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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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광고
어쨌든.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목표로 했던 스케치는 무사히 손에 넣었다. 형진은 그렇게 그려낸 스케치를 가지고 마음속에 맺혀 있는 울분과 회한을 담아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큭큭큭… 큭큭큭큭. 내 오른손이 울부짖고 있다. 너희들의 헐벗은 모습을 세상 만천하에 공개하라고 울부짖고 있다!”
-오오, 드디어 요정왕께서도 허세와 망상에 귀의하시려는 것인가!
-동포들이여! 어서 요정왕께 우리들의 힘을 보태도록 하자!
-요정왕께서 허세와 망상에 귀의하신다면, 세상은 우리의 것이 되리라!
광기에 젖은 듯 그렇게 그림에 빠져 있는 형진과 그를 응원하는 요정들의 모습을 보며 제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보여줄 걸 그랬나 봐. 언니.”
“헤에, 우리 아가씨께서는 보여주고 싶었던 거군요.”
“그,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괜시리 허둥대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제랄딘의 모습에 미엘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슬슬 날짜를 잡는 편이 좋겠다고.
사실상 공작이 그녀를 두고 간 시점에서 혼인이 성사된 것이나 다름 없지만, 형진은 어째서인지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이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유아 때문인건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침마나 시트 뒤집기를 계속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싶기도 하고. 미엘이 나름 오래 살았다고는 해도, 이 남자는 도대체 그 속을 짐작하기가 힘들다. 하기야 그래서 형진과의 생활이 재미있다고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렇게 계속 미뤄두고만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 괜한 오지랖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제랄딘도 딱히 그가 싫은 건 아닌 모양이니 슬슬 유아와 상의해서 날짜를 잡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미엘의 분신 가운데 하나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카트린과 함께 회합장에 가있는 유아를 만나기 위해 저택 안에 조촐하게 꾸며진 기도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형진은 열심히 석판화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석판화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판화와는 제작 방식이 사뭇 다르다. 판화라고 하면 무언가를 깎고 다듬어서 틀을 만든 다음 그것을 찍어내는 일을 연상하기 쉽지만, 석판화는 그런 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만큼 과정이 번거롭지만 일반적인 판화로는 표현하기 힘든 세밀한 묘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 포스터를 찍어내는 수단으로는 실크스크린 같은 인쇄 기법이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형진은 디자인이나 회화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고, 인쇄 기법 같은 건 더더욱 모른다. 엘리시온에서는 여러 가지 가공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공예 기술이 구현되어 있지만, 불행히도 실크스크린은 그런 기법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은 기술이다.
물론 석판화도 기술 수준으로 따지면 흔히 중세라고 부르는 시기와 동떨어진 건 마찬가지. 그러나 어쨌든 기술 자체는 구현되어 있으니 구체적인 원리 따위는 전혀 모르는 형진도 어떻게든 흉내는 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나 재료를 전부 일일이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 당장 석판으로 쓰일 석회석 석재를 가져다 깔끔하게 면을 다듬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라비아고무나 기타 다른 재료들을 구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물자 조달 의뢰를 통해 여러 가지 물질들을 구해 그 중 가장 비슷한 성질을 지닌 것을 골라 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이틀 정도의 시간 동안 아틀리에에서 끙끙대던 형진은 마침내 결과물을 완성해 모두에게 공개했다.
“헉! 이건!”
“와아아아… 너무 예뻐요!”
다른 이들은 모두 아름답게 새겨진 여러 장의 포스터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지만, 제랄딘은 포스터에 나타나 있는 자신의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다.
“어때, 훌륭하지?”
실크스크린 같은 인쇄 기법이 아닌 이상 사진과 같은 정교한 형태의 결과물을 내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이른바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간략화의 과정을 거치고, 다시 아르누보 양식으로 장식된 포스터는 미술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아르누보 자체가 예쁜 것을 최대한 추구하는 양식이니 당연한 일이다.
첫 번째 포스터는 눈 내리는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여왕 같은 느낌의 산타복을 입은 제랄딘이 서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배경을 바꾸어 가며 패션쇼에 등장했던 의상들이 하나씩 묘사되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절묘하게 꼬리로 몸을 가린 제랄딘과 미엘이 눈보라 속에서 춤추는 모습으로 마무리 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포스터 하단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멀리 있는 분들에게 소식이나 선물을 급히 전하고 싶으신가요? 여신께 기원하세요. 희망과 생명께서 당신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겁니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작품들이 하나만 달랑 그려지고 만 것이 아니라, 똑같은 형태로 여러 장이 제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진이 아니긴 해도 데생 수준의 정밀한 묘사가 가능한 석판화의 특성상 제랄딘이나 미엘을 아는 사람이라면 딱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표현도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형진은 일부러 잎사귀나 나뭇가지로 얼굴 일부를 가리거나, 구도를 통해 눈 아래만 드러나게 한다던가 반대로 눈만 드러나게 하는 식으로 얼굴을 전부 드러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공작 같은 가족들은 이 포스터의 주인공이 제랄딘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로서는 아무래도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더 신비감을 느낄 수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것은 바로 크기. 거의 신전 기둥을 전부 뒤덮을 정도의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에 나타난 아름다운 모습이라면, 발걸음을 멈추고는 한번쯤 그것을 응시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대량 생산된 포스터라 걸작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어지간한 미술품에 못지 않은 작품인 셈이다.
