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11
111====================
24. 악전고투
풍덩!
하마란은 순간 거대한 대양 한복판에 빠져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수련을 위해 홀로 무인도에서 파도와 맞서 싸우다가 되돌아가는 물살에 휩쓸려 바다 속에 빠져 들었던 그 때와는 다르다. 일순 죽음이라는 단어가 모든 사고를 잠식해 들어가고 공황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당시의 체험과는 완전히 다르다. 똑같이 푸른 물속에 빠져 들었음에도, 지금 이순간 하마란이 느끼는 감정은 죽음이 아닌 생명 바로 그 자체였다.
용솟음치는 생명의 기운이 몸 주위로 소용돌이치며 몸 안의 모든 부정한 기운들을 날려버리고, 그 안에 파릇한 새싹의 그것과도 같은 순수한 생명력으로 채워지는 듯한 그 기분을 과연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수면 위로 내리쬐는 햇빛을 맞으며 전신을 살랑살랑 간질이는 듯한 그 감동의 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마란은 어느 순간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우으으음! 너무 마시쩌여…”
“아하하하하!”
침대에 누운 채 눈물을 글썽이며 죽을 한 입 가득 물고 그렇게 혀 짧은 목소리를 내는 여자와 그녀를 보며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귀여운 여자 아이의 웃음 소리가 하마란을 다시 현실 세계로 불러들인 것이다.
“…”
이럴 수가.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정신줄을 놓은 건가. 아니다. 그럼 환각에 빠진 건가.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거의 시차가 느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잠시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 딴 세상에 다녀왔다고 하는 편이 맞지 않을까.
하마란은 혼란에 빠졌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집행자처럼 정신 공격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뢰와 헌신을 모시는 수호자들 역시 고행에 가까운 수련을 통해 어느 정도의 정신 수련은 마친 이들이다. 물론 그것은 하마란 역시 마찬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생겼다면,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
순간 하마란은 어떤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탄성을 터뜨렸다.
“어때요? 맛있죠?”
“네. 정말 대단하네요.”
용케 처음 보는데도 낯을 가리지 않고 하마란에게 말을 거는 카트린의 모습에 크루그와 유아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내색하지 않고 자신 몫의 죽을 비우는 일에 집중했다.
하마란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죽그릇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확실히, 이 상황은 절대로 일반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한 것을 깨닫자 그녀가 떠올린 가능성은, 어쩌면 자신이 이곳으로 보내진 것이 신뢰와 헌신의 안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기사보다도 더 혹독하게 절제를 신념으로 삼는 수호자들에게 있어서, 이 말도 안 되는 충격적인 경험은 절대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혹독한 시련일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이미 배교의 죄를 지은 자. 배교자가 되어 교단에서 일시적으로 방출되기는 하였으되, 그녀는 아직 신뢰와 헌신께서 내리신 힘을 불완전하게나마 사용할 수 있다. 그런 자신에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한 시련이 주어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혹시, 신뢰와 헌신께서는 배교자가 된 자신에게 수호자들은 할 수 없는 일을 맡기고자 하셨던 것은 아닐까. 이미 배교자가 되어 절제의 신념을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되는 자신에게 이 말도 안되는 음식과 그것을 만들어 낸 자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녀를 가장 큰 충격에 빠뜨렸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이 배교의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지만, 그 뒤에 벌로서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감독이 맡겨졌다는 사실이 또한 그녀를 공황 상태로 몰고 갔다.
아무리 배교를 저질렀다 한들, 이런 식으로 영문 모를 남자에게 감독이 맡겨지는 일은 거의 없다. 더구나 그 남자가 신뢰와 헌신에 속한 자조차 아니라니.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공포와 죽음을 모시는 집행자라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의문은 또 남는다. 설령 신뢰와 헌신께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공포와 죽음이 받아들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도대체 신들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고갔던 것일까.
“안 드세요?”
“아, 아닙니다.”
이런 저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하마란은 카트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번 더 그렇게 말을 걸자 깊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스푼을 들었다.
맞서자.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면,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자. 그것이 또한 신뢰와 헌신께서 내리신 사명이라면, 이까짓 음식 한 스푼 못 먹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하마란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용맹하게 스푼을 입으로 가져갔다.
“흐우우우…”
하지만 스푼이 입에 들어가고 음식이 혀에 닿는 순간, 하마란은 전신이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처음보다는 그나마 충격이 덜했지만, 한순간 다른 세계를 다녀올 정도의 충격 대신 이번에는 하체의 힘이 쪽 빠져 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쾌락의 폭풍이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만들어 버린 것이다.
씹고 말고 할 틈도 없이 그대로 스며드는 것처럼 음식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그제서야 하마란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위, 위험했다. 아직도 다리가 살짝 떨린다. 자칫하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릴 뻔했다.
“우… 너무 적어요.”
어느 틈엔가 자기 몫의 죽을 다 먹어치운 카트린이 스푼을 핥으면서 그렇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이걸로 배를 채우라는 건 아니겠지. 형이 유아 누나의 식성을 모를 리도 없고. 일단 이거부터 먹고 기운 차린 다음 내려오라는 거 아닐까.”
