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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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예선전
기운차게 대답은 하지만 여러모로 불안하다. 물론 제랄딘 옆에서만 움직일 거고, 호위기사며 시녀들이 에워싸고 있으니 별 일이야 있겠나 싶긴 해도.
경기장으로 사용된 곳에서는 각 기사단에 속한 종자와 일꾼들이 어느새 몰려 나와 기사들이 떨군 장비 같은 것을 수거하고 다음 경기의 진행에 문제가 없도록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기사와 시녀들에게 에워싸인 채 제랄딘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구경꾼들은 그녀에게 경의를 담아 예를 취한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왕국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 특히나 남자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또래 가운데 최고가는 신부감이기도 하다 보니 곧바로 우르르 몰려와 축하의 말을 건넨다.
“자가 백작가의 작툰이라고 합니다. 라스미어 기사단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작툰님. 감사합니다.”
“래기넘 자작가의 하카입니다. 대단한 경기였습니다.”
“하카님. 감사합니다.”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렇게 일일이 대답을 하고 지나가다 보니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기사단의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형진이 에스코트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여기에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라는 대사가 덧붙여졌을 테고, 제랄딘이 대답해야 할 횟수는 다시 곱절로 늘어났을 것이다. 말을 거는 사람은 한두 마디면 끝나는 일이지만 대답하는 제랄딘의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녹초가 되어버릴 만한 중노동이다. 괜히 파리떼 운운하면서 학을 떼는 것이 아니라고나 할까.
어쨌든 집결지에 들어서자 달라붙던 파리떼들도 더 이상은 접근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왕국 최고 가문인 브라드로슈 가문의 집결지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꼴통은 죽은 레이그릭 황자 정도가 고작이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요. 그래도 오늘은 진님이 곁을 지켜주셔서 한결 편했어요.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그렇게 집결지 안으로 들어서자, 한 무리의 기사들이 제랄딘을 마중 나왔다.
“제랄딘, 잘 와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 얘기를 하던 참이야. 덕분에 이번에는 어렵지 않게 우승할 수 있을 것 같다. 하하하!”
“삼촌도 참. 진님, 이쪽이 라스미어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계신 제 삼촌, 유슬라 백작님이십니다.”
“진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형진이 가슴에 한 손을 얹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유슬라 백작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답례한다.
“오! 이쪽이 바로 그! 난 또 우리 조카님이 드디어 결혼할 마음이 들었나 싶어 속으로 놀래던 참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엄청난 요리를 만든 요리사셨군!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오.”
“과찬이십니다.”
“삼촌도 참.”
그렇게 단장인 유슬라 백작과 인사를 나눈 진은 그 뒤에 버티고 선 두 명의 상급 기사, 그랙커스와 소그마에게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랙커스와 소그마 역시 그의 인사에 답을 하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이전에 봤을 때와는 다른 모습 때문이리라.
“그런데 어쩐 일이냐. 네가 격려해준다면 모두들 기뻐하긴 하겠다만.”
유슬라 백작의 말에 제랄딘은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있지만, 제 일행 중에 사제님이 있으시거든요. 부상자를 돌봐 주시겠다길래 모시고 왔어요. 여기 계신 분이세요.”
“그래? 그거 참 잘 되었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제님.”
“자, 잘 부탁드려요.”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신의 추종자들은 비밀스러운 부류들이 많아 유슬라 백작도 굳이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다른 사람이 소개했다면 몰라도 제랄딘이 데려온 인물이니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잠깐 동안의 격돌이었지만 제법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갈만한 부상자는 없고, 한 명이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통쾌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부상을 당한 기사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의 출전이 불가능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공녀님.”
들 것에 실린 채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고 누운 기사가 제랄딘을 알아보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통증 때문인지 얼굴을 찡그린다. 유아는 기사를 바라보다가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으니 그대로 누워 있어요. 래시포드경.”
래시포드. 누구였더라. 분명히 들어본 기억이 나는데.
유아는 그렇게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뒤져 봤지만 좀처럼 이 기사의 이름과 얼굴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분명히 두 사람은 마주치기는 하였으되 그 만남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래시포드라는 이름의 이 젊은 기사는 제랄딘이 처음 그리칸에 있는 형진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유아를 메이드로 보고 말을 낮췄다가 제랄딘의 호된 꾸중을 들었던 바로 그 기사였다. 제랄딘에 의해 근신 명령을 받고 본가의 기사단으로 복귀한 뒤 절치부심하여 이번 경기에 선발 출전했으나, 초전부터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더 이상의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제님, 살펴 봐주시겠습니까.”
“네.”
래시포드 역시 사제라 불린 이 여성이 설마 그때 그 메이드일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당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차려입은 데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눈가리개까지 했으니 아무리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도 알아 볼 수 없는게 당연하다.
부상을 입은 부위는 이미 치료사들에 의해 응급처치가 끝난 상태였다. 유아가 살펴보니 부러진 곳을 맞추고 움직이지 않게 부목을 댄 다음, 감염을 막기 위한 처치까지 완전히 끝나 있다. 이 정도면 왕국에서 제일가는 가문의 치료사로서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다.
