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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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합작
의뢰를 완료하자 형진과 미엘에게 보상이 분배되었다. 다만 이상 현상의 원인을 제거한 것에 대한 추가보상은 기르카의 지부장인 프리이에게 직접 수령하라고 메시지가 나온다.
“일단 기르카에 돌아가 봐야겠네. 집에 돌아가기 전에 신전도 들러볼 겸.”
“편한 대로 하세요.”
형진은 곧바로 요정의 문을 열고 요정의 나라로 일단 귀환한 다음, 기르카 근처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도착하기가 무섭게 성벽을 넘어 들어가 지부장의 상점으로 향했다.
“와, 벌써 해결하신 건가요? 정말 대단하네요. 역시 종결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프리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답하고는 보상을 챙겨 오겠다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하기야 미엘이 없었더라면 일일이 그 넓은 숲을 헤매야 했을 테니 쉽게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종결자가 어느 정도의 계급이야?”
슬며시 미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최상위의 3계급 중 하나라고 알고 있어요. 잠들게 하는 자, 침묵케 하는 자, 종결짓는 자. 이렇게 세 등급인데, 종결자는 그 중에서 종결짓는 자를 줄여 부르는 이름이에요.”
“그럼 잠들게 하는 자가 가장 높은 건가?”
“아뇨. 그 위에 한 등급이 더 있다고는 하는데, 알려진 바가 없어요. 참고로 라야의 총괄 지부장님의 등급도 침묵케 하는 자거든요. 현재로서는 그 분이 가장 높은 등급을 가지고 있고, 최상위의 3등급도 그래서 알려진 거에요.”
설마 대리자 같은 등급이 공포와 죽음에도 존재하는 건가.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직 상급 성도에 머물고 있는 그로서는 먼 얘기였기 때문에 그냥 그런 게 있다고만 알아두기로 했다. 사실 지부장처럼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 역시 추종자의 등급이라기보다는 직위에 가까운 신분이라 함부로 추측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던 프리이는 작은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설마 이렇게 빨리 해결하실지 몰라서 가지고 있는 것중에 아무거나 골라서 보상을 걸었거든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금전적인 면을 생각해서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드시지 않는다면 이곳 상점에서 원하는 것으로 바꿔 가셔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리이는 다소 안도하는 표정을 짓더니 상자를 열어서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상자 안에는 은은하게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구슬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일그러진 시간의 돌입니다. 연금술을 시도하다가 실패할 경우 낮은 확률로 나오는 일종의 부산물인데요. 요리나 연금 같은 것의 경우, 시간을 많이 들여 숙성해야 하는 경우가 있죠? 그런 경우에 이것을 넣어두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순간 형진의 눈이 번쩍 빛을 발한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 그렇습니다.”
“효과는 어느 정도입니까. 얼마나 숙성 기간을 단축할 수 있죠?”
“재료의 양과 넣는 양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많이 넣을수록 효과가 늘어나는데… 정확한 건 여기 도표를…”
갑작스럽게 돌변한 형진의 모습에 프리이는 겁먹은 표정이 되었고, 미엘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형진은 빠르게 도표를 읽어 내렸다. 그리고 크게 놀랐다. 이 돌을 잘만 사용하면, 발효 등으로 인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과정을 최대 백분의 일까지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 했기 때문이다.
사실 장인의 능력으로 커버하고는 있었지만, 특별한 몇 가지 소스의 경우에는 오랜 기간 숙성을 거쳐야만 그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발사믹 식초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데, 제대로 된 발사믹 식초는 최소 숙성 기간만 12년은 걸리는 것으로 유명하고, 최고급품의 경우는 25년이나 걸린다. 이쯤 되면 거의 아이가 자라나 한 사람의 성인이 될 정도의 기나긴 기간이다.
물론 소믈리에처럼 혀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최고급품과 흔히 구할 수 있는 저가형의 제품을 맛으로 구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300개월 이상 숙성해야 맛볼 수 있는 최고급 발사믹 식초 같은 걸 고작 3개월의 숙성만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어떨까.
