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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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치유
“헤에, 여기가 진님의 방인가요?”
형진이 아틀리에에서 뻘짓을 하고 있는 동안, 방 정리를 마친 여성들은 형진의 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본래는 방구경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제랄딘이 자신도 메이드복을 입어보고 싶다고 해서 드레스룸을 찾아온 것인데, 일전에 짐을 옮기면서 메이드복 역시 전부 드레스룸에 넣어둔 상태라 어쩌다 보니 신혼집 집들이를 온 것 같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저기… 드레스룸은 이쪽인데요.”
유아는 제랄딘과 미엘이 눈을 반짝이며 침실을 살펴보기 시작하자 당황해서 그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했지만, 과년한 두 처녀들의 시선은 깨소금 향기가 폴폴 풍기는 침실에 이미 꽂혀 버린 상황이었다. 미엘의 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만, 그들 종족 기준으로 따지면 그녀도 엄연히 꽃다운 처녀가 맞다.
“진님이 잘 대해줘요?”
“그, 그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제랄딘의 압박에 유아는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대로 말하자니 뭔가 난감하고, 그렇다고 말 안하고 버티자니 제랄딘의 눈빛이 주는 압박감이 범상치 않다.
“그, 그냥… 그럭저럭…”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 하지만 유아의 태도로 미루어 보건데, 이것은 긍정에 가까운 답이라고 봐야한다.
“헤에…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구, 구체적으로요?”
유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며 푹 익어 버렸다. 이런 저런 일들이 떠오르기는 하는데 차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옆에서 지켜보던 미엘이 키득거리며 제랄딘을 말렸다.
“아가씨, 그쯤 해두세요. 저러다 기절하겠어요.”
“흐음…”
생각을 잠시 떠올린 것만으로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생각보다 꽤 잘 해주고 있는 듯. 솔직히 좀 의외라고나 할까. 제랄딘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순순히 유아의 뒤를 따라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와아… 이건 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하네요.”
“그, 그러게.”
하지만 잠시나마 형진에게 쌓여가던 호감 점수는 드레스룸에 들어가 유아가 가진 옷들을 보는 순간 다시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딱 보기에도 엄청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야한 속옷과 잠옷 들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해 버린 탓이다.
“이, 이건… 그냥 사두기만 한 거에요. 아직 입어 본 적도 없어요.”
이 물건들이 여기 모셔져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던 유아는 당황해서 그렇게 변명했지만,
“그 인간이 사준 거 맞죠?”
“…”
제랄딘의 말 한 마디에 바로 침묵하고 말았다.
변태일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참…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피식 웃던 제랄딘은 무슨 생각에선지 걸려 있는 속옷 가운데 하나를 집어 들더니 몸에 대보았다.
“어때요. 어울려요?”
“아, 아가씨.”
“왜에. 안 어울려?”
“…”
미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쥐고 말았다. 아무래도 평소에 억눌러져 있던 장난기들이 귀족 영애로서의 신분에서 잠시나마 해방되자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모양이다.
“아가씨. 메이드복이라면 몰라도 속옷까지 빌려달라고 하기는 좀 그렇잖아요.”
“음… 그런가. 좀 아쉽네.”
“…”
아무래도 말리지 않았다면 신기하다며 바로 유아를 압박해 시착을 해봤으리라. 나이를 먹으면서 말괄량이 기질이 좀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하기야 사람 성격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는가만은.
하지만 바로 그때. 엉뚱하게 유아가 초를 치고 나섰다.
“필요하시면 가지셔도 돼요. 저도 입을 엄두가 안 나서 모셔두고만 있던 참이라.”
“정말요?”
아차차. 이 맹한 메이드를 잊고 있었던 것이 불찰이다. 설마 이 상황에서 호구신의 사제 모드가 발동될 줄이야. 완전히 계산 착오가 아닐 수 없다.
주인인 유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랄딘은 콧노래를 부르며 속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잠시 몇 가지를 놓고 고민하던 제랄딘은 이내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들고는 자신의 몸에 대보며 말했다.
“이거 어때요?”
“…”
미엘은 물론이고 유아도 잠시 아무런 말을 못했다. 제랄딘이 고른 것은 검은 색 레이스와 망사로 만들어진 일종의 슬립이었는데, 가슴과 하복부의 중요한 부분에 작은 리본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문제는 그 리본이 그냥 장식이 아니라 실제로 풀 수 있는 매듭이라는 사실.
“크흠.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아직 시집도 안간 처녀가 입기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왜? 예쁘잖아.”
“그, 그게… 크흠.”
미엘은 헛기침을 하고는 손을 뻗어 제랄딘이 들고 있는 속옷의 매듭 몇 개를 풀었다. 뭘 하려고 그러나 싶었던 제랄딘은 매듭이 풀린 뒤의 모습을 보고는 얼굴이 새빻갛게 익어 버렸다.
어째서 입을 엄두가 안 난다는 건지 절실하게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과, 과연… 그런 것이었군.”
그리고는 얌전하게 다시 옷걸이에 되돌려 놓는다. 아무리 장난기 넘치는 말괄량이 아가씨라도 이것은 역시 감당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제랄딘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쑥스러웠던지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크흠. 역시 속옷까지 빌리는 건 좀 그럴 것 같네요. 그냥 메이드복만 빌려주세요.”
“네.”
