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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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기르카
사실 어둡고 침침한 느낌의 냄새라고 표현은 했어도 이게 명확한 표현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애초에 사냥개의 코장식을 통해 확장된 후각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후각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복잡해서 간단하게 표현하기가 힘들다. 때문에 미엘이 단숨에 그림자곰이라고 단정 지은 것 자체가 형진으로서는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림자곰? 어떤 녀석이지?”
형진의 물음에 미엘은 이렇게 대답했다.
“전신의 털이 칠흑처럼 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주로 숲 속에 사는데, 굉장히 영리하고 몸집도 커서 사냥하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어요.”
“그럼, 숲에서 벌어지는 현상과의 관련성은?”
“글쎄요. 영악하고 힘이 센 동물이긴 해도 특별한 능력이 있지는 않은 걸로 알아요. 혼비백산해서 도망친다는 말이 있긴 해도 그건 미쳐 버린다는 말과는 다른 의미일 테니까요.”
“하긴.”
이번 의뢰의 목표와는 관계가 없을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냥감으로서의 기대감은 충분하다. 인스턴트 킬로 사냥했을 때 어떤 아이템이 나올지도 궁금하고, 동굴곰처럼 맛이 있을지도 궁금하다. 어떻게 보면 긴장감 없는 반응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형진은 물론이고 여기에 미엘까지 가세한 상황에서는 지나치게 긴장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완전히 마음 푹 놓고 방심하거나 하는 것도 아닌 이상은.
형진은 천천히 발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숲을 탐색하는 일이라 해도 딱히 다른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닌지라 곰의 자취를 추적하면서 숲 안의 상황 역시 살피는 식이다.
그렇게 조금 더 숲 안으로 들어가자 기묘한 지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건… 늪인가.”
늪은 늪인데 물컹거리는 젤리 같은 느낌만 전해질 뿐이다. 가만히 서 있으면 점차로 빠져 들지만 조금 빠르게 움직이면 출렁거리기는 해도 단단한 지면을 밟는 것처럼 빠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그런 느낌의 기이한 지면이다.
“꼭 진이 만든 물침대 같아요.”
“듣고 보니 또 그렇군.”
뭔가 신기해서 이리저리 탐색을 해봤지만 별 다른 문제는 없어 보인다. 발자국은 이 기이한 늪지 사이의 안전지대를 징검다리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식으로 남아 있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자신의 흔적을 감출 줄도 아는 걸 보면 확실히 영리하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일반적인 사냥꾼이라면 기이한 늪지의 모습에 압도되어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했겠지만, 불행히도 형진은 그런 일반적인 사냥꾼과는 거리가 먼 존재다.
“꽉 잡아.”
“네.”
환영의 반딧불을 사용해도 되지만, 형진은 늪지 사이의 안전지대에 드문드문 자라난 나무들을 이용해 이곳을 건너기로 마음먹었다.
촤라라락!
곧바로 손목에서 갈고리가 뻗어나가 높이 솟은 나무의 두꺼운 나뭇가지를 움켜잡는다. 그런 식으로 공중 곡예를 하듯 줄을 타고 몇 번 움직이자 넓은 늪지를 단숨에 돌파할 수 있었다.
“읏차.”
미엘까지 안은 채 그런 곡예를 펼쳐 보인 형진은 지면에 내려앉기가 무섭게 다시 흔적을 살폈다.
“응?”
그런데 내려서기가 무섭게 그림자곰 외의 다른 냄새가 느껴진다. 그것도 굉장히 강렬하게.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나무 둥치의 작은 굴속에서 뭔가가 머리를 쏙 내민다. 머리 위로 솟은 한 쌍의 긴 귀. 볼 것도 없이 토끼다.
역시나 주위의 숲처럼 검은 빛의 털로 뒤덮인 녀석은 눈을 마주친 순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형진의 눈앞에 이런 메시지가 나타난다.
[현자 토끼가 당신이 지닌 ‘미스틱 링’의 권위를 인정하여 수하가 되고자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현자 토끼는 또 뭐야.”
“글쎄요. 쿡.”
