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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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광고
물론 들어봤을 리가 없다. 애초에 산타클로스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니.
“산… 뭐요?”
“산타걸. 바람직한 모습으로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에게도 꿈과 희망을 선사하는 아주 멋진 여성이지.”
뒤쪽의 얘기는 뭔가 그럴 듯한 느낌인데, 앞쪽의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내용이 자꾸만 걸린다. 그 와중에도 실키스들이 열심히 치수를 재는 것도 그렇고.
“치수는 다 쟀나!”
-넵! 요정왕님!
“좋아, 그럼 1번부터 시착을 시키도록.”
-넵! 자, 따라 오세요.
“어엇! 자, 잠깐…”
새카맣게 벌떼처럼 밀려드는 재봉 요정 실키스들의 압박에 제랄딘은 뭘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안쪽에 쳐놓은 장막 안으로 밀려들어가고 말았다.
미엘은 그런 제랄딘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자신과는 달리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진에게 물었다.
“진.”
“응?”
“정말로 그걸 다 입힐 생각이에요?”
“물론. 당연하지. 옷을 입으라고 만들지 그냥 구경하려고 만들겠어?”
“어휴.”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포옥 내쉬는 미엘의 모습에 형진은 씩 웃었다.
“미엘도 입어볼래?”
“저도요?”
“즐거움은 함께하면 배가 된다는 얘기가 있지.”
“고통은 맞들면 절반으로 줄어드는 거겠죠.”
“어느 쪽이든 제랄딘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요.”
“에이, 사람을 뭘로 보고.”
뭘로 보긴. 변태로 보지.
결국 미엘은 졌다는 표정으로 꼬리 중 하나를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꾸더니 제랄딘이 들어간 장막 안으로 들여보냈다.
“저기… 부르셨어요?”
뒤이어 유아가 카트린의 휠체어를 몰고 하마란과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크루그와 오귀스트 역시 그 뒤를 따랐다. 보통 아틀리에에 틀어박히면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은지라 오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집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부르니 이상하다 싶었는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 마침 잘 왔어. 이리 와서 앉아. 재미있는 걸 보여주려고 불렀거든.”
“재미있는 거요?”
카트린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하기야 매번 형진이 보여주는 것들 모두가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하고 기대감에 젖는 것이다.
“응. 혹시 패션쇼라고 들어봤어?”
“아뇨. 그게 뭐에요. 먹는 건가요?”
저쪽 세계에서는 일상적인 드립이지만, 이곳에서는 형진의 식구이기에 가능한 말이다. 하기야 뭔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면 지금까지는 새로운 요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큭큭. 어떻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단 입으로 먹는게 아니라 눈으로 음미하는 거라고나 할까.”
“눈으로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환하게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아틀리에의 창문을 모조리 커튼으로 가리고, 꼼꼼하게 빛이 들어오는 곳을 막더니 촛불을 하나씩 켜기 시작한다.
“우와아아…”
밝은 대낮에 실내를 캄캄하게 만들고 수없이 많은 촛불을 켜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자 카트린은 물론이고 유아 역시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하마란이나 크루그 같은 이들은 이게 뭔 돈지랄인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곳에서 촛불은 흔히 쓰이는 조명 도구이긴 해도 이렇게 낮에도 막 써댈 정도로 값싼 것 역시 아니기 때문이다.
“허허, 이건 꼭 극장 같군요.”
“오, 이곳에도 극장이 있습니까?”
“저도 모시던 분의 호위를 위해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을 뿐입니다. 고풍스런 연극은 아무래도 귀족들의 전유물이다보니.”
“그렇군요.”
딱히 연극 자체가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닌 건 미나의 유랑극단 같은 걸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마도 오귀스트가 말하는 것은 그런 길거리 악단이 아닌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연극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방이 어두워지고 다시 조명이 켜지고 나자, 이번에는 다시 한 무리의 요정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한 켠에 자리는 잡더니, 부드러운 멜로디의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아, 이거… 림의 침대에서 나오는 음악이잖아요.”
“용케 알아듣네. 카트린은 천재인가보다.”
“하하하.”
그렇게 카트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문득 장막이 열리며 한 사람이 쭈뼛쭈뼛 모습을 드러낸다.
“어, 제랄딘 언니다.”
“그러네요. 어? 저 옷은…”
제랄딘이 처음 입고 나온 옷은 전통적인 엠파이어 라인 드레스를 산타걸 복장으로 재해석한 옷차림이다. 어깨가 드러난 붉은 드레스를 기본으로 드레스 앞쪽은 무릎이 드러날 정도로 치켜 올리고 뒤쪽은 마치 대관식에 입는 외투처럼 길게 늘어뜨린 것이 포인트다. 드러난 어깨는 두건이 없는 케이프로 가렸지만, 살짝 드러난 가슴골과 종아리가 묘하게 섹시한 느낌이랄까.
“와, 정말 예뻐요.”
“그렇지?”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무리 봐도 산타걸보다는 산타퀸이 어울릴 만한 복장이지만, 처음부터 대놓고 노출도 높은 산타걸 복장을 입힐 수는 없는 일이라 나름 타협을 본 수준이랄까.
아니나 다를까. 제랄딘이 드러난 종아리가 신경 쓰이는지 쭈뼛거리며 그들의 앞을 지나쳐 다시 장막 안으로 들어가자, 이내 진정한 산타복에 가까운 복장을 한 미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헉…”
“미, 미엘님.”
미엘은 무릎이 살짝 드러나는 붉은 원피스에 흰 털이 달린 긴 빨간 장화를 신고 있었다. 역시나 어깨에는 짧은 케이프를 둘렀고, 소매도 길어서 맨살이 드러난 부위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목으로부터 윗가슴으로 이어지는 곳 약간과 무릎 위의 이른바 절대영역이라고 불리는 아주 작은 공간이 전부일 정도니까, 거의 살색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옷차림. 하지만 그렇게 노출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치마가 짧아서 그런지 너무 야하게 느껴진다.
