 죽음께서는, 그 사제에게서 일어난 현상은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 다른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후 그리칸에 있는 호구신의 신전에 거하는 자들 모두에게 그것을 가르쳐 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내려줄 수 있는 최선의 답이며, 또한 서로를 위한 최고의 상이라고 하시는 군요.”
“최선의 답이며 또한 최고의 상이라…”
뭔가 의미심장한 답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결국 신탁인 셈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역시 다른 신의 영역은 공포와 죽음께서도 함부로 손을 대기 어렵구나 하는 생각 또한 떠오른다.
“친절한 도움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요.”
“변변치는 않습니다만, 있다가 점심 때 드시라고 도시락을 좀 가져왔습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탁스 두겐에게 가공 관련 버프를 모아놓은 도시락을 건넨 형진은 별채로 돌아오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칸의 신전에 거하는 자들 모두라면, 신전의 사제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돌보는 아이들까지 모두 포함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 정도 인원에게서 유아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면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얘기가 아닐까.
살짝 걱정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으나 공포와 죽음께서 최선의 답이며 또한 서로를 위한 최고의 상이라는 표현을 쓰셨으니 믿어볼 수밖에. 지금까지 보여주신 모습을 보더라도 최소한 상이라는 말이 낚시일 가능성은 없어 보이니까.
“어?”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형진은 자신이 어느새 공포와 죽음의 말이라면 철석 같이 믿고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버렸다. 분명히 처음 이 세계에 올 당시만 해도 반강제로 성도가 된 것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다른 이들에 못지않을 정도로 신실한 성도가 되어 버린 것이다.
“크흠. 이거 꽤… 무섭군.”
형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양 볼을 탁탁 두드렸다. 분명히 공포와 죽음은 다른 신에 비해 좋은 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식의 맹목적인 신뢰는 어떠한 경우에도 좋은 결과로 돌아오지 않는다. 적어도 그건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된 일이다. 물론 신을 인간의 잣대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면 딱히 반박할 논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집으로 돌아오자 나가기 전에 미리 지시했던 대로 유아와 림이 장사 준비를 마쳐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같이 가서 살짝 도와드리면 안 되나요?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살짝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됐어. 괜히 문제의 소지를 만들 필요는 없는 일이지. 아쉽더라도 참아.”
-네…
아쉬운지 입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리는 림에게서 유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유아는 형진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당황하며 얼른 눈을 내리 깔았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조신하기 이를 데 없는 메이드 같다. 포옹을 해줬더니 새색시 기분이라도 내는 건가. 그래봐야 얼마나 가겠나 싶긴 하지만.
“별 일은 없을 거다. 요즘 계속 바빠서 카트린을 별로 돌봐주지 못했으니까 둘이서 좀 신경을 쓰는 것도 좋겠지.”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다녀오마. 가자, 당스바겐.”
낙인이 새겨져 있지 않은 손으로 뒤통수를 툭툭 두드리며 그렇게 명령을 내리자 당스바겐 녀석은 움찔하며 천천히 수레를 끌기 시작한다. 그러자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포장마차 수레가 움직인다.
중앙대로와 강변에 노점을 낼 수 있는 허가증을 받긴 했지만, 형진은 딱히 무조건 손님을 많이 받겠다 하는 식의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괜히 너무 많은 손님이 몰리면 오히려 귀찮을 수도 있고, 제 시간에 장사를 끝내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그저 적당히 손님을 접대하는 경험을 쌓는 정도로만 만족할 생각이라고나 할까. 과연 그게 가능할지는 스스로도 장담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슬슬 당나귀를 끌고 도심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지나간다. 전야제가 취소되었다고는 해도 이 나라에서 가장 큰 행사라서 그런지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도심은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서울 도심까지는 아니어도 지방 중소 도시의 번화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판석으로 포장된 도로를 좀 걷던 형진은 역시 도심은 너무 번잡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바로 방향을 틀어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에는 물을 긷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룻터에서는 배에서 짐을 내리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며, 한 켠에는 낚시꾼들이 낚시를 드리운 채 시간을 죽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언덕에는 데이트라도 나온 것인지 자리를 깔고 햇볕을 쬐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화가라면 한 번쯤 화폭에 담아보고 싶은 그런 모습이다.
