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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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합작
유아가 차려주는 식사를 먹고 난 형진은 일단 담가 둔 장과 포도주에 일그러진 시간의 돌을 투입하는 일부터 마무리 지었다. 일단 효과를 확인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지금까지 감히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여러 가지 발효 식품들에 손을 댈 생각이다. 간장이나 된장 같은 소스부터 시작해서, 식초와 요리용 술, 치즈에 이르기까지 시간이라는 문제만 해결되면 가능한 건 얼마든지 있다.
그렇게 일그러진 시간의 돌을 사용하고 난 형진은 오늘 잡은 그림자곰의 도축을 시작했다. 가죽을 벗겨내고 내장을 제거한 다음 부위 별로 살을 발라내는 일만으로도 꽤 시간이 걸린 탓에 결국 자정이 다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피곤했나 보네.”
“그러게요.”
방으로 돌아오자 유아와 제랄딘이 서로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살짝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제랄딘의 긴장을 풀어준다고 한 잔 두 잔 마시다가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무엄한 메이드들이로군. 나중에 혼을 내줘야겠어.”
“쿡쿡.”
형진과 미엘은 간단하게 몸을 씻고는 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깨워서 혼을 내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오늘은 그냥 봐주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시 다음 날.
“오늘은 저도 같이 갈게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아가 대뜸 같이 가겠다고 나선다. 전에 줬던 세공 갑옷까지 입고 나온 품이 거절은 용납 않겠다는 듯한 기세마저 느껴질 정도.
아무래도 형진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적어지니 알게 모르게 불안해진 모양이다. 하루 떨어져 있고 보니 서방님의 소중함을 깨닫기라도 한 걸까. 그러고 보면 어제 미리 저녁을 해놓고 기다리던 것도 그런 이유인가 싶기도 하고.
“상관은 없지만, 아이들 가르친다고 하지 않았어?”
“괜찮아요. 하루 이틀 정도는.”
“그렇다면야 상관은 없지만.”
각 지역의 신전을 찾아가는 일에 유아가 참여하자, 혼자만 남아서 일해야 하는 제랄딘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밀린 일이 많은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빠져야만 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도록 할게요. 이번 주만 지나면 어떻게든 체계는 잡힐 것 같으니까.”
나름 신혼인데 잠시라고는 해도 이렇게 자신만 떨어져 있는 것은 역시 아쉬웠던 모양이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또 벌 받고 싶지 않으면.”
“설마… 또 패션쇼인지 뭔지를 시키려는 건가요?”
“왜? 마음이 막 설레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어쨌거나 그렇게 투닥거리며 출발한 형진과 유아, 그리고 미엘은 기르카까지 요정의 문으로 이동한 다음, 그곳으로부터 다시 북서쪽으로 출발했다.
거대한 흑요호 모습의 미엘이 창공으로 날아오르자, 유아가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어디에 가는 건가요?”
“헤트라. 델 레 라그리아의 최북단에 있는 도시이면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이기도 한 곳.”
“아하.”
“알고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물론 아니에요.”
“끙.”
어제는 소녀 모습으로 어리광에 열중했던 미엘이지만, 오늘은 목도리 모습을 한 채 유아가 형진과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래쪽으로 스쳐지나가는 눈 덮인 산이나 숲의 풍경에 탄성을 지르던 유아였지만, 이내 같은 풍경만 계속되자 지루한지 형진의 팔을 꼭 안은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뭐랄까. 기차 타고 수학여행 간다고 들떠 있다가 채 십분도 버티지 못하고 잠들어 버리는 여고생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뭐 유아답기는 하다만.
약 먹은 닭 마냥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귀여워서 살짝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졸린 와중에도 배시시 웃으며 품으로 파고든다. 어쩐지 남자로서 가슴 속에서 불끈 하고 뭔가가 치솟는 모습. 늑대로서의 본성이 되살아나 이 순진한 어린 양을 어떻게 먹어치울까 고민할 즈음, 그 메시지가 나타났다.
[긴급 사항! 헤트라 지부 인근에 페스타 발생!] [현 시간부로 헤트라 지부에 속한 집행자들 가운데 특별한 사유가 없는 자는, 지금 즉시 집결지로 모여 지부장에게 신고할 것!] [페스타 상황을 해결하는데 공헌한 집행자에게는 특별한 보상이 지급됩니다.]“끙.”