“크흠. 저,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왜요? 이제 시작인데.”
“죄, 죄송합니다.”
시작이 이러니 문제가 아닌가. 현명한 오귀스트는 뒤에 이어질 상황을 재빨리 예견하고는 그렇게 허둥지둥 자리를 벗어났다. 쯧쯧. 풍류를 모르는 저 전직 기사 아저씨를 어쩌면 좋을까. 저래서야 언제 홀아비 신세를 면할지 걱정이다.
아무래도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당당하게 워킹을 선보였던 미엘과는 달리, 재빨리 요정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제랄딘은 차마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다시는 늦게까지 일 안 할 테니까…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안 돼. 어이, 진행요정들. 어서 내보내지 않고 뭐해?”
“자, 자, 자, 잠깐만!”
제랄딘은 장막을 붙잡고 안 나가려고 버텼지만, 벌떼처럼 몰려든 진행요정들에 의해 결국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세, 세상에.”
“이건 도대체…”
이번에는 크루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더니 조용히 아틀리에를 빠져 나간다. 저런 숙맥을 보았나. 한 나라의 왕자였다는 녀석이 저토록 숫기가 없어서야.
제랄딘이 입고 나온 것은 미엘의 것보다 파격적으로 치마 길이가 짧아져 있었다. 물론 다리를 다 드러낸 것은 아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에 역시나 절대영역을 조금 드러낸 망사 스타킹을 가터벨트로 고정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게다가 이번에는 케이프도 두르지 않아서 어깨가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너무 짧은 치마와 완전히 드러난 팔이 신경 쓰이는지 제랄딘은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진행요정들에게 억지로 이끌린 채 워킹을 마쳐야만 했다.
“그런데… 뭐하는 거에요, 오빠?”
“아, 이거?”
그제서야 알아챘는지 카트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카트린에게 계속 이 패션쇼라는 것을 보여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유아는 그 말을 듣고서야 형진의 손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건… 그림인가요?”
“맞아.”
형진은 번갈아 등장하는 제랄딘과 미엘의 모습을 엄청난 속도로 스케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사진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으니, 결국 광고용 포스터 같은 것도 전부 수작업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형진은 몇 백 장이 될지도 모르는 포스터를 일일이 손으로 그릴 생각 같은 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판화, 그 중에도 특히 아르누보 스타일의 석판화를 사용해서 포스터를 찍어낼 생각이었다. 아르누보 자체가 포스터 같은 응용미술에 널리 쓰인 경향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라고나 할까. 물론 가공 능력이 어느 정도 되지 않는다면 꿈도 꾸기 어려운 고난도의 작업이긴 하지만, 세공 장인을 찍은 형진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제랄딘이 장막 안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순록 분장을 한 토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꺅!”
“너무 귀여워요!”
근엄한 표정의 협객 토끼 녀석을 선두로 순록 분장의 토끼들이 행진을 마치자 이번에는 직접 선물을 배달할 요정들이 저마다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산타복을 입고는 허공에서 춤추며 지나간다. 노출도로만 따지면 요정들이 더 심해서 개중에는 레오타드 스타일이나 비키니 스타일의 산타복을 입은 녀석들도 제법 있었지만, 작고 귀여운 요정들인 탓에 별로 야하게 느껴지지는 않는지 유아와 카트린은 연신 자지러질 듯한 탄성을 지르느라 정신이 없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이게 뭔 짓인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하마란 같은 녀석도 있긴 했지만.
그렇게 요정들의 행진마저 끝나자, 문득 조금은 흥겹게 흘러가던 음악이 분위기 있게 잦아들기 시작한다.
그러자 이번에도 제랄딘이 장막으로 얼굴만 내민다. 잔뜩 울상이 된 표정으로.
“저기… 정말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것만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지, 제랄딘은 울먹이기까지 하면서 그렇게 애원했다. 물론 형진은 그것을 받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야 벌이 안 되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벌칙 아니겠어?”
“하지만…”
“언능 못 나와!”
“으…”
그때, 제랄딘의 뒤에서 미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가씨, 같이 나가요.”
“아…”
제랄딘은 그제서야 안색이 환해지더니 형진을 향해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당당하게 장막을 벗어났다.
“어?”
본래 이번에 제랄딘과 미엘이 입기로 되어 있었던 것은 바로 리본 스타일의 산타복이었다. 말이 옷이지 그냥 리본으로 중요한 부위를 선물 포장하듯 가린 그런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막상 형진의 눈에 비친 모습은 크고 풍성한 털 뭉치로 온몸이 완벽하게 가려진 제랄딘과 미엘의 모습이었다.
두고 볼 것도 없이 그것은 바로 미엘의 꼬리였다.
미엘은 형진의 아연한 표정을 즐기듯 바라보며 제랄딘과 마찬가지로 메롱을 해보이고는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워킹을 이어간다.
이게 아닌데. 이런 모습을 보고자 했던 것이 아닌데. 내가 만들고자 했던 이 패션쇼의 끝은 이런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크윽. 미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런 뻔뻔스러운! 네가 그러고도… 켁!”
울분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분노를 표출하려던 형진은 미엘이 목을 조르자 그대로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젠장! 이 백년 묵은 구미호 같으니! 이제는 말도 못하게 할 셈이냐!
그제서야 형진의 의도를 알아차린 유아와 카트린은 망연자실해 하는 변태 왕자의 모습을 보며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형진은 탄식했다. 정녕 이 중에 자신의 편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인가 하고. 혹시나 하며 하마란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뭘 보냐는 듯이 빤히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