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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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재회
형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아란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똑바로 말하라는 듯이.
둘의 그런 분위기를 본 미나는 잠시 우왕좌왕하더니 아란이 잡고 있던 고삐로 손을 뻗었다. 아란이 돌아보자 미나는 어서 가보라는 듯이 눈짓을 하며 그녀를 어깨로 밀어냈다.
“너…”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하고 와. 나 먼저 가있을게.”
“…”
그렇게 말하며 한 번 더 어깨로 밀어나자, 아란은 맥없이 밀려나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아란이 내리자 미나는 형진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마차를 몰고 시야에서 사라진다. 덜컹거리는 짐마차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지다가 이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고 나서야 아란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동안… 잘 지냈죠.”
“네. 그럭저럭.”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막상 멍석이 깔리긴 했는데 이렇게 마주 보고 서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둘 다.
“일단… 걸을까요?”
“…”
아무래도 분위기가 너무 어색하다 싶었는지, 아란은 그렇게 제안했다. 형진은 그 말에 따르는 것처럼 다가서더니 문득 아란의 손목을 콱 움켜잡았다.
“진?”
놀란 아란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것을 바라보며, 형진은 다시 요정의 문을 열고는 아란을 그리로 데려갔다.
강인한 형진의 손아귀 힘에 잡힌 채 요정의 문을 통과하고 보니, 앞서 들렀던 이상한 장소다. 하지만 곧이어 또 한 번 요정의 문이 열리고 그곳을 통과하자 낯익은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란웰에 있는, 과거 형진이 머물렀던 바로 그 집 안이다.
“이런 것도… 가능했군요.”
복잡한 감정이 서린 아란의 목소리. 놀람보다는 이렇게 바로 돌아올 수 있었음에도 한 번 들러보지도 않았던 그에 대한 섭섭함이 묻어나오는 그런 목소리다.
하지만 형진은 그런 아란의 목소리에 서린 감정을 모른 척하며 꽉 움켜쥐었던 그녀의 손목을 놓고는 한동안 쓰지 않았던 화덕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비워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며 매일 거르지 않고 청소를 한 것처럼. 그날 그날 마실 물이며 화덕이나 난로를 지필 장작까지 모조리 갖춰진 채.
“…”
형진이 그 모든 것을 확인하자, 아란은 감히 눈을 마주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이래서야말로 한 것보다 더 확실하게 마음을 전달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에.
잠시 집안을 둘러보던 형진은 프라이팬을 꺼내고 인벤토리에 담겨져 있던 식재료를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동굴곰 고기부터 시작해서, 잘 손질된 전복과 약간의 야채가 프라이팬에 올려진 채 그대로 구워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요리를 시작하는 형진의 모습에 아란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앉아요.”
“…”
낮고 조용한, 하지만 무게가 실린 형진의 말에 아란은 저항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내음이 퍼져 나온다.
아란 역시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몸인지라 대번에 형진의 솜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접시가 놓여지고 거기에 동굴곰과 전복을 함께 구워낸 스테이크가 올려지더니 구운 야채가 놓여지고 그림을 그리듯 소스가 뿌려진다.
“드십시오.”
“네.”
이게 아닌데.
그냥 이대로 보내기 아쉬워서 한 끼 대접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대접 받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란은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자신 앞에 놓여진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 맛을 지닌 요리를 만들어낸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바다와 산의 최고급 일미들을 한꺼번에 담아낸 것도 놀라운데, 어느 한 쪽에 짓눌리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건 자신으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솜씨다.
아란의 표정이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서글퍼지고 말았다. 이제는 이 남자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싶어서.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지고 만다.
한 편으로는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란웰에 있었다면, 이 코딱지만한 작은 마을에서 계속 머물렀다면 이 남자는 그저 마음 좋게 생긴 솜씨 좋은 청년에 불과했을 것이다. 큰 도시로 나아가 큰 사람이 되었으니 정말 잘 된 일이다.
자신의 선택은 잘못 되지 않았다.
서로를 위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은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증명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 어째서, 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아파오는 것일까.
달그락 달그락.
접시 위에서 포크와 나이프가 움직이는 소리만 한동안 집 안에 울려 퍼진다. 둘은 그렇게 아무런 말없이 서로의 접시에 놓여진 음식을 비우고만 있었다.
“잘 먹었어요.”
“다행이군요.”
“설거지는… 제가 할 게요.”
아란은 일어나 형진의 접시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형진의 손이 다시 뻗어와 그녀의 손목을 콱 움켜잡는다.
“진?”
놀란 아란이 그렇게 이름을 부르자, 형진은 그녀의 손목을 확 끌어당겼다.
“!”
강인한 그 힘에 의해 아란은 아차 하는 순간 이미 그의 품에 안긴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놀랄 틈도 없이 덮쳐 오는 형진의 입술을 맞이해야 했다.
