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07
207====================
44. 결단
할 데 마그로 인한 소란 때문에 잠시 멈췄던 강화는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침실로 돌아와서야 다시 시작되었다.
“저 강화하는 거 처음 봐요.”
“그래?”
어제 미처 기다리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탓인지 꽤 긴장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왔던 제랄딘은 침대 위에 쌓여있는 아이템들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뒤이어 그 모든 아이템들이 또한 전부 희귀등급 이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도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죠?”
유아는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이었지만, 희귀급 이상의 아이템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지 잘 아는 미엘이나 제랄딘은 한줄기 의심마저 품은 시선으로 형진을 바라볼 정도다.
희귀급이 왜 희귀급인가. 너무나 구하기 어려워서 등급 이름 자체가 희귀로 붙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템들이 백개 넘게 쌓여있으니 그녀들로서는 뒤집어질 수밖에.
“글쎄. 노력과 운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지구에서라면 대번에 노력충 소리를 들었을 법한 말이다. 물론 이곳이라고 해도 그건 그리 다르지 않는지 제랄딘은 대번에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인다.
“치. 말하기 싫으니까.”
“정말인데.”
인스턴트 킬을 체득하기 위해 했던 삽질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족제비와 여우한테 맞아죽을 때마다 쏟아지던 조소어린 시선들 또한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고 말 정도의 일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쓸데없을 정도로 진지하게 임했었다. 물론 그 결과가 꼭 좋은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이곳에 오게 되었고, 또 이렇게 꽃다운 신부들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헛짓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어쨌든 그렇게 강화를 하면서 겸사겸사 제랄딘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헤르타가 그런 목적을 위해 유지되는 곳이었군요.”
제랄딘은 진지한 표정으로 형진의 말을 듣고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럼, 진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신께서 그렇게 임무를 내려 주셨잖아요. 그리고, 이건 누가 봐도 결국 한 가지 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역시… 그렇겠지?”
형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일전에 크루그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녀석은 자기 주위에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자신 뿐이라고 했었다. 형진으로서는 그 말이 아직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몰라서 했던 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왕이라.
간접적으로 그 단어를 암시하는 듯한 말을 하긴 했어도, 제랄딘도 직접적으로 왕이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그만큼 무거운 의미를 지닌 말이기 때문이다.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기계적으로 강화를 시도했다.
“오, 붙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미엘과 제랄딘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축하해요.”
“그럼 이제 +3인가요?”
제랄딘의 물음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하지만 기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지.”
“얼마나 하려고요?”
“+5 정도는 만들어 봐야 할 것 같아. 기본 방어력 수치가 낮은 것 같아서 말이지.”
“와…”
제랄딘은 물론이고 미엘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사실 이 아이템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봄의 베일은 특성 자체는 우월하지만, 그 효과가 지닌 실질적인 수치는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대로 사용해서는 별 의미가 없고 고강이 되어야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나는 그런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모처럼 좋은 아이템을 구했는데, 그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야 곤란한 일 아니겠는가.
제물이 터지자, 다시 한 번 강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실패함과 동시에 아이템이 낡은 모습으로 변화하며 더 이상 강화할 경우 파괴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공헌도도 별로 없고 해서 같은 아이템을 사용해서 최대 내구도를 회복시켰지만, 지금은 공헌도가 써도 써도 계속해서 채워질 정도로 남아도니 상관없다. 게다가 봄의 베일은 같은 아이템을 다시 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공헌도 상점을 연 형진은 그곳에서 장인의 혼이라는 아이템을 구입해 최대 내구도 복구를 실행했다. 하지만 사용하는 순간 형진은 깨달았다. 하나에 공헌도 천이나 되는 아이템임에도 불구하고 장인의 혼은 하나만 써서는 최대 내구도 복구가 완료되지 않았다.
“이래서 강화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군.”
“그러게요.”
얼추 계산해 보니 봄의 베일이 지닌 최대 내구도를 완전히 복구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무려 공헌도 3만. 장인의 혼이 무려 30개나 소모되어야 비로소 최대 내구도를 완전히 복구할 수 있으니, 어지간한 집행자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건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 애초에 장인의 혼을 써서 내구도 복구를 해야만 할 정도로 귀한 아이템이라면, 돈이나 공헌도로는 그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일 테니까.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의 최대 내구도를 복구하는데 공헌도 몇 만 정도 들어가는 걸로 충분하다면 그건 오히려 남는 장사다.
미엘과 제랄딘은 입이 딱 벌어졌다. 하나에 공헌도 천이나 하는 아이템을 수십 개나 물 쓰듯이 써대는 형진의 모습에 질려버린 것이다. 물론 여전히 유아는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로서는 잠도 안 자고 뭘 하는 건가 싶을 테니까.
최대 내구도의 복구를 완료한 형진은 제물을 몇 번 강화한 다음, 다시 한 번 봄의 베일에 대한 강화 시도를 했다.
물론 결과는 또 실패.
“역시 만만치 않네.”
“…”
이제 미엘과 제랄딘은 말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형진은 다시 한 번 공헌도를 쏟아 부어 내구도를 복구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성공. 이로써 봄의 베일은 +4로 강화되었다.
“+4…”
“그냥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아요?”
“왜? 겁나?”
“조금요.”
미엘은 말리려는 기색을 보였다. 아무래도 할 데 마그의 일을 경험하고 나니 혹시 형진도 강화라는 이름의 도박에 중독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다.
“전에는 다소 그런 부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충분히 할 만 하니까 시도하는 거야. 더 이상 이건 도박이라고 보기도 어려워. 단지, 얼마나 많은 자금을 쏟아 부을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그렇긴… 하지만.”
