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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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예선전
수호자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 방법.
그것은 바로 상대를 않는 것이다.
특별히 이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수호자의 특성상, 일단 자리를 피하면 그들로서는 집행자를 따를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지금 형진은 그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도핑까지 한 다음 최고 속도로 도망치면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진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마치 어디론가 뒤따르는 수호자를 끌어들이려는 듯이 적절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형진은 지금 토너먼트 같은 곳에서 무작정 얼굴을 마주친 그런 상태가 아니다. 제랄딘의 가문에 속한 기사단 집결지에서 제랄딘의 마차에 기절한 유아를 옮겨 실으려다가 수호자에게 딱 걸려 버리고 말았다. 수호자가 최소한 자기 이름을 기억할 정도의 지능만 있더라도, 형진이 제랄딘과 관련되어 있다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을 포착당한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일단 이 자리만 모면하자는 식으로 도망쳐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수호자는 형진을 놓치면 제랄딘에게 달라붙을 것이고,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수호자의 행동 패턴을 생각하면 이것은 자칫 제랄딘의 정체마저 노출될 위험이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도망치는 것으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시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결판을 보는 수밖에 없다. 때문에 형진은 사람들의 이목이 닿지 않을 만한 곳으로 수호자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면서 형진은 인벤토리에 넣어 뒀던 장비를 하나둘씩 꺼내 장착했다. 사냥개의 코장식을 쓰고 목토시를 두른 다음, 집행자 세트를 착용하고 팔찌를 꼈다. 그리고 살짝 거리를 벌린 후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인벤토리에서 음식을 꺼내 허겁지겁 우겨 넣는다.
“크흐…”
무작정 음식을 우겨 넣으니 목이 막힌다. 그래서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데, 어느새 성난 황소처럼 달려온 수호자가 형진이 올라가 있는 나무 둥치를 그대로 후려친다.
우지끈!
형진은 환영의 반딧불로 쓰러지는 나무로부터 벗어난 다음 수호자를 향해 외쳤다.
“들어나 보자!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솔직히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넌… 나와 내가 모시는 신을 모욕했다!”
어쩐지 예전에 본 영화 대사가 떠오른다. 모욕감 어쩌고 하는.
“내가? 내가 언제?”
“내 두건을 벗겨내지 않았나!”
“그거?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야?”
망할 광신도. 물론 서로 가치관이 다른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이렇게 사람을 쥐 잡듯 쫓아다니는 거였단 말인가.
단순히 싸워보고 싶어서 같은 이유가 아닌 이상, 이제는 어쩔 수 없다. 크루그는 수호자를 죽이면 자칫 전쟁이 날 수도 있다고 했지만, 이대로 돌려보내면 또 같은 일이 벌어질 터. 그렇다면 마무리를 짓는 수밖에 없다.
“너, 내가 누굴 섬기는지 알아?”
“안다. 공포와 죽음이지.”
당연하다는 듯한 수호자의 답이 돌아왔지만,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넌 몰라. 공포와 죽음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무슨 소리냐.”
“무슨 소리긴.”
형진은 도망치던 것을 그만 두고 멈추어 서며 말했다.
“새겨 주겠다는 거다. 네 녀석의 영혼에 공포와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형진의 몸 주위로 강렬한 돌풍이 일어났다.
바로 라이언하트가 발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감히!”
수호자는 헌신의 일격으로 전신을 감싼 채 두려움 없는 모습으로 형진을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주먹을 들어 곧바로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이 일격은 그녀의 모든 것을 실은, 혼신의 일격이 아니었다. 이전에 토너먼트에서 겪었던 전투를 통해 그녀는 형진이 자신의 일격을 맞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고작해야 며칠 지나지도 않은 상황. 당연히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가벼운 잽과 같은 형태의 일격을 가했다.
물론 잽이라고 해도 수호자가 뻗은 일격인 것은 마찬가지. 그 한 방으로 바위를 부수고 아름드리 나무를 꺾어 버리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어디냐. 어디로 도망칠 생각이냐!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형진은 환영의 반딧불이나 은신 같은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쥔 단검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수호자의 주먹을 곧바로 찔렀다.
“멍청이.”
“!”
주먹과 단검이 서로 맞부딪히면 보통은 당연히 단검이 이긴다. 하지만 수호자가 바보라서 무기를 들지 않고 맨손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굳이 무기를 들지 않아도 무기를 이길 자신이 있고, 무기를 든 것보다도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그들이 지닌 힘의 속성에 가장 알맞기 때문에 주먹을 사용하는 것이다. 주먹을 휘둘러 상대의 무기를 부수고, 상대의 몸을 부수고, 상대의 영혼을 박살낼 자신이 있기 때문에 주먹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주먹은 그들이 모시는 신이 인정한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무기이며, 그들의 신을 표현하는 단 하나의 의지이다.
때문에 본래대로라면 감히 수호자가 휘두르는 주먹에 정면으로 마주쳐 가는 형진의 행동이 오히려 바보 같은 짓이어야 옳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의 궤도를 틀었다.
퍽! 푸아학!
“큭!”
주먹을 감싸고 있던 헌신의 일격이 깨지고, 손등으로부터 붉은 피가 치솟으며,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얼씨구. 피해?”
형진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다.
피했다. 상대의 무기와 정면으로 격돌하는 것이 두려워 자신도 모르게 주먹의 궤도를 비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인 자신이!