페스타. 일명 망자의 제전. 온전히 죽음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 다시 일어나는 상황을 말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언데드 출몰. 공포와 죽음의 뜻을 따르는 집행자들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거참 절묘하구만. 하필 이럴 때 페스타가 터지다니. 꼭 누군가 하늘 위에서 지켜보다가 요놈 잘 걸렸다 하면서 발동한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그런 형진의 내심을 알아챈 것인지 미엘이 메시지로 말해 주었다.
[헤트라 근처는 예전부터 페스타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곳으로 유명해요. 그래서 집행자들 가운데 페스타만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죠.] [그 정도야?] [네. 아시다시피 페스타 보상이 굉장히 후하잖아요.] [하긴.]후하다 뿐인가. 황금 상자 하나 열 때마다 가슴까지 뛸 정도다. 다른 건 몰라도 고급 액세서리 상자는 황금 상자 아니면 보기조차 힘든 물건이다.
[다만 대륙 최북단의 도시답게 먹을거리라든가 편의 시설 같은 것이 굉장히 부족해서 오래 있지는 못해요.] [그런 문제가 있었군.]하긴 뭐가 되었든 결국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헤트라는 페스타 보상을 노리는 집행자들이 바글거리는 도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하나. 쓸 데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어떻게 하실래요?] [페스타? 우리가 참가해도 되는 건가? 다른 지부 소속인데.]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것 자체가 참가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페스타는 집행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니까요.] [하긴. 그럼 문제는 이 녀석인데.]그렇다. 오늘은 어제와는 달리 유아가 함께 동행하고 있다. 물론 어제처럼 헤트라의 지부장에게 임무를 부여 받을 가능성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하필 그 임무가 망자의 제전인 페스타일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일단 가보자. 정 안 된다 그러면 일단 돌려보냈다가 끝나고 다시 데려 오면 되지.]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요정의 문이라는 사기적인 이동 수단이 있는 지금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미엘은 하늘위로 나타난 표식을 향해 빠르게 가속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흑요호의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마구 드러내는 건 좀 껄끄러운 일이라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서 일단 유아부터 깨웠다.
“웅… 다 왔어요?”
“대충 근처에 왔어. 그런데, 급한 임무가 내려와서 우선 그곳부터 가봐야 할 것 같아.”
“임무요?”
“그래.”
살짝 잠이 덜 깨서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던 유아는 형진이 슬쩍 하늘을 가리켜 보이자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설마… 희망과 생명께서?”
“아니, 공포와 죽음께서.”
“아…”
“우리 쪽은 이런 저런 일이 좀 많은 편이거든.”
“그렇군요.”
거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못해 이제는 아예 형진이라는 대리자에게 교단의 일까지 전부 맡겨 버리고 잠적해 버린 것이 희망과 생명임을 감안하면, 공포와 죽음이 이런 식으로 임무를 내려주거나 하는 일 자체가 유아에게는 꽤 신기한 일이었다.
정말 희망과 생명은 반성해야 한다. 이렇게 신실한 신도가 있는데 그렇게 딴짓만 하고 돌아다녀서야 쓰겠는가. 하기야 형진이 일부러 멍석을 깔아줘서 더욱더 신경을 안쓰고 돌아다니게 되었으니 뭐라 할 처지는 아니다만.
“그럼, 전 일단 돌아가 있어야 하나요?”
“가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아. 그러니 일단 이것부터 착용해.”
“네.”
형진은 유아에게 눈가리개와 어제 새로 얻은 중절모를 씌웠다. 여분의 장비긴 해도 모두 희귀급의 아이템이고 신분을 감추기에는 꽤 적절한 물건들이다. 물론 지금까지 형진이 겪었던 집행자들은 모두 신사와 숙녀들 뿐이었지만, 모든 집행자들이 그렇다는 보장은 없으니 괜히 희망과 생명의 사제임을 대놓고 드러낼 필요는 없는 일이다. 마침 유아는 평소 입고 다니던 메이드복 대신 세공 갑옷을 입고 있으니 적당히 신분을 숨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미엘.”
“네.”
“혹시 모르니 꼬리 하나만 유아에게 달아놔.”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미엘은 곧바로 꼬리 하나를 떼어 유아의 목에 감아주었다. 얼핏 보기엔 목도리처럼 보이겠지만, 만약의 상황이 발생하면 그것으로부터 분신이 뛰쳐나와 유아를 보호하게 될 것이다.
“고마워요. 미엘님.”
“별 말씀을.”