시간은 금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금보다 더 귀중한 것이 시간이다. 시간은 금이 아무리 많아도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돌은 시간을 돈 주고 사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그야말로 형진에게는 그 어떤 보물보다도 더 대단한 가치를 지닌 물건인 셈이다.
연금술에 이런 숨겨진 비기가 있었다니! 엘리시온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라 더욱 더 가치가 있었다. 아니다. 원래 존재했는데 형진이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성공했을 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실패시 발생하는 부산물 가운데 하나라면, 뭐든지 도핑으로 잔뜩 성공률을 높인 다음에야 작업을 시작하는 그의 버릇 때문에라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거 얼마나 가지고 계십니까?”
“네?”
“얼마가 되든 다 사겠습니다. 전부 사겠습니다. 몽땅 가지고 오십시오. 아니다. 우리 아예 계약을 맺읍시다. 이걸 저에게 매달 일정량 공급해 주신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뢰 시스템을 이용한다면 공헌도도 드릴 수 있을 테니 그쪽이 낫겠군요. 얼마를 원하십니까. 참고로 얼마를 원하시든 저는 다 맞춰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그, 그게…”
프리이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실패시 나오는 부산물을 추가 보상으로 걸었던 탓에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휘몰아치듯이 작정하고 달려드는 형진의 모습에 놀라고 겁을 먹어 버린 것이다. 물론 집행자의 등급이나 직위를 놓고 봐도 프리이가 더 높은 것이 사실. 그러나 아무래도 기가 약하다보니 눈빛에 광기마저 담긴 채 그렇게 말을 쏟아내는 형진의 기세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연금으로 이런 걸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형진이 직접 제작을 시도해 봐도 좋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여러 가지 수단으로 손재주나 집중력 같은 능력치를 너무 많이 올린 상태였고, 그것은 이제 와서 일그러진 시간의 돌을 얻기 위해 연금을 시작한다 한들 실패해서 그것을 얻을 확률이 굉장히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왕 그렇다면, 확실하게 제작이 가능한 자에게 납품을 받는 것이 몇 배는 이득일 수밖에 없다.
물론 프리이도 언젠가 연금술의 경지가 높아지면 실패 확률이 줄어서 그만큼 일그러진 시간의 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 때의 일. 아니, 그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얻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뽑아 먹는 것이 이득이다.
결국 형진은 거의 반강제로 강탈하듯이 프리이가 가지고 있던 일그러진 시간의 돌을 모조리 사들이고, 추가적인 납품 계약도 맺었다.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계약이었습니다. 우리 앞으로 돈독하게 지내봅시다. 아하하하!”
“그게… 저야말로…”
버는 족족 연금술에 들이붓느라 항상 쪼들리는 생활을 하고 있던 프리이로서도 나쁘지 않은 계약이었다. 휘몰아치듯 쏟아내는 형진의 말과 기세에 어안이 벙벙하다는 것이 문제일 뿐.
“이래서 사람은 넓은 세상에 나가봐야 한다는 건가봐. 이런 횡재를 하다니.”
“그렇게 좋아요?”
“물론. 기대해. 조금만 기다리면 미칠듯한 특제 요리의 향연을 보여줄 테니까.”
“힉!”
특제 요리라는 말에 미엘은 기겁하고 말았다. 그렇다. 재료의 완성도가 올라가면 그것을 통해 만들어진 요리의 완성도 역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일.
따지고 보면 더 이상 숙련도를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경지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특제 요리가 나오는 확률이 적었던 것은 바로 이런 재료의 완성도 부족을 실력으로 근근히 메우고 있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 그런 재료의 불완전함을 극적으로 타개할 수단이 생겼으니, 그야말로 날개를 단 격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아, 그러고 보니 미엘은 특제 요리 못 먹었었지.”
“그게… 지금은 괜찮아요. 사실 특제 요리를 못 먹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거든요.”
“그래? 어떤 이유였는데.”
“그걸 먹으면 저 자신을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군.”
그제서야 형진은 과거 미엘이 어째서 그렇게 특제 요리라고 하면 기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솔직히 자신의 근처에만 있어도 고문이나 다름없었을 텐데, 참 용케도 견뎌냈구나 싶을 정도다.
