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85
185====================
40. 재회
살짝 던지는 매력적인 눈웃음을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대답한다.
“오랜 만… 입니다.”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막상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 둘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당황한 와중에도 아란의 몸매를 살핀다. 하지만 딱히 아이를 가졌다든가 하는 식의 느낌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도박은 실패였던 모양이다.
“오셨군요. 이리 앉으시지요.”
“네, 지부장님.”
형진이 자리에 앉자 지부장은 그에게도 차를 내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승급을 하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부장님께서 잘 돌봐주신 덕분입니다.”
“제가 뭘요. 모두 진님의 꾸준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지요.”
일단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난 형진은 눈앞에 앉아 있는 두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나는 수치심 가득한 표정으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고, 아란은 그런 미나의 한 손을 꼭 잡은 채 형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저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인지요.”
대충 상황이 짐작되기는 했지만, 일단 먼저 운을 떼본다. 그러자 기젤이 아란과 미나를 가리켜 보이며 대답한다.
“실은 오늘 이렇게 모신 것은, 그란웰의 지부장이신 아란님이 진님과 미나님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의 원만한 해결을 모색하고 싶다는 의견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형진은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미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새를 못 참고 가서 고자질 한거냐 하는 의미를 담은 채.
그런 형진의 모습을 알아본 것인지 아란이 입을 열었다.
“미나가 먼저 말한 것이 아니에요. 며칠 전 이런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하고 방안에만 처박혀 있는 모습이 이상해서 제가 캐물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처음 대면한 상황에서 다짜고짜 엉덩이를 까보이며 낙인을 드러내길래 꽤 개방적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꾸하자, 아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이 정도로 하시고 용서해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대뜸 미나의 편을 드는 듯한 모습에 형진은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글쎄요. 이 일은 공포와 죽음의 이름을 걸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와서 제가 용서한다고 무를 수가 있겠습니까?”
낙장불입. 이미 신의 이름을 걸고 행해진 일이니 소용없다는 식으로 대답하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기젤이 끼어들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문의를 해보았습니다. 물론 공포와 죽음의 이름을 걸고 행해진 일이니 쉽게 뒤집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만, 만약 진님께서 원하신다면 벌을 다소 경감하는 정도는 가능하다는 응답이 돌아왔습니다.”
“끙…”
성도들을 잘 보살펴 주는 건 좋은데, 이런 소소한 일에까지 너무 응답이 빠르니 이것도 골치다. 대충 좀 무시하고 얼버무리는 수완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공포와 죽음이시여.
“그래서요? 설마 맨입으로 물러 달라는 건 아니겠지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최대한 맞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어떻게 나오자 보자는 식으로 던진 말에 아란이 즉답하자, 형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딱히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식으로 던진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떠오르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무슨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미나를 대신해 답하고 있는 아란의 모습이 어쩐지 얄밉다. 따지고 보면 그 내기가 벌어진 이유가 누구 때문인가.
“일단 들어나 봅시다. 어떤 식으로 경감해주길 원하는 겁니까.”
어쩐지 투정 부리는 아이 같은 그 말에 아란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진님이 원할 경우 어떤 상황에서든 즉시 이 옷을 갖춰 입는 정도라면 어떨까요.”
“…”
형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란이 제시한 조건은 바로 자신이 그녀에게 바니걸 슈트를 건네면서 농담처럼 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지막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이 여자,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호오, 제가 원할 경우… 입니까?”
“네.”
“뭔가 애매하군요. 그럼 제가 이 조건을 수락하고 앞으로 계속 바니걸 슈트만 입고 다니길 원한다고 해버리면 경감도 뭣도 아니게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절대로 벗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하기야 지금 상태대로라면 몸을 씻는 일부터 시작해서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일까지 전부 저 옷을 입은 채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미나의 얼굴색이 어쩐지 거뭇하게 죽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설마 대결이 있고난 뒤로 지금까지 생리현상을 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것을 위해 어떤 조건을 생각해 오셨습니까.”