형진은 둑길 위를 잠시 지나다가, 다리 근처의 가로수 근처에서 수레를 멈추었다. 너무 한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 그러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나는 그런 장소다.
수레를 멈춰 세운 형진은 일단 당스바겐 녀석을 가로수에 묶어 놓은 다음, 수레의 고정 장치를 내려 지면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위에서 칼춤을 춰도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는 작업이 끝나자, 비로소 고정해 뒀던 여러 가지 설비들을 풀어서 장사 준비를 시작했다.
곧바로 화로에 담겨져 있던 불씨에 숯을 담아 불을 일으킨다. 마침내 숯이 밝게 타오르기 시작하자 곧바로 한쪽 화로에 솥을 걸고 물을 부어 넣는다.
“어디 보자.”
적당한 크기의 삼베 주머니를 꺼낸 형진은, 거기에 말린 생선 머리와 말린 멸치, 무 한 토막, 다시마, 파뿌리, 양파, 그리고 매운 고추를 넣고 내용물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잘 봉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시 주머니를 솥 안에 넣고 푹 끓이면 준비 끝. 마지막으로 예쁘게 별 모양 칼자국을 낸 표고버섯을 한줌 쏟아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다음은… 고명인가.”
메뉴는 단품이지만 여러 가지 고명을 얹어서 다양성을 주는 방식으로 준비했다. 우선 메이드들이 미리 만들어둔 삶은 계란을 바구니에 담아 한쪽에 진열한다. 그 다음은 당근. 잘게 채를 썰어 팬에 기름을 두르고 살짝 볶아서 역시 뚜껑이 있는 그릇에 담아 한쪽에 놓는다. 마찬가지로 호박도 반달 모양으로 썰어서 볶아 놓고, 실파를 잘게 썰어서 그 옆 그릇에 담아 놓는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삼색 고명이 준비된 셈이지만, 어차피 팬을 쓰는 김에 형진은 지단까지 만들어 또 한 자리를 채운다.
유부나 튀김 같은 것도 있으면 좋겠지만, 유부는 손이 너무 가고 튀김은 화덕이 둘 뿐이라 준비하기가 애매하다. 대신 어묵 정도라면 미리 만들어서 가져 온 다음 육수에 담가 뒀다가 사이드 메뉴로 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내일도 우동을 판다는 전제 하에서의 얘기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솥에서 그럴 듯한 냄새가 퍼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럴 듯하게 우러나온 국물에 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으로 장사 준비가 모두 끝났다.
“그럼 시작해 볼까.”
형진은 지붕 모서리에 영업중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등을 달았다. 밤이 아니라서 분위기가 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간판 역할은 충분히 할 것이다.
등을 걸고 다시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다리를 지나던 남자 하나가 슬쩍 말을 걸어온다.
“저, 실례지만 식사 됩니까?”
아마도 토너먼트 대목을 노리고 상경한 등짐장수인지 큼직한 짐을 맨 채 헉헉 대고 있다. 얼굴은 좀 험상궂지만 말투도 행동도 순박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남자다.
형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들어오시죠.”“아, 감사합니다.”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개시인가. 나쁘지 않다.
등짐장수는 방수포 안으로 들어오자 확 하고 퍼져 나오는 따뜻한 기운과 달큰한 육수 냄새에 잠시 넋이 나갔다.
“편한 자리로 앉으십시오.”
“네.”
주춤거리며 짐을 내려놓고 포장마차 안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는 등짐장수에게 형진은 우선 작은 그릇에 육수를 담고 실파와 고춧가루를 약간 뿌려 내밀었다.
“날이 많이 춥지요. 일단 이것부터 드십시오.”
“네? 아직 주문도 안했는데.”
“서비스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서비스라는 말에 등짐장수는 얼른 형진이 내민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크아아…”
한 모금 들이키는 순간 쌀쌀한 날씨로 인해 차갑게 식었던 몸에 순식간에 따뜻한 기운이 확 하고 퍼져 나가는 그 느낌이라니! 등짐장수는 그 황홀한 기분에 몸을 떨며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뒤늦게서야 정신을 화들짝 차렸다.
“어떻습니까.”
“마, 맛있습니다. 정말, 정말로 대단하군요.”
“그렇습니까.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군요. 식사를 원하신다고 하셨지요?”
“아, 예.”