딱히 더 이상 손을 댈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유아는 부상을 입은 부위를 향해 가만히 손을 뻗으며 희망과 생명의 여신에게 이 기사의 부상이 낫게 해달라는 기원을 올렸다. 그리고 더 이상 시합에 나가지 못하게 된 이 기사의 아픈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어?”
사람들은 갑자기 유아의 몸으로부터 빛이 흘러 나오자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가, 그녀의 몸에서 갑자기 태양과도 같은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자 크게 놀라고 말았다. 태양처럼 찬란하지만, 결코 보는 이의 눈을 아프게 하지 않는 그런 포근한 빛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바로 당사자인 유아였다.
분명 그녀는 또래에 비해 안정된 신성력을 구사할 수 있었고, 그래서 포션 제작을 위해 그리칸으로 불러 올려지기까지 했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신전의 최고 사제를 넘어 교단 전체를 아우르는 신녀급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이, 이건…”
“기적의 성광?”
그렇다. 그녀가 지금 발하고 있는 빛은 다름 아닌 기적의 성광이라고 불리는 빛이다. 신녀급의 사제가 강한 기원을 올렸을 때 나타나는 이 빛은 그것을 접한 이로 하여금 기적을 경험하게 만든다.
유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순식간에 경기장 전체를 잠시 감싸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효과는 놀라웠다.
다리가 부러져 누워있던 래시포드의 부상은 물론이고, 빛이 감싼 범위에 있던 모든 자들의 부상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랙커스 경으로 하여금 남모르는 괴로움을 느끼게 만들던 무좀도, 역시나 다른 이에게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소그마 경의 변비도 이 순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아…”
그리고 그 기적을 발한 유아는 빛이 사라진 순간 그대로 탈진하며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이 멍청이가.”
누가 호구신의 사제 아니랄까봐. 형진은 혀를 차며 쓰러지는 유아의 몸을 얼른 안아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놀란 사람들이 달려와 방금 전에 일어난 기적을 단장인 유슬라 백작에게 고한다.
“뭐라? 그게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저희 기사단 뿐만 아니라 상대 기사단의 부상자들까지 말끔하게 다 나아버렸다고 합니다.”
“설마… 기적의 성광이란 말인가.”
기적의 성광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형진의 품에 안겨 있는 유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사제도 아니고 신녀라니. 어지간해서는 일생에 한 번 보기도 어렵다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그 모습을 본 제랄딘이 얼른 수습에 나섰다.
“보셨다시피 이분은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필히 이분에 대한 것을 함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삼촌도요.”
“물론이다. 나도 괜히 입을 놀려 신의 노여움을 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단 유아가 기적의 성광을 발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이들의 입은 막았지만, 문제는 경기장 주위에서 다음 경기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어떻게 보면 기적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어 버린 상대 기사단이다. 아무리 제랄딘이라도 저들의 입까지 모조리 막을 방법은 없는 터라 형진은 일단 급히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마차에 오르기도 전에, 누군가가 기사단의 집결지에 들어섰다.
“헉! 저 사람은…”
“신성 폭… 아니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
KKK단을 연상시키는 하얀 두건을 착용한 인물 하나가 거침없이 집결지로 들어선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거구와 건강하게 그을린 갈색 피부를 가진 그 인물의 모습을 보는 순간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망할! 어째서 저 여자가 여기에!
그렇다. 지금 라스미어 기사단의 집결지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온 그 수호자는, 바로 토너먼트에서 형진과 맞붙었던 바로 그 인물이었던 것이다.
역시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있었지만 틀림없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머리통만한, 그리고 걸을 때마다 미친듯이 출렁이는 저 가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수호자들은 황자의 보호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궁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누구나가 다 알아주는 주먹패들이기는 하지만, 회복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기도 했기 때문에 기사단 간의 대결에 일종의 구급 요원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수호자 역시 자신의 그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상대 기사단의 상처를 살피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기적의 성광이 터져 나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까지 한 번에 말끔히 치유가 되어 버리자 놀라서 달려온 것이다.
형진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유아를 마차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미처 그가 얼굴을 돌리기도 전에 가면을 쓴 모습이 수호자의 시야에 들어가고 말았다.
“…”
잠시 멈춰 서서 형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수호자는 이내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바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크허엉!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그 사자후가 터져 나오기가 무섭게 형진은 얼른 유아를 미엘에게 맡기고는 급히 몸을 피했다. 저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은 조폭녀와의 싸움에 휘말려 들게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젠장! 뒤끝 없다며! 결판나면 그걸로 끝이라며!
형진이 곧바로 옆으로 몸을 움직이자, 수호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게… 어찌 된…”
“글쎄요. 저도 어찌된 일인지 잘.”
얼빠진 표정으로 묻는 유슬라 백작의 말에 제랄딘은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움직일 수가 없다. 공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집행자로서의 힘을 드러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니.”
“알았어.”
긴장한 제랄딘의 말에 미엘은 시녀를 불러 유아를 마차로 옮기게 한 뒤, 급히 형진과 수호자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