미엘은 다시 분신 하나를 더 만들어 냈다. 어제의 소녀 모습과는 달리 활달한 아가씨 모습이다. 물론 본신은 여전히 형진의 목을 휘감은 채 목도리 행세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준비 끝. 그럼 가볼까요?”
“이거 다른 집행자들이 보고 부러워하겠는데. 이런 미녀들을 양 옆에 끼고 나타난다고.”
“킥.”
형진은 토글을 실행해 장비를 착용하고는 유아를 안아 든 채 미엘과 함께 이동 스킬을 펼쳐 집결지로 향했다. 화살표가 아래를 콕콕 찌르는 듯한 모습으로 표시된 장소에 도착했지만, 너무 일찍 왔는지 다른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기다리자, 하늘로부터 묵직한 느낌과 함께 거구의 사나이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사람이라기보다는 골렘 같은 인공적인 생명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체구를 지닌 그 남자는, 평소 못 보던 사람들이 집결지에 먼저 와 있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엘의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손바닥을 주먹으로 툭 내리치며 외쳤다.
“이게 누구야. 미엘님 아니십니까.”
“오랜 만이네요. 할 데 마그.”
“할이라고 부르라니까 그러시는군. 설마 헤트라로 돌아온 겁니까?”
전부터 알던 사이인지 제법 편하게 대화를 나눈다. 다만 미엘의 나이를 알고 있는지 그 와중에도 말은 정중하게 높이는 느낌이다.
“아뇨. 그러는 할이야 말로 설마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헤트라에 있었던 거에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냥 돈이 좀 떨어져서 와봤을 뿐입니다. 그러는 미엘님은?”
“잠깐 지나던 중에 페스타 메시지를 보고 들렀지요.”
“그랬군요.”
할이라는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슬그머니 형진과 유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쪽 분들은…”
“이쪽은 진, 그리고 이쪽은 유아님. 제 동행이에요.”
“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전 할 데 마그라고 합니다. 할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반갑습니다. 진입니다.”
“유아에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있자니, 다시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할은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더니, 이내 두건을 쓴 날렵한 인상의 여성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하마란 만큼은 아니지만 꽤 장신에 군더더기 없는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지부장. 늦었네.”
할이 대뜸 그렇게 말을 걸자, 두건녀는 바로 발끈하며 말을 받는다.
“누구 허락 받고 말을 막 놓는 거죠?”
“오빠가 동생한테 말을 놓는데 뭔가 문제라도?”
“사적으로는 그래도 여기서는 제가 직위가 높거든요? 공사 구분 정도는 해주시지 않겠어요? 오라버니.”
“별로 내키질 않는데.”
“끙.”
놀랍게도 할이라는 이 거구의 남자와 두건 쓴 날렵한 인상의 여성과 남매지간이었던 모양이다. 여자 쪽도 나름 장신이기는 하지만, 도무지 같은 핏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다. 하긴 이 경우엔 닮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인가 싶기도.
“그런데 이쪽 분들은?”
“아, 내 정신 좀 보게. 이쪽은 너도 한번쯤 들어는 봤을 걸? 종결자 미엘님.”
그러자 갑자기 두건녀는 투덜거리던 방금 전까지의 분위기는 어디 갔는지 사람이 달라진 것 같은 모습으로 미엘에게로 다가와 어쩔 줄 몰라한다.
“정말요? 꺅! 반가워요! 저 미엘님 팬이에요. 이렇게 만나게 돼서 정말 영광이에요!”
“그, 그런가요.”
말만 그런게 아니라, 이쯤 되면 완전히 소녀팬 저리가라 할 정도의 분위기라 미엘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할은 그런 여동생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진과 유아를 소개했다.
“이 두 분은 미엘님의 동행. 이쪽 남자분이 진님, 그리고 이쪽 여자분이 유아님.”
“진님? 아… 설마 최근 업적 알림에 자주 떴던 바로 그 분? 맞다. 그러고 보니, 미친놈 강림 막은 거랑, 토너먼트 때도 미엘님이랑 같이 언급되었죠? 맞죠?”
“네, 맞습니다.”
놀랍다. 미엘은 팬이라서 기억 한다 쳐도, 같이 이름이 올랐던 진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반가워요. 전 힐 데 마그. 헤트라의 지부장입니다. 평소에는 작은 대장간을 하고 있답니다. 라야의 누구보단 실력이 좋으니까, 장비 같은 게 필요하시면 들러서 매상 좀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