솔직히 미나에 대한 일은 대결이 벌어지고 나서 그냥 잊어버리고 있었던 상황이라 딱히 뭔가를 더 요구할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달리 쓸 데라도 있으면야 데려다가 메이드라도 삼겠지만, 지금 그의 집에는 메이드가 넘쳐나서 각 신전으로 인력 파견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런 여자 데려다 놔봐야 괜히 신경만 쓰일 뿐이다.
한풀 누그러진 형진의 말에 아란은 바로 대답했다.
“앞으로 미나가 얻을 공헌도의 반을 진님에게 맡기도록 하겠어요. 어떤가요.”
공헌도라. 확실히 돈보다 귀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어떻게 보면 급여를 차압하는 식이나 다름 없는 일이니, 아마도 현재의 미나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이겠지.
하지만 형진은 그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공헌도… 글쎄요. 미나님이 과연 얼마나 공헌도를 벌어들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현재로서도 공헌도는 차고 넘쳐서 감당을 못하는 수준이라서 말이죠.”
“네?”
아마 이 정도 조건이면 수락할거라 예상하고 있었는지, 아란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서 형진은 알게 모르게 작은 쾌감마저 느꼈다.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 편만 드는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놓친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주고 싶다는, 어찌 보면 좀 유치한 복수심이 그의 입을 다시 열었다.
“어디 보자. 지금 제가 보유한 공헌도의 양이… 삼백만 조금 넘는군요. 미나님은 과연 한 달에 공헌도를 얼마나 버시는지?”
“…”
형진의 말에 아란과 미나는 물론이고 기젤마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삼백만을 일 년 동안 모으려면 하루 평균 거의 일만에 육박하는 공헌도를 벌어야 한다. 하지만 형진이 집행자가 된 것은 고작 몇 달 전의 일. 그렇다면 과연 그가 하루에 벌어들이는 공헌도는 얼마란 말인가. 아니,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긴 한건가.
물론 형진이 직접 나서서 공헌도를 번다면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물리적으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활동거리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도 라야에서 암살 의뢰를 싹쓸이 할 당시에도 하루에 기껏해야 백 단위의 공헌도를 버는 게 고작이었으니 말해 무엇 할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렇게 앉아 있는 동안에서 공헌도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쌓여 가고 있었다. 그것도 초단위로 후두둑 올라가다 보니 어디서 무슨 의뢰로 획득한 것인지 살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다.
일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이 벌어들이는 공헌도의 양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에 피나 마찬가지.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잠깐.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들어오는 공헌도는 그렇다 쳐도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거지. 호구신의 사제들에게 공헌도가 들어가진 않을텐데. 설마 공포와 죽음께서 다 꿀꺽하시는 건가.
설마 호구신의 사제들을 의뢰 시스템에 편입시키는 일을 허용한 진짜 이유는 공헌도 회수?
쳇. 기왕 그런 거라면 좀 더 쓰시지. 하기야 지금 상태에서도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곤란할 정도이긴 하다만.
“그게…”
형진이 그렇게 잠시 잡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동안 아란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확실히 그가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이런 저런 경로의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단 둘이만 있을 때 이런 얘기를 했다면 허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자리는 그리칸과 그란웰의 두 지부장이 함께 배석한 상태. 물론 거짓말을 한다고 뭔가 불이익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막 던질 수 있는 그런 자리는 아니다. 뭐라 해도 지부장은 아무리 작은 지역을 맡고 있다 한들 공포와 죽음께 바로 보고를 올릴 수 있는 직책이다.
아란은 물론이고 미나 역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솔직히 개인이 벌어들이는 공헌도의 절반을 저당 잡히는 것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일인데, 딱 봐도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게 생겼으니 다른 어떤 조건을 걸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형진은 그렇게 두 여자가 당황해 하는 모습을 즐기다가, 선심 쓰는 척 다시 말했다.