“그래도… 솔직히 좀 겁나네요. 그런 특제 요리가 막 쏟아져 나온다고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지 작은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이 귀엽다.
“이젠 여러모로 상관없잖아. 설령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한들, 이렇게 해소할 대상이 옆에 딱 있으니.”
가슴을 쭉 펴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하자, 미엘은 핀잔을 주었다.
“피, 제대로 감당도 못하면서.”
“크흠. 괜찮아. 이젠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헤에, 정말요?”
“물론이지.”
“그렇게 자신만만하다면, 오늘 당장 시험해 볼까요?”
“그, 그건 좀.”
시험해 보자는 말에 형진은 대번에 깨갱하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예전에 주먹 좀 썼다 하는 아저씨들이 술 먹고 풀어놓는 주정도 아니고. 11대 1, 아니 이제는 12대 1이구나. 아무튼 그런 무지막지한 혈투를 다시 한 번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형진으로서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말해서 반칙 아닌가. 하나도 만만치 않은 판에 인해전술이라니. 이건 절대로 자신이 약해서가 아니다. 정말이다. 젠장. 이게 무슨 철인 3종 경기도 아니고.
얘기가 어째 옆으로 좀 새기는 했지만, 형진과 미엘은 그렇게 노닥거리며 기르카의 신전을 찾아 들어갔다.
-어?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던 요정 하나가 그런 둘을 발견하고는 얼른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한다.
“네가… 램이었던가?”
-아뇨. 롬인데요.
차이나 드레스 풍의 산타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요정의 모습에 일전에 상을 탄 메모리 비슷한 이름의 요정을 떠올리고 그렇게 말했지만,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
“어때. 일은 할 만해?”
-네. 아직 그다지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할만 해요. 사제님들도 친절하시고.
“이곳의 최고 사제를 만나고 싶은데 안내해 주겠어?”
-물론이죠. 자, 따라오세요.
형진은 요정 롬의 안내를 받아 기르카 신전의 최고 사제와 만났다. 이미 최고 사제 회합에서 안면을 익힌 적이 있는지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불편한 점이 없는지 묻는 정도로 만남은 간단하게 끝났다.
“다 큰 여자들이 함부로 나다니지 못하는 곳이라길래 걱정했는데 큰 문제는 없나 보군.”
“다 큰 여자 이전에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 자체가 함부로 나다니기 어려우니까요.”
“하긴.”
호구 이미지는 그렇다 쳐도 들이대면 다 받아준다는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결을 봐야할 텐데. 이것만큼은 형진으로서도 좀처럼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하기야 벌써 오랜 시간 동안 전해져 온 인식을 하루 아침에 바꿔버리는 것이 쉽겠나 싶긴 하지만.
어쨌든 기르카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조금 늦게 그리칸의 집으로 돌아와서 주방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 뭐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유아였다. 물론 림을 비롯한 다른 요정들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잘 오셨어요. 아무래도 늦어지시는 것 같아서 먼저 식사 준비를 하던 참이에요. 마침 다 만들어 졌으니 드세요.”
“어디.”
겉보기는 봉골레 파스타를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보통 모시조개나 바지락 같은 조개류를 메인으로 삼는 봉골레와는 달리 새우와 관자 같은 부재료가 듬뿍 들어갔다는 정도. 재료가 다양한 만큼 볼륨감 있는 맛이 일품이지만, 그만큼 손질이나 요리에 있어 번거롭지 않을까 싶다.
형진 본인도 종종 잊어버리는 일이긴 하지만, 유아 역시 숙련 단계의 요리사인지라 제법 그럴 듯한 맛이 난다. 이제껏 식사 시간이면 한쪽 자리를 차지한 채 언제 자신에게 요리가 오나 하고 기다리기만 하던 녀석인데 늦는다고 미리 식사 준비를 해놓고 기다리다니, 요리의 맛있고 없고를 떠나서 새삼 감개무량한 느낌이다.
============================ 작품 후기 ============================
작가: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치킨스튜님 덧글보다는 Guaaaaak님의 ‘망사구현’이라는 말에 움찔하고 놀랐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