유아도 미엘도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메이드복이야 장난으로 입어본다 쳐도 저런 속옷을 입고 형진 앞에 나섰다가 그걸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뒷감당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이 집에 남자가 형진 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유아도 미엘도 제랄딘도 오귀스트나 크루그의 존재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크루그야 그렇다쳐도 오귀스트는 아마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조용히 술병을 들고 테라스에서 쭈그리고 앉아 잔을 기울일지도 모르겠다.
속옷 때문에 벌어진 한 차례의 위기에서 벗어나자 세 여성들은 연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여러 가지 메이드복을 입어보다가 마침내 함께 묵기로 한 방에 돌아왔다.
“저 어때요?”
“와아! 너무 귀여워요. 카트린.”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들이 방에 돌아왔을 때, 카트린 역시 메이드복을 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난 거에요?”
“전에 옷가게에 갔을 때 아줌마들이 챙겨줬어요.”
기젤의 옷가게에서 근무하는 여급들이 들었다면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을 말을 태연하게 내뱉으며 카트린은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세 여성들은 이내 야수처럼 달려들어 카트린의 뺨을 부비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휴… 다녀왔…”
그때, 형진에게서 고문 아닌 고문을 받고 돌아오던 하마란은 세 여자가 꺄꺄 거리며 카트린 주위에 몰려 있는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저마다 조금씩 형태가 다르긴 하지만 모두 메이드 복을 갖춰 입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 왔어요?”
“그, 그게… 네.”
아무래도 모두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역시 이럴 때는 슬쩍 자리를 피하는 편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미처 도망치기도 전에 제랄딘이 다가와 손을 덥석 잡고는 침대 쪽으로 끌어들였다.
“저기… 저는…”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어릴 때부터 수련에만 매진해 왔던 하마란으로서는 이런 여성들의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단순히 익숙하지 않은 것을 넘어, 면역 자체가 거의 없다.
하지만 제랄딘은 하마란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즐기며 이렇게 물었다.
“하마란님.”
“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가슴이 커지나요?”
“…”
그 질문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여성의 시선이 일시에 하마란의 가슴으로 집중되었다. 특히나 가슴 키우기라는 명목하에 매일 밤 형진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유아는 귀까지 쫑긋거린다.
“그, 글쎄요.”
“에이, 그러지 말고 비법이 있으면 말해줘요.”
치근덕거리며 묻는 제랄딘의 말에 하마란은 평소 생각하던 바를 그대로 읊었다.
“글쎄요. 딱히 가슴이 크다고 좋은 적은 없었던지라. 저는 종종 걸리적거려서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을 떠올릴 정도거든요.”
“헉.”
여자들은 그 과격한 말에 그대로 헛숨을 들이켰다. 과연 수호자.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가슴을 잘라버릴 생각을 하다니.
그때였다.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언니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카트린이, 하마란의 발언을 듣자 이내 안색이 급격하게 창백해지며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만 것이다.
“꺅! 카트린!”
“어쩜 좋아! 일단 침대에 눕혀요.”
카트린이 기절해 버리자 하마란은 당황해 버렸다.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했을 뿐인데 고작 그런 얘기를 듣고 기절해 버릴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고작이란 건 하마란의 기준으로나 통하는 얘기다. 더구나, 카트린의 경우엔 정신적으로 아무래도 다른 이들과 상황이 좀 다르기까지 하다.
“어떻게 된 일이죠?”
언니들이랑 밤새도록 놀거라면서 기쁜 표정으로 메이드복으로 갈아입은 것이 고작 얼마전의 일. 그런데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카트린의 모습에 크루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게… 실은…”
유아가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크루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작게 탄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다행히 카트린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시 정신을 차렸다. 게다가 안색이 다소 창백하기는 했어도 자신이 무엇 때문에 정신을 잃었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정신이 스스로 그 기억 자체를 차단해 버린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그 때쯤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옥 같은 강화 작업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하하하하…”
괜히 여기서 다시 그 얘기를 꺼냈다가 카트린이 다시 기절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래서 유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형진은 유아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밤에 단 둘이 되면 얼마든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심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보다 하던 형진은 이내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야… 이거 이렇게 아리따운 메이드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막 뛰는군요. 특히 이 작고 귀여운 메이드는 당장이라도 훔쳐 가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형진이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기사처럼 손등에 입을 맞추자 카트린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카트린 뿐만이 아니다. 똑같은 메이드복을 입었는데도 은은한 기품과 장난기 어린 분위기가 묘하게 섞인, 마치 검은 고양이가 연상되는 기이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제랄딘 역시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마치 언니옷을 몰래 가져다 입은 것 같은 미엘의 모습은 어떤가. 속은 백년 묵은 수인족이라도 이건 이것 나름대로 꽤 귀엽다.
뭐랄까. 백수십 개가 넘는 머리핀을 강화로 날려버린 것 때문에 쓰리던 속이 이 모습만으로도 어쩐지 치유되는 느낌이랄까. 이래서 남자의 로망 운운하는 모양이라고, 형진은 생각했다.
“자, 가시죠. 모처럼 이렇게 많은 메이드가 모였으니 오늘은 다 함께 요리를 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네요.”
“저희들도요?”
“네. 요리, 그거 알고 보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가실까요? 아가씨들.”
형진은 참 쉽죠라는 대사를 남발하던 어떤 화가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주방으로 이끌었다. 사실 좀 불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빠릿한 조수들도 있고 +4 머리핀이라는 치트키에 가까운 아이템도 있으니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