그림자곰을 추적하다가 뜬금없이 숲에 살던 토끼와 조우를 한 모양새가 웃겼던 모양인지 미엘이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 이놈의 토끼는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그림자곰의 자취는 현자 토끼가 사는 동굴 어귀를 잠시 어슬렁거리다가 다른 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토끼가 강해도 역시 이런 덩치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을까. 아니면 귀찮아서 기웃거리든 말든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형진으로서는 후자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리칸 근처에서는 볼 수 없었던 녀석이라 일단 수락을 하자, 녀석은 한 줄기 빛으로 변해 미스틱 링 안에 자리 잡았다.
[‘현자 토끼’가 ‘미스틱 링’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신이 부른다면, 이 현명하고 자존심 높은 존재는 언제든 부름에 응해 당신에게 지혜를 빌려줄 것입니다!]그런가보다 하고 바로 움직이려던 형진은 이전에 다른 토끼들을 받아들였을 때와는 묘하게 메시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왜요.”
“이 녀석, 뭔가 특이한 놈인 것 같아.”
“그래요?”
애초에 이 세계의 토끼라는 놈 자체가 다 특이한데 거기서 더 특이하면 도대체 뭘까 싶었던지 미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나와 봐.”
형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현자 토끼가 반지로부터 빠져 나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지혜를 빌려준다는 것이 무슨 뜻이야?”
설마 인간의 말을 하는 건가 싶어 그렇게 물어 보자, 문득 형진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용오름 (미스틱링 필요->조건만족)
-회축
-나래차기
-정권지르기
-난타
-속성 발현: 불
-속성…
“헐?”
예상치 못한 메시지의 향연에 형진은 뒤집어지고 말았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그런 반응에 미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고, 형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녀석… 스킬 마스터였어.”
“네?”
이번에는 미엘이 놀랄 차례다. 스킬 마스터라니. 토끼 주제에?
“준 종족 취급이라더니 스킬 마스터까지 존재할 줄이야. 헐.”
“정말이에요? 무슨 스킬을 가르쳐 주는데요?”
“토끼들이 쓰는 스킬은 거의 다 있는 것 같아. 일전에 잡았던 필드 보스 녀석이 썼던 기술도 포함해서.”
“우와아아…”
형진이 혼자 잡기는 했어도 미스틱은 필드보스 다운 강렬한 힘을 보여주었다. 특히나 용오름이나 폭렬차기 같은 기술은 선딜이나 후딜도 거의 없는 주제에 터무니없는 위력을 보여서 지켜보던 미엘조차 화들짝 놀랐었다.
역시나 미스틱이 쓰던 기술은 습득 조건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미스틱링의 보유라서 형진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이다. 즉, 그럴 생각만 있다면 토끼들이 쓰는 스킬들 대부분을 바로 배울 수 있다는 얘기다.
“일단 하나 바로 배워볼까.”
인스턴트 킬과 라이언하트라는 무시무시한 조합이 있어서 사실 형진에게 별도의 전투 스킬이 필요하진 않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 그냥 제압만 할 목적이라면 이 두 가지 조합은 너무 강력해서 오히려 불편한 경우가 종종 생긴다. 지금까지는 상대의 스킬을 무력화시켜서 경직 상태를 유도한 다음 항복을 유도하는 식이었는데, 이것도 어디까지나 말이 통하는 상대에게나 먹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스킬들은 멋지다!
용오름이나 폭렬차기 같은 경우는 발동하는 순간의 위력이나 효과 등이 상당히 멋지고, 회축 같은 경우는 그런 효과까지는 없어도 동작 자체가 상당히 호쾌하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협객 토끼 녀석만 봐도 얼마나 대단한가.
형진은 우선 용오름과 폭렬차기를 배워보았다.
[축하합니다! 스킬 ‘용오름’ lv.0을 습득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스킬 ‘폭렬차기’ lv.0을 습득했습니다!]“엽!”
배우자마자 한 손을 휘둘러 용오름을 써보았다. 하지만 이게 웬 걸. 스킬이 제대로 발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진 것은 작은 산들바람 정도에 불과했다.
“더울 때 부채 대신 쓰면 좋겠네요.”
“큭. 두고 봐. 그렇게 놀리는 것도 지금 뿐이니까.”
“기대할게요.”
투덜대는 형진의 모습에 미엘은 웃으며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쓸데없는 곳에서 자존심을 세우는 그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 탓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것을 얻은 형진은 다시 현자 토끼를 반지 안으로 들여보내고는 다시 그림자곰의 추적을 이어갔다.