마찬가지로 게눈 감추듯 죽그릇을 비운 채 스푼을 핥으며 죽을 담아온 큰 그릇을 핥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유아는 크루그의 말에 반색했다.
“아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잠시만요. 저 옷 좀 갈아입을게요.”
“네.”
크루그는 다른 이들의 그릇과 스푼을 받아 쟁반 위에 올리고는 하마란에게로 시선을 돌리다가 그녀의 그릇이 아직 비어 있지 않은 걸 보고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입맛에 안 맞아요?”
“아,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입맛에 안 맞긴. 너무 맞아서 무서울 정도다. 도대체 이 아이들은 무섭지도 않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음식을 막 먹어치우다니.
크루그는 죽그릇을 내려다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갈등하는 하마란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쟁반을 들며 말했다.
“일단 나와요. 옷 갈아입는다니까.”
“네.”
하마란은 순순히 크루그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왔다. 크루그는 일단 유아의 방문을 닫고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말했다.
“무서워요?”
“네?”
“그 음식 말이에요.”
“…”
하마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혹시 자신을 조롱하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놀리려는 것이 아니니까.”
“…”
“저도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설명하기가 애매한데… 방금 제 여동생이나 유아 누나의 모습 보셨나요?”
“어떤 모습 말입니까.”
“순수하게 음식의 맛에 감탄하는 모습 말입니다.”
이 소년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형의 음식을 먹는 순간, 보통은 처음 한 순간 정신줄을 놓는 경우가 많아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제 동생은 한 번도 그런 경우가 없었어요. 요새는 유아 누나 역시 비슷한 느낌이죠. 어째서일까요.”
“그건…”
“아, 물론 제 동생은 신과는 상관없어요.”
“…”
유아라는 이름의 사제는 모르긴 해도 기적의 성광을 일으킨 신녀급의 사제가 아닐까 싶다. 어째서 신녀급의 사제가 자신이 속한 교단도 아닌 공포와 죽음의 집행자와 함께 머물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사제라면 확실히 이 정도 음식은 견뎌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카트린이라는 이름의 소녀는 어떤가.
얼핏 보니 카트린이라는 소녀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것이 신체의 문제로부터 기인한 문제인지, 아니면 정신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카트린이 이곳에 우글거리는 신의 추종자들과 그 어떤 면에서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런 존재가, 이 무시무시할 정도의 음식을 먹고도 단 한 번도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크루그는 의혹 어린 하마란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믿기 어렵죠? 하지만 사실이에요. 그래서 전 생각했죠. 어째서일까.”
“…”
“사실 정확한 건 저도 알 수 없어요. 다만 한 가지 가설을 세워 본다면, 형이 만드는 음식의 맛이란 건 일종의 해일과도 같은 것이라는 정도? 감히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는 절대적인 맛의 해일.”
“무엇도 가로막을 수 없다고요?”
그것은 크루그가 라이언하트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기에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었다. 라이언하트는 사용자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스킬. 이제 막 수련을 시작한 형진과는 달리, 크루그는 언제나 그것을 활성화시켜 놓고 있는 상태다.
“그래요. 우리가 잠시 동안 정신줄을 놓고 환각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 건, 그 맛의 해일이 두려워 은연중에 쌓은 방파제나 둑이 한순간 부서지며 일어나는 그런 현상이 아닐까 하는 거죠. 카트린이나 유아 누나의 경우엔 그런 두려움의 벽을 쌓지 않은 채 그 맛의 해일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니 오히려 정신줄을 놓는다든가 하는 식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터무니없는 일이다. 자신과 같이 오랜 수련을 쌓은 자의 정신조차 무너뜨릴 정도의 맛이라니,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글쎄요. 하지만 비슷한 현상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바로 헌신의 일격이죠. 상대가 아무리 견고한 방어구를 입고 있더라도, 그것을 뚫고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는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들에게 내려진 힘. 비슷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
하마란은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보통 교단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신뢰와 헌신에 속한 자들을 무작정 달려들어 몸으로 때우는 그런 족속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은 때리든 말든 방어를 생각지 않는 모습으로 달려들어 마주쳐 가는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쏟아지는 속으로 달려들어 갑옷이나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맨주먹 맨몸으로 싸우는 모습은 확실히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니까.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신에게 부여된 신뢰와 헌신의 힘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하마란이 단지 주먹을 피한 것만으로 배교자가 되어 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믿는다는 가장 큰 대전제를 훼손했기 때문에 하마란은 배교자의 멍에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세세하게 파고 들어가면 수호자들이 익히는 기법들이 무작정 돌진해서 주먹질하는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법 정도는 당연히 수호자들에게도 부여되어 있었고, 이러한 기법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가 된다. 지금 크루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그 네 가지 가운데 공격과 방어를 정의하는 두 가지 개념을 관통하고 있었다.
물론 수호자도 아닌 크루그가 그런 세세한 개념들을 알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니다. 단지 상대의 방어를 무시하고 치명타를 가하는 수호자들의 힘이 진이 만들어낸 음식과 비슷하다는 식의 표현을 한 것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듣는 하마란으로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이 음식의 맛이 자신이 모시던 신뢰와 헌신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