“죄송하지만 저희는 메뉴가 하나 뿐입니다. 가락국수라고 하는 면의 일종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뭐…”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지요.”
형진은 주문을 받자 바로 냄비에 물을 담에 비어 있는 화덕에 올린 다음 밀가루 반죽을 한 덩이 꺼냈다. 보통의 면 만드는 반죽보다 훨씬 물기가 적고 탄탄한 느낌의 그런 반죽이다.
곧바로 밀가루를 적당히 뿌린 도마 위에서 밀대로 힘주어 밀기 시작하자, 두툼한 반죽이 순시간에 얇게 펴진다. 사실 이런 식으로 반죽에서 우동 면을 뽑아내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충분한 힘 수련과 요리 스킬 덕분에 형진은 어렵지 않게 그 과정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대로 넓게 편 반죽을 몇 번 접어서 칼로 썰면 바로 그것이 바로 우동 면이다. 칼국수와 만드는 방법은 비슷하지만, 우동면은 가수율이 적어서 만들기가 그만큼 힘들다.
면이 만들어지자 형진은 면을 만드는 동안 끓기 시작한 냄비 안에 그것을 넣고 삶았다.
사실 면을 즉석에서 만들 것인지 미리 만들어서 가지고 갈 것인지에 대해서 형진은 상당히 고민을 해야만 했다.
편리하기로 따지면 면을 만들어 가는 편이 낫지만, 직접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 아니겠는가. 형진이 가진 요리사로서의 강점 중 하나가 바로 보는 이의 시선을 빼앗는 현란한 요리 과정이다. 그냥 만들어진 면에 국물만 바로 부어서 내놓으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만큼 성의가 없어 보이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직접 면을 뽑고 그것을 삶아서 내놓으려면 물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아무리 점심시간에 한정해서 장사를 한다 치더라도 면을 삶고 그것을 씻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물의 양이 만만치 않다는 건 분명한 문제점이다.
하지만 형진에게는 인벤토리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수차례 거듭된 보상을 통해 무게도 상당히 늘어난 상황이라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물론 손님들이 눈치 채지 못하고 물통을 꺼내는 과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수레 아래로 몸을 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손님의 눈을 속일 수 있다.
예상대로 등짐장수는 눈앞에서 바로 면을 뽑아내는 형진의 현란한 기술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죽을 밀어대고 그것을 칼로 썰어 면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하나 하나가 정말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고 물 흐르듯 이어지니, 그냥 저냥 노점에서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우려 했던 등짐 장수로서는 당황스러울 정도다.
형진은 그런 등짐장수의 시선을 즐기며 삶아진 면을 물로 씻어낸 뒤, 그릇에 담고 잘 우러난 국물을 부었다. 그리고 삶은 계란 반쪽과 쑥갓, 실파와 육수 안에 둥둥 떠다니던 별 모양으로 칼집을 낸 표고버섯 하나를 고명으로 올린 다음 고춧가루를 살짝 뿌려 등짐장수 앞에 내밀었다. 반찬으로 먹을 새콤한 야채 초절임 몇 조각을 작은 종지에 담아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락국수 나왔습니다.”
“우, 우와아아…”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이미 비주얼과 향기만으로도 등짐장수는 넋이 나가 버리고 말았다. 고작해야 면을 삶고 국물을 부은 뒤 고명을 올린 것 뿐인데, 이렇게 고급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건가.
“식으면 맛없습니다. 어서 드세요.”
“아, 알겠습니다.”
감히 고명을 흐트러뜨리는 것조차 송구한 마음이 들 정도라, 등짐장수는 머뭇거리다가 포크로 두툼한 면을 스파게티 먹듯 말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후아…”
보는 앞에서 바로 뽑아낸 두껍고 탱탱한 우동 면발의 쫀득한 맛과 잘 우려낸 육수, 여기에 어느 틈엔가 국물에 배어든 쑥갓과 실파, 고춧가루의 향미까지 더해지자 등짐장수는 잠시 그대로 황홀경에 빠져 버렸다.
“우, 추워라… 응?”
그때 문득 잘 차려입은 신사 하나가 들어오다가 볼을 발그레하니 붉힌 채 행복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는 등짐장수의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란다.
형진은 그런 신사를 향해 씩 웃더니 역시나 작은 그릇에 국물을 담고 실파와 고춧가루를 살짝 뿌려 내놓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 참 춥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