이것이 뭐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모시는 신이 누구이던가. 바로 신뢰와 헌신이다. 그녀가 누구인가. 신이 내려준 신뢰의 힘에 헌신을 담아 주먹으로서 그 의지를 표현하는 수호자이다. 그런 그녀가, 신이 내려준 힘을 불신하고 서로 격돌하는 것이 두려워 주먹의 궤도를 틀어버리다니. 다른 이들에게 있어서는 별 거 아닌 것 같은 일이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배교나 다름 없는 일이다.
그녀의 실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감히 맞부딪힐 생각을 못했던 형진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단검으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일격에 실린 힘이 이전처럼 감히 맞받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형진이 격돌을 피했던 것은 맞부딪혀서 그것을 깨더라도 자신 역시 어떤 피해를 입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일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떠했던가. 그녀는 형진이 다시 모습을 감추고 뒤통수를 찌르는 식의 일격을 가할 것이 두려웠다. 때문에 감히 맞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지난번과는 현격하게 달라 보일 정도의 틈이 생겼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내려진 힘을 믿고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의 일격을 찔러 넣었어야만 했다. 이미 그 부분에서 그녀는 신뢰와 헌신의 뜻을 저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형진이 일반적인 상대였다면 혼신의 힘을 담았는지, 적당히 간만 보는 건지 알아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형진이 라이언하트 스킬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면,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마음 속에 생겨난 빈틈을 알아보고 그것을 찌르고자 하는 생각은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전의 형진과는 다르게 지금의 그는 단검 숙련이라는 스킬이 42레벨에 올라있다. 무슨 스킬이든 40레벨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실상 마스터급에 달하는 경지에 올라섰다는 뜻. 특히나 무기 숙련의 경우 40레벨 이상이 되면 사실상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무기로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방금 전처럼 서로의 무기를 맞부딪혀야 하는 상황에서 높은 무기 숙련도는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준다.
즉, 이것은 지난번의 전투와는 달리 이번 격돌에서는 실력에 있어서도 형진이 눈앞의 수호자를 압도했다는 뜻이 된다. 창졸간에 주먹의 궤도를 틀었음에도 여유롭게 그 일격을 인스턴트킬로 파훼하고 경직 상태로 몰아간 것이 바로 그 좋은 증거였다.
“…”
털썩. 수호자는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을 감싸 쥐며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어?”
인스턴트 킬을 소유한 형진에게는 상대의 공격을 파훼하여 경직 상태로 몰아넣은 시점에서 이미 승부가 난 것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가차 없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움직이던 형진은, 경직이 걸렸어야 정상인 수호자가 갑자기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자 흠칫 놀라며 일단 거리를 벌렸다.
“으으… 아으으…”
“…”
운다. 엉엉 울고 있다. 그 큰 덩치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형진으로서는 갑자기 머리를 땅에 처박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뭐지. 손등이 베인 것이 그렇게 아팠나. 아니, 상처는 이미 다 아물어 버린 것 같은데. 정말 괴물 같은 회복력이네. 어라, 그럼 상처 때문이 아니면 왜 우는 거지?
“이봐?”
“우으으… 흐으윽… 흑.”
“…”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수호자의 모습에 형진은 뭔가 자신이 엄청나게 잘못한 것 같은 그런 느낌마저 받아야만 했다. 이래서야 괜히 여자에게 나쁜 짓해서 울려놓고 구경하는 악당 같은 모습 아닌가.
“진님?”
그리고 그제서야 헐레벌떡 그들을 따라온 미엘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얼떨떨한 기색이 역력한 형진과 엉엉 울고 있는 수호자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된 거에요?”
“그게… 저도 어찌된 영문인지. 서로 일격을 교환했을 뿐인데 갑자기 주저앉아서 펑펑 울더라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
“말이 안 되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
미엘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까는 보자 마자 죽일 듯이 달려들더니 지금은 이런 모습이다. 도대체 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역시 낙인을 넘겨준 주정뱅이의 말이 옳았다. 수호자는 괜히 엮여 봐야 피곤하기만 하니 그냥 상대를 안 하는 것이 상책이라던 그의 말이 이제야 절실하게 피부에 와닿는다.
“어쩌죠?”
“글쎄요.”
그냥 조용히 마무리를 지어 버리고 가자니, 괜히 수호자 전체와 분란이 일어날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고 가자니 뜬금없이 나타나서 또 오늘 같은 일을 벌일까봐 걱정스럽고.
“아무래도… 총괄 지부장님에게 문의를 하는 편이 좋겠어요. 제가 잠시 다녀올게요.”
“네? 저 혼자 지키고 있으라고요?”
“또 덤비려고 그러면 적당히 피해다니면 되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결국 미엘이 수도의 총괄 지부장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했고, 총괄 지부장 탁스 두겐은 그들의 문의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그녀는 배교의 죄를 저질렀으니 그에 대한 속죄를 해야만 합니다. 그녀는 배교자로서 수호자들에게 지탄 받을 것이며, 그 가시밭길 속에서 자신의 신뢰와 헌신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중재하신 바, 배교자 하마란 안타르의 감독과 처벌 권한은 진님에게 주어졌습니다.”
미엘에게서 이 말을 전해 받은 형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뭔 소리죠?”
그 물음에 미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힘 좋은 메이드가 한 명 늘었다는 얘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