“으으으… 설마 이걸 전부 신전에다 걸 생각이에요?”
“물론 그건 아니지.”
아니라는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랄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그럼요?”
형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 마치 준엄한 진리를 설파하는 듯한 모습으로 엄숙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이 여왕님 버전을 먼저 걸고, 시간이 지날 때마다 하나씩 바꿔 거는 거야. 그렇게 그림이 바뀌어 갈 때마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또한 다음에 걸릴 그림에 대해 기대하게 되겠지. 영광으로 알라고. 모르긴 해도 사람들은 제랄딘이나 미엘이 희망과 생명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
“…”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람들이 여신으로 추앙하는 건 그렇다 쳐도, 이런 모습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야 하니 제랄딘으로서는 그저 난감할 뿐이다.
물론 그림 자체에는 살색이 그리 많지 않다. 애초에 옷의 디자인 자체가 살색이 드러나는 것을 막으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에 입기로 되어 있었던 리본코스튬의 경우엔 예외였지만, 그나마도 미엘의 꼬리로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아, 참고로. 이 마지막 그림은 각 신전에 딱 한 부씩만 배부할 거야.”
“네? 그건 어째서요?”
“어째서긴. 일정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이용 횟수를 기록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려고.”
“헉!”
제랄딘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냥 그림을 붙여서 새로운 사업을 홍보하는 것만 생각했지, 그런 식으로 경품으로 이용할 생각까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탓이다.
“잠깐만요!”
그때 유아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왜?”
형진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유아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이렇게 외쳤다.
“그런 거라면 제가 그림의 주인공으로 나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래봬도 신녀인데.”
하지만 형진은 매트로놈처럼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쯧쯧.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지.”
“어째서요?”
“생각해봐. 희망과 생명의 신녀가 여신을 사칭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건…”
유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물론 포스터에 이 그림의 주인공이 여신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혼동을 일으키기엔 충분하고도 넘친다. 제랄딘이나 미엘이야 호구신과 관련이 없는 인물이니 그렇다 쳐도, 엄연히 희망과 생명을 모시는 신녀인 자신이 여신을 사칭한다면 그건 중대한 배교 행위로 인식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유아를 바라보며 형진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말이지. 비장의 무기는 아껴 뒀다가 중요한 순간에 써먹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아!”
그제서야 유아는 안색이 환하게 밝아지며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비장의 무기는 최후의 순간에 나와 줘야 맞죠.”
“납득했어?”
“네! 납득했어요!”
하지만 유아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비장의 무기라는 말 한 마디로 유아의 불만을 단숨에 잠재우는 형진의 말발에 혀를 내둘렀다.
“언니는… 참 착한 것 같아요.”
“응? 무슨 소리야. 카트린.”
“그냥… 그렇다고요.”
오죽하면 카트린마저 저런 소리를 할까.
어쨌거나 포스터가 완성되자 전 세계에 자리잡은 각 신전들은 제랄딘의 기획서대로 본격적인 프로모션에 들어갔다.
“어? 이게 뭐지?”
“예쁘다.”
“신전에서 뭔가 행사라도 하나.”
“그러게.”
멀리서 봐도 눈에 딱 들어오는 거대한 크기는 물론이고,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말이 어울릴 듯한 아름다운 그림에 사람들은 궁금증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사제님. 여기 걸린 그림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아래 적혀 있는 대로입니다. 여신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은혜를 베풀고자 결심하셨다는 뜻이지요.”
“아아…”
과연 호구신. 지금으로도 충분히 호구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건만, 여기서 또 무엇을 베풀어 준단 말인가.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본격적으로 은총이 베풀어지는 시기는 내년부터입니다. 하지만, 잠깐 동안 그 은총을 경험해 보는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가능하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집에 자녀가 몇이나 되십니까.”
“셋이 있습니다. 아직 모두 어린 아이들이지요.”
“잘 되었군요. 집의 위치와 아이들의 나이, 그리고 이름을 말씀해주시면, 올해의 마지막 날 그 아이들에게 여신께서 내려주신 선물이 도착할 것입니다.”
“오오!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여신께서는 거짓을 싫어하신 답니다.”
이 대화는 곧바로 신전 주위의 마을에 퍼졌고,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간을 내어 신전에 자신이 사는 곳과 아이들의 나이, 그리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대단해요! 이렇게 많은 신청이 들어오다니!”
흥분한 제랄딘의 모습을 바라보며 형진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은혜로운 일이다. 여신의 이름을 판 것 뿐인데 이렇게 많은 개인 정보가 들어오다니. 이 모든 정보가 또한 돈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과연 사람들은 알까. 아마도 모를 것이다. 지금 쇄도하는 신청자들의 수에 놀라워하는 제랄딘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