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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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악전고투
흐릅.
하마란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로 번져 나오던 군침을 화들짝 놀라며 삼켰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소용없었다.
“어때요?”
“뭐라고 말을 못하겠어요.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죠?”
“글쎄요. 정성과 사랑이 들어가서?”
뒤에서 형진이 그런 개드립을 날리고 있는 것도 하마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신경을 모조리 집중시키고 있는 것은, 오로지 쟁반 위에서 떨리는 손 때문에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커다란 그릇과 그 안에서 먹음직스러운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이름조차 모르는 음식뿐이다.
-무거워요? 무거우면 제가 들까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귓가를 간질이는 느낌으로 브라우니가 속삭이자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자신이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그런 식으로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에 하마란은 다시 크게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이 음식이 무엇이길래!
꿀꺽.
어느 새 입 안에 흥건하게 고인 군침을 꿀꺽 삼킨다. 얼마나 침이 많이 나왔는지 목에서 걸리는 느낌이 다 들 정도다.
-계단이에요. 조심해요.
“헉!”
림의 말에 하마란은 다시금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무의식중에 걸음을 옮기다가 앞에 계단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림이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계단에 걸려 넘어지면서 음식을 죄다 쏟아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감각을 이토록 괴롭히고 있는 이 향기로운 음식이 죄다 못 쓰게 되었으리라.
아깝게스리.
하마란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음식 가져다주는 것 하나 제대로 못하냐고 형진이 화를 내는 것보다 음식이 못 쓰게 된다는 사실이 먼저 떠오르다니.
큰일이다. 고작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주위의 일을 잊고, 오직 손에 들린 음식에만 집중하고 있다. 만약 평시가 아닌 전투 중에 이런 식으로 정신줄을 놓았다면 이미 열 번은 죽고도 남았으리라.
꿀꺽.
또 한 번 군침을 삼킨다. 어쩐지 손발이 차가워지는 듯한 기분마저 느껴진다. 속이 허하다. 그러고 보니 언제 식사를 했더라. 아침 수련을 마치고 경기장에 오기 전에 빵과 우유를 먹은 기억이 난다.
빵은 퍼석거렸고, 우유는 미지근했다. 물론 왕궁에서는 수호자들에게 최고급 대우를 하고자 했지만 수호자들은 일부러 그와 같은 음식을 선택했다.
따뜻한 음식은 몸의 긴장을 풀어버리고, 맛있는 음식은 마음의 긴장을 풀어버린다. 때문에 수호자들은 아무리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이 앞에 놓여 있어도 절대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음식은 배를 채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의 풍요로움이 아닌 정신의 풍요로움이기에.
하마란도 당연히 그들과 같은 선택을 했다. 그래서 호화로운 음식이 아닌 퍼석거리는 빵과 미지근한 우유를 먹은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었다. 그 어떤 산해진미도 자신의 이러한 의지를 꺾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지금껏 흔들린 적이 없던 자신의 의지가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이토록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느껴본 적이 있을까? 없다. 절대로 없다. 사흘 동안 물만 마시며 면벽 수련을 했던 그때도 이런 느낌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때는 차라리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음식이라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상황이었으니까. 때문에 면벽을 마치고 나왔을 때, 음식을 다시 먹을 수 있게 되기까지가 오히려 고역이었다.
처음에는 곡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미음을 먼저 먹었다. 그렇게 먼저 위장을 풀어주기를 며칠이나 하고 나서야 비로소 퍼석거리는 빵과 미지근한 우유를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이 음식, 그때 먹었던 미음과 비슷하다. 단지 훨씬 걸쭉하고, 훨씬 건더기가 많고, 훨씬 냄새가 좋고, 훨씬 맛있을 것 같고, 훨씬 먹고 싶고, 훨씬 배가 고파지고… 으아아아악!
다시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자꾸만 군침이 솟는다. 몸이 어쩐지 자꾸 허한 느낌이 든다. 이것은, 이 감각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강렬한 욕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끼기긱!
-힉!
무시무시한 악력에 손에 쥐고 있던 강철제 쟁반이 우그러들기 시작하자, 하마란의 어깨에 올라 앉아 슬그머니 무임승차하고 있던 림이 화들짝 놀라며 물러선다. 하지만 막상 하마란은 어깨 위에 뭐가 앉았는지 아닌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앞에서 출렁이며 사방팔방으로 구수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전복죽을 십년 만에 간신히 찾은 원수처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외, 왼쪽으로요!
계단을 다 올라섰다. 하지만 들고 있는 전복죽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나머지 그대로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버릴 듯한 모습이라, 림은 기겁하며 얼른 그렇게 외쳤다. 다행히 그 소리는 들렸는지 하마란은 기계적으로 좌회전하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앞서 전복의 살을 껍질에서 단숨에 떼어낼 때만 해도 그런가보다 했던 림이지만, 지금 이 순간 숨이 막힐 정도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하마란의 기세에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 같은 것이 먹음직스러운 전복죽의 향기에 이끌려 날아오다가 그 기세를 쐬는 순간 그대로 추락해 버릴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작고 연약한 림 같은 요정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꿀꺽.
하지만 하마란도 나름대로 이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최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라도 사생결단을 낼 것 같은 꼴이라도 되지 않는 한 정말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악마다. 그는 악마다. 하마란은 수호자가 된 이후로 이렇게 무시무시한 시험에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끔찍하고 이렇게 악랄한 고문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그 남자는 정체가 뭐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음식을 만들어 낸단 말인가!
끼익.
그 때, 방문 하나가 열리며 소년 하나가 밖으로 나오더니 하마란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린다.
“뭡니까, 지금. 싸움 거는 겁니까?”