“솔직히 제 입장에서는 이런 조건 따위 받아들여봐야 별 의미도 없습니다만, 일부러 먼 길을 찾아오셨는데 이대로 모른 척 하는 것도 형제를 대하는 예의는 아니겠죠. 하지만 이번 만입니다. 이 이상으로 더 뭔가를 요구하셔도 저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신다면, 이 조건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감사… 합니다.”
그제서야 미나가 비로소 그렇게 입을 열며 고개를 숙인다.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인물을 건드린 것인지 아마 뼈저리게 느낀 모양이다.
친구 잘 만난 걸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솔직히 아란 아니었으면 변비에 걸려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테니까.
“그 외에 달리 하실 말씀은?”
“그럼… 일단 변경된 벌칙의 내용을 보고하고 허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편하신대로.”
아란이 눈을 감고 공포와 죽음께 보고를 올리는 동안, 형진은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일이 마무리 되긴 했어도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정을 주었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으니 마음이 심숭생숭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보고가 끝났습니다.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리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바쁘신데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
형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아무래도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멈추어 섰다.
“이대로 그란웰로 돌아가실 예정이십니까?”
“네.”
“마차를 가져오셨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그란웰까지 모셔 드리겠습니다.”
“네?”
아란과 미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형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들을 재촉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는 지부장 기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 일로 인해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요. 원만하게 일이 해결되어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인사를 마치고 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왔다. 그녀들이 타고 온 마차는 유랑극단에서 쓰던 짐마차로, 간단하게 숙식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마차 바퀴에 자신이 수리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고 보면 아란의 일 때문에 일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와버렸지. 모르긴 해도 바퀴를 수리할 목수를 찾느라 극단 사람들이 고생 좀 했을 것이다. 하기야 전부 자기들 단장인 미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자업자득인 셈이지만.
“저… 어떻게 돌려보내 주신다는 건지.”
“일단 마차에 타시죠.”
“네.”
두 여자가 마차에 올라타자, 형진은 미엘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결계 좀 부탁해.”
“네.”
미엘은 옷가게에서 아란과 미나의 모습을 본 순간 직감적으로 뭔가를 느꼈는지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아란이 지부장 겸 스킬마스터라 해도 미엘이 스스로 나서서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상 그녀의 존재를 알아볼 방법은 없을 것이다.
미엘이 결계를 펼치자, 형진은 그제서야 비로소 마차 앞에 요정의 문을 열었다.
뭘 하려고 그러나 싶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아란과 미나는 마차 앞에 알 수 없는 공간으로 통하는 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크게 놀라고 말았다.
“따라 오십시오.”
형진이 앞서서 요정의 문으로 들어가자, 아란과 미나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마차를 몰아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이내 지금까지 봐왔던 주위의 풍경과는 다른 이차원적인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형진은 혹시 근처에 요정들이 없는지 살폈지만, 신전의 일 때문에 모두 몰려나간 탓인지 근처에서 요정의 기척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남아 있는 요정이 있긴 하겠지만, 지금은 차라리 이렇게 다른 요정들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낫다.
아란이 모는 마차가 요정의 나라에 완전히 진입하자, 형진은 열어뒀던 요정의 문을 닫고 곧바로 그란웰 인근의 자작나무 숲으로 통하는 요정의 문을 열었다.
“따라 오십시오.”
이번에도 형진이 앞장서서 문을 통과하자 아란은 조심스럽게 마차를 몰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문을 통과하기 무섭게 눈앞에 드러난 낯익은 풍경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마차를 전속력으로 몰아도 며칠은 우습게 걸리는 거리를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주파하고 말았다. 솔직히 방금 전까지만 삼백만 이상의 공헌도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에 반신반의했는데, 이제는 어쩐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부터는 따로 안내를 해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전 이만.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인사를 하고 다시 그리칸으로 복귀하기 위해 뒤돌아섰다. 그러자 뒤늦게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아란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요.”
“…”
무슨 일이냐는 듯이 돌아보는 형진을 향해 아란은 잠시 주저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기왕 이렇게 왔으니… 잠깐 들러서 식사라도 하고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