물론 돈을 쏟아 붓는다고 무조건 붙는다는 보장은 없다. 몇 백만의 공헌도를 쏟아 붓는다 해도 붙고 안 붙고는 어디까지나 운에 걸린 문제니까.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도박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어쩐지 형진으로서는 예전에 트렌치코트를 강화할 때만큼의 긴박한 심정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긴박감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실패할 때마다 조바심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리 열 번을 실패하고, 그 많던 제물들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조바심이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장인의 혼은 물론이고, 이제는 보상으로 받은 강화석도 다 떨어져 간다. 공헌도 상점에도 강화석이 있으니 사서 쓰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손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박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말은 취소. 역시 강화는 도박이다. 그건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건 아마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으으…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에게 힘을 보태줘.”
“쿡쿡.”
너스레를 떠는 형진의 모습에 유아와 제랄딘, 그리고 미엘이 돌아가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렇게 아리따운 반려들의 키스로 심기일전한 형진은 다시 한 번 강화를 시도했다.
그녀들의 기원과 축복이 효력을 발휘한 것일까.
그러자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가 우르르 나타난다.
[강화를 시도합니다.] [축하합니다!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5 봄의 베일’을 획득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성공적인 강화를 통해 아이템이 지닌 진정한 힘이 발현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업적을 인정하였습니다.-축하합니다! 업적 보너스로 한 달간 의뢰 달성시 팩션 공헌도를 두 배로 습득 가능합니다.
-이미 업적 보너스가 적용 중이므로, 잔여 시간에 한 달이 추가 됩니다.
-축하합니다! ‘강화에 맛들인’ 칭호가 부여되었습니다.
-‘강화에 맛들인’ 칭호 효과: 장인의 혼 구입시 10퍼센트 할인.
“헉! 성공인가요?”
“업적 알림? 이게 뭐에요?”
“강화로 업적을 띄우는 건 처음 보네요. 세상에.”
성공했다고 일부러 말해줄 필요도 없이, 바로 업적 알림이 떠버렸다. 아무래도 고강 아이템의 소유에 관한 문제는 민감할 수 있는 일이라 익명으로 처리되긴 했지만 이 방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그것이 누구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건 유아뿐이다.
그나저나 업적 알림도 뜨는 건가. 생각보다 조력자 등급에 꽤 많은 기능이 허용된 모양이다.
+5로 강화되자 봄의 베일로부터 은은한 무지개빛 서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물론 눈에 확 띌 정도는 아니고, 가만히 지켜보면 그 안에서 배어나오는 서기가 조금씩 느껴지는 정도지만 말이다.
“어디 보자.”
남은 강화석은 이제 세 개. 기왕 지르는 거 +6도 한 번 띄워볼까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이쯤 해 두기로 했다.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지르면 지금 사용인 숙소에서 벼락의 후유증으로 인해 끙끙 앓고 있는 할 데 마그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누구는 도박이나 다름없는 강화에 성공했다고 업적도 띄워주면서, 누구는 도박 했다고 제재를 받은 채 머슴살이를 해야 하니. 오죽하면 공포와 죽음께서 저렇게까지 했겠나 싶기는 하지만.
“자, 써봐.”
“네.”
머리에 봄의 베일을 씌워주자, 유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마치 제랄딘이 패션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리저리 걸음을 옮긴다.
“어때요?”
“잘 어울리네. 고생한 보람이 있어.”
아닌게 아니라 머리에 쓴 베일과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색 슬립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 탓에 알게 모르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불꽃이 확 하고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형진만 그런 생각을 느낀 것은 아닌 모양인지, 발랄하게 침대 주위를 걸어 다니는 유아의 모습을 보며 제랄딘 역시 살짝 얼굴을 붉힌다.
“역시 돈은 있고 볼 일이야.”
살짝 얼빠진 표정으로 그동안 열심히 가슴 키우기에 매진한 결과를 지켜보는 형진의 모습이 웃겼는지 미엘이 킥킥거리기 시작한다.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이제는 제법 유아의 몸매도 볼륨이 살 정도가 되었다. 못 해도 이젠 C컵은 되지 않을까. 정말 그동안 노력한 걸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다.
처음에는 벗은 몸을 봐도 참 별 볼 일 없다 싶었던 몸매였는데. 이런 걸 두고 상전벽해라고 하는 건가.
그때 문득 유아가 침대로 다시 올라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맞다. 이거… 어떻게 쓰는 게 좋을까요?”
그녀가 꺼내보인 것은 바로 금화였다.
“괜히 바로 써버릴 생각 말고 놔뒀다가 정말 필요한 곳에 쓰도록 해. 그렇다고 바로 신전에 기부하거나 하지는 말고.”
“음… 역시 그래야 할까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아의 모습에 피식 웃던 형진은 문득 머릿속에 번개같이 한 가지 생각이 지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렇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한 거지.”
“네?”
갑자기 무슨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유아를 끌어당겨 베일을 걷어내고 그 이마에 입을 맞추어 준 형진은 곧바로 제랄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 돈이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한 걸까.
“제랄딘. 만약에 말이야… 엘 파르드를 돈으로 산다면 얼마나 필요할까?”
“네?”
갑작스런 질문에 제랄딘은 눈이 휘둥그레졌고, 미엘 역시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 돈 주고 산다 그랬어요?”
형진은 씩 웃으며 답했다.
“나라를 얻는 수단이 꼭 전쟁일 필요는 없잖아?”
물론, 돈을 주고 산다고 해서 가게 가서 흥정을 하는 것 같은 방식은 아니다. 조금 더 거칠고, 조금 더 강제적이며, 조금 더 악랄한… 그런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