“…”
하마란은 상대의 차가운 눈빛을 보는 순간, 이 소년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보통의 소년은 가질 수 없는,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은 듯한 짙은 그림자. 설마, 이 소년도 집행자란 말인가.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갑작스런 소년의 등장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잠시나마 눈앞에서 흔들리며 무자비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음식으로부터 주의가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이걸 가져다 주라고 해서…”
“…”
크루그는 하마란이 들고 있는 음식을 보고는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후… 형도 참. 이런 장난이나 치고.”
“…”
“들어와요. 환자랑 아이가 있으니 기세는 갈무리하시고.”
하마란은 크루그의 말대로 기세를 갈무리한 채 그 뒤를 따랐다. 겉으로는 무표정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다. 고작 음식의 유혹을 견디지 못해 기세를 일깨우다니. 이 무슨 부끄러운 짓이란 말인가.
“오빠?”
“별 일 아니야. 이쪽은 형이 새로 들인 메이드. 이름이… 이름이 뭐죠?”
방금 전의 그 차갑던 표정과는 상반된, 따뜻한 애정이 서린 목소리에 하마란은 잠시 혼란을 일으켜야만 했다.
“하마란… 악타르입니다.”
“하마란 언니였군요. 그거 기사님이 보내신 건가요?”
“기사님이라면…”
“진 오빠요.”
면전에서 형이나 오빠라고 불러주면 참 좋아할 텐데, 이 오누이는 절대로 형진을 앞에 두고는 이런 호칭을 쓰지 않는다.
하마란은 하마란대로 혼란에 빠진다. 본래는 집행자인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요리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이제는 기사란 말인가. 도대체 숨겨진 정체가 얼마나 더 있다는 건지.
“네, 뭐…”
어쨌든 그렇게 대답을 하자 카트린은 기대가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여전히 잠들어 있는 유아를 급히 깨운다.
“언니, 유아 언니. 얼른 일어나요.”
“…”
하지만 흔들어 깨워도 반응이 없다. 이제는 이미 카트린도 전복죽의 고소한 냄새를 맡은 상태. 형진이 항상 말하듯이, 음식은 식으면 맛이 없는 법이다.
“언니, 언니.”
“…”
다시 한 번 흔들어 보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잠시 고민하던 카트린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뼉을 짝 하고 마주치더니,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이렇게 외쳤다.
“언능 못 일어나!”
“헉!”
그제서야 유아는 기겁을 하며 벌떡 몸을 일으킨다. 놀랍다. 어느새 형진은 유아에게 이런 식의 조건 반사를 일으킬 정도로 조교를 완성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 주인님은?”
“아래층에요. 언니가 좋아하는 그 주인님이 언니 먹으라고 음식을 올려 보냈어요. 일단 이거 먹고 기운 내서 내려가요.”
“카, 카트린. 누, 누, 누가 누굴 좋아한다고 그래. 얘도 참.”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얘기는 찰떡 같이 알아들었나보다. 어쨌든 비로소 정신을 차린 유아는 처음 보는 인물이 메이드복이라기엔 뭔가 요상하게 색기 넘치는 옷차림을 한 여성이 쟁반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 시죠?”
하마란 대신 크루그가 답했다.
“잘은 모르겠는데 형이 새로 데리고 왔어요. 이름은 하마란 악타르. 보시다시피 메이드로 일하게 될 것 같아요.”
“…”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집에 메이드가 하나 늘어 버렸다. 그것도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가슴을 지닌!
가슴 만이 아니다. 어쩐지 키가 보통의 여성보다 훨씬 큰 것 같기는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보면 군살도 하나 없고 그렇다고 우락부락하게 근육이 튀어나온 것도 아닌 아름다운 몸매마저 지니고 있었다. 그저 모든 것이 스케일이 좀 크다는 느낌이랄까. 특히 가슴은 압도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월하게.
도대체 이 남자는 내가 깜빡 정신을 잃은 동안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거야!
다시금 패닉에 빠져 버린 유아를 보며 피식 웃어버린 크루그는 하마란에게서 쟁반을 받아 유아에게로 가져왔다. 그제서야 겨우 이 지옥 같은 음식의 고문에서 해방된 하마란은 전신의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은 탈력마저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이거요.
그런데 하마란의 기세에 놀라 숨어있던 림이 그제서야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 앞에 그릇 몇 개와 스푼, 그리고 국자를 꺼내 놓는다. 이런 음식을 혼자 먹는 걸 지켜보는 건 고문이니 알아서 나눠먹으라는 형진의 배려인 셈이다.
“훗, 쓸데없이 자상하다니까.”
맨날 투닥거리면서도 아프다니까 이렇게 딱 봐도 환자에게 어울릴 것 같은 음식을 만들어 올려 보내는 걸 보면 확실히 그냥 주인과 메이드의 관계라고는 보기 어려울지도.
크루그는 형진이나 유아가 들었으면 엉뚱한 소리 말라며 헛기침을 연발할 만한 생각을 가차 없이 떠올리며 쟁반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은 뒤 국자로 죽을 떠서 그릇에 옮겨 담았다.
“자, 유아 누나부터 받으세요.”
“네…”
어쩐지 하마란을 힐끔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보이던 유아였지만, 손 안에 따스한 김이 올라오는 죽그릇이 쥐어지자 그 안에서 풍겨나오는 냄새에 이내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오빠! 나도! 나도!”
“그래. 잠깐만.”
크루그는 그렇게 차근차근 모두에게 죽을 배식했다. 하마란은 물론이고 림까지.
“…”
하마란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죽그릇을 보고는 잠시 멍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이내 주위 사람들이 맛있다는 듯이 그것을 먹기 시작하자, 그녀 역시 이제는 먹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에 조심스럽게 스푼으로 그것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마란은 지금까지 느껴보았던 그 어떤 법열보다도 강렬한 충격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