현자 토끼를 발견한 형진은 혹시 다른 동물들도 있지 않을까 해서 주위를 더 면민하게 살폈지만, 눈에 띄는 것은 다람쥐 정도가 고작이었다. 아무래도 현자 토끼와 그림자곰의 영역 싸움에 다른 동물은 견디지 못하고 밀려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마침내 그림자곰의 자취가 한층 강렬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놈의 영역 중심부에 도달한 것이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나무 위도 살피세요. 덩치에 비해 나무도 잘 탄다고 들었어요.”
“그래?”
미엘의 충고에 귀기울이며 머리 위쪽의 커다란 나무들도 잘 살피며 추적을 이어가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침내 형진은 커다란 고목 안에서 웅크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칠흑 같은 털가죽을 지닌 거대한 생명체를 발견했다.
[정말 크네.] [그러게요.]얼핏 보기에도 이전에 봤던 동굴곰에 떨어지지 않는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다. 확실히 저런 놈이 정면에서 돌진해 오기라도 하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덤프트럭이 달려드는 느낌을 받으며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못한 채 굳어버릴 것이다.
굳이 복잡하게 갈 것 없이 은신과 잠행으로 손쉽게 해결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갑자기 잘 자고 있던 그림자곰이 번쩍 눈을 뜨더니 어슬렁거리며 나무 둥치에서 나와 크게 포효한다.
“어라? 이 거리에서?”
“이상하네요. 후각이 그렇게 좋은 건가?”
물론 그림자곰의 후각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상당히 뛰어난 편이긴 하다. 아니, 곰이라는 동물 자체가 원래 후각이 뛰어나다. 하지만 놈이 두 사람을 쉽게 알아챈 것은, 바로 그들의 몸에서 풍겨나는 향긋한 냄새 때문이었다.
미처 그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부장 프리이가 처음 권했던 황금 이슬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며 그들의 존재감을 사방에 퍼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주위에 현자 토끼 외에 다른 동물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은 여기에 있었다.
형진이 비록 사냥개의 코장식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원래 자기 냄새는 자기가 맡기 어려운 법. 이것은 아무리 강력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더라도 극복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나마도 아이템을 사용하기 전에 이미 문제의 냄새에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져서 둔감해진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프리이가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둘에게 그것을 권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선의로 차나 술 대신 내준 것 뿐이고, 프리이 본인도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의야 어찌 되었든 황금 이슬의 약효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당분간 인간 방향제 역할을 해야만 하고, 그게 하필 그림자곰을 발견한 시점과 맞물렸을 뿐이다.
쿠워어어어어!
그림자곰은 몸을 번쩍 일으키더니 이내 쿵쾅거리며 형진에게 곧장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이놈, 영리하다고 그러지 않았어?”
“글쎄요. 저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영리한 맹수는커녕, 뭔가에 눈이 돌아가버린 것처럼 맹목적으로 돌진해 오는 분위기라 형진과 미엘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 역시 황금 이슬의 부작용 때문이다. 눈앞에서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존재들이 오락가락하니, 그렇지 않아도 겨울이라 조금 빈곤한 식생활을 이어가던 그림자곰의 눈이 뒤집혀 버린 것이다.
“이크!”
형진은 갈고리를 날려 일단 나무 위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미엘은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작은 여우의 모습으로 바뀌어 목도리처럼 그의 목을 감싼다.
제법 크고 높은 나뭇가지 위로 형진이 올라가 버리자, 그림자곰은 나무줄기에 발톱을 박아 넣으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것만은 미엘의 말대로였다. 그 커다란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놈은 나무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놈의 패착이었다. 그렇게 가장 강력한 앞발이 나무를 오르는 놈의 체중을 감당하느라 묶여 있는 틈을 타서 형진이 훌쩍 몸을 날린 것이다.
한 바퀴 몸을 회전하며 떨어져 내리던 형진은 그림자곰이 그런 자신을 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 환영의 반딧불로 훅 하고 모습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놈의 머리 뒤쪽으로 이동해서 단숨에 놈의 숨골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원래 곰은 어지간한 수단으로는 한 방에 죽지 않는다. 이 세계의 곰은 어떤지 모르지만, 지구의 곰만 하더라도 총알 한 방으로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동물이라도 인스턴트 킬의 위력 앞에서는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