달짝지근한 소스의 맛이 남은 상태로 둘은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그렇게 호흡이 가빠질 정도로 기나긴 키스가 이어지다가 뒤늦게서야 정신을 차린 아란이 얼른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잠깐… 이러면 안 돼요. 잠깐만 제 말을…”
하지만 형진은 아예 아란의 몸을 번쩍 안아들더니 그대로 침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말이 필요 없다는 듯이 마치 흡혈귀처럼 아란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아흑!”
아란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스런 감각에 몸을 떨었다. 형진은 그렇게 아란의 살 내음을 맡으며 몸에 걸친 옷가지들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조금 난폭한 기세로.
아란은 몸에 힘이 쭉 빠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미 그녀는 저항이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서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둘이 처음 밤을 보냈던 그 날처럼. 그저 가쁜 호흡 속에서 탄식하며 울먹일 뿐이다.
“흑!”
단순히 입술이 닿고 있을 뿐인데도 전기가 흐르는 것만 같다. 아란의 욕망은 이대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리라고 자꾸만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는 그와 같은 유혹을 버텨내며 자신의 속옷을 벗기려 드는 형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형진은 그제서야 아란과 눈을 맞추었다. 어째서냐는 듯이.
아란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형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정말… 안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지만 결국 당신은 절 뿌리치지 못했죠.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그러게요.”
형진은 땀에 젖은 아란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그리칸으로 와요.”
하지만 아란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거절할게요.”
“어째서?”
“그냥… 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어서요.”
“…”
“가끔, 생각날 때 들려서… 오늘처럼 같이 밥을 먹으며,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는 정도로도 전 충분해요.”
“하지만…”
“그렇게 해요. 네?”
원래는 이렇게까지 하려던 게 아니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진 게 아쉬워서 제대로 마무리를 짓자는 생각으로 그렇게 식사 얘기를 꺼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전에도 지금도 아란은 이 남자의 손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만 이렇게 다시 한 번 이 남자의 품에 안기고 나니, 작게나마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 언제나 함께 있지는 못하더라도, 아주 가끔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상대가 될 수 있기를 바래보기로 했다. 그렇게 가끔 스쳐가다가 언젠가 잊혀지더라도.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놓치지 않고 싶다. 하지만 자신은 흠이 많은 여자. 게다가 지금의 그에게서는 알게 모르게 다른 여자의 향기가 전해지고 있다. 괜히 이제까지 그가 이뤄놓은 모든 것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것을 망쳐 버리고 싶지 않다. 기왕이면, 이 남자에게 좋은 기억으로만 남고 싶다. 아란은 그런 이기적인 여자였다.
몇 번이나 더 권해보아도 아란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정말 고집쟁이군요.”
“그러게요. 저도 제가 이 정도인줄은 몰랐어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마음이 바뀐다면 그리칸으로 오십시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에요.”
아란은 그렇게 말하고는 형진의 몸 위로 올라와 그와 키스를 나누었다. 마음 속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지만, 아란은 그것을 꾹 눌러 참았다. 당장이라도 그와 함께 뜨거운 열락 속으로 빠져 들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억눌렀다.
그렇게 한 번 더 기나긴 입맞춤이 이어지고 나서야 둘은 마침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보고 싶다면 기별을 보내십시오.”
“어떻게요?”
“미나를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동 스킬을 쓴다면 얼마 안 걸릴 겁니다.”
“그것도 벌인가요?”
“그런 셈이죠.”
형진은 아쉬운 듯 아란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추고는 요정의 문을 통해 그곳을 벗어났다. 아란은 잠시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갔어?”
“응.”
집에는 먼저 돌아온 미나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같이 가지 그랬어.”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니?”
“미안.”
미나는 엄마에게 야단맞은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따지고 보면 둘의 관계가 그렇게 일그러져 버린 것은 온전히 자신의 탓. 뒤늦게서야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란은 그런 미나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이렇게 경고했다.
“말해 두겠는데, 괜히 날 위한다고 다시 엉뚱한 짓 하지 말아.”
“무슨…”
“그는 이미 여자가 있어. 그것도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참한 여자가. 난 그들의 사이가 나 때문에 어그러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
형진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아란은 그란웰에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여자에 대한 것도 있었다. 아란이 완강하게 그란웰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만약 네가 괜히 입을 놀려서, 그가 잠시라도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난 널 용서하지 못하게 될 거야.”
미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도 같은 짓을 두 번 저지를 바보는 아니야. 그리고 친구의 손에 죽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하지만 둘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눈동자의 주인공은 바로 미엘이 남겨둔 꼬리였다.
미엘은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아틀리에로 들어가는 형진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내가 무섭지도 않아요?”
“무섭지.”
“그런데도 내가 뻔히 지켜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잘도 저지르는 군요.”
“미안. 그렇지만, 역시 어쩔 수 없었어.”
“후…”
미엘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이 처음 형진을 덮쳤을 때,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유아의 심정도 이랬겠구나 하면서. 자신은 이미 이 남자의 일생동안 떨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이미 유아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반려로 정해버렸다. 아마도 그 모든 일로 인한 벌을 지금에서야 되돌려 받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그녀는 떠올리고 있었다.
“유아님에게는 말하지 않을게요.”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