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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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결단
다음 날 아침, 씻고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미엘과 어딘가로 향하며 형진은 유아와 제랄딘에게 다시 이렇게 말했다.
“몇 가지 기능을 좀 손 봤어. 메신저라는 건데, 회합장에 있는 사제들로부터 필요할 때 메시지를 전해 받을 수 있는 기능이야. 긴급하게 연락할 내용이 있는데 회합장에 없어서 얘기를 못하는 경우가 있을 때 있지? 그런 경우에 쓰면 돼. 또한 회합장에 있는 사람끼리도 메시지를 보낼 수 있으니 잘 활용하도록 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내가 밖에 나가 있을 때 보고할 내용이 있다든가 연락할 필요가 있을 때도 이걸 이용하면 돼. 물론 이렇게 장소 시간 불문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은 나와 비서 등급 보유자들에게만 사용 권한이 있으니까 그렇게 알고.”
“그럼 언제 어디서든 바로 연락할 수 있는 건가요?”
제랄딘은 그렇다 쳐도 어제와 달리 오늘은 수업 때문에 따라나서지 못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아의 얼굴이 확 펴진다. 스스로 족쇄를 채운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이상 빠른 의사 결정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다.
“응. 그럼 다녀올게.”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형진이 미엘과 함께 요정의 문으로 사라지자, 유아와 제랄딘은 기도실로 향했다.
“람, 사용자 숙소의 그 분은 여전히 상태가 안 좋아?”
-네. 아무래도 며칠은 갈 것 같아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어제는 정말 죽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갑자기 번개가 막 꽈과과광 하면서 내려치는데. 어휴. 아마 저 같은 요정들이 같은 일을 겪었다면 한두 방만으로 죽어버렸을 거에요. 도대체 그 분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심한 벌을 받는데요?
전대 요정 여왕인 람은 알고 보니 아줌마 저리가라 할 정도의 속사포급 수다쟁이였다. 처음에는 좀 조신하게 구는가 싶었더니 어느 정도 친해지자 이렇게 금방 본색을 드러내 버린다.
“글쎄. 들었겠지만 도박 때문에 그렇다니까 혹시라도 그 분 근처에서…”
꽈광!
하지만 유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벼락 치는 소리가 멀찍이 떨어진 사용자 숙소에서 울려 퍼진다.
“장난으로라도 도박 비슷한 건 하지도 말라고 하려던 참인데 이미 늦었나 보구나.”
-제가 다시 주의를 줄게요.
좋은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후다닥 사용자 숙소로 날아가는 람의 모습에 유아와 제랄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장난기 넘치는 요정들인데, 저대로 맡겨 놔도 정말 괜찮은 건가 싶기도 하고.
그나마 다행인 건 할 데 마그라는 남자가 생긴 것처럼 체력도 무지막지해서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생명에 큰 지장이 없다는 정도랄까.
물론 그렇다 해도 어제 형진이 강화를 하면서 연속으로 떨어져 내린 번개에는 당할 재주가 없었는지 유아가 회복을 시켜 줘야 했다. 만약 짐 정리를 돕는다면서 오귀스트와 하마란이 옆에 없었다면 방음 결계 때문에 벼락이 떨어지는 것조차 몰랐을 테고, 그랬다면 무차별적으로 시도되는 강화 때문에 할 데 마그는 변사체로 발견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벼락으로 인한 부상이 완치되었다 해도 벼락과 함께 부여되는 저주 때문에 할 데 마그는 여전히 끙끙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저주가 걸린 건지는 그가 깨어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별로 설명을 듣고 싶은 생각도 없다. 굳이 듣지 않아도 창의력 넘치는 끔찍할 저주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기도실에 들어서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카트린과 크루그가 그녀들을 맞이한다.
“언니, 오늘은 오빠랑 같이 안 가요?”
“응. 수업이 있어서.”
“무슨 수업이요?”
“신성력을 이용한 재료 손질법.”
“풉.”
신녀라고는 해도 유아가 뭔가 심오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신전에서 데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희망과 생명의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보통인데, 이런 것은 다른 사제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수업이라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다. 하지만 단 하나. 이 세계에서 오직 그녀만이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신성력을 통한 재료 손질법 수업만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 그녀가 아쉬운 기분을 느끼면서도 형진을 따라 나서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크루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크고 작은 세 여성은 자신들을 위해 형진이 특별히 만든 안락한 기도용 침대에 누웠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앉아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장시간 회합장에 접속해야 하는 이들은 이런 식으로 눕는 방식이 선호될 수밖에 없다. 어차피 반쯤은 잠이 드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기도 하니까.
“그럼, 크루그님 부탁해요.”
“네.”
크루그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채 책을 집어 들었다. 만약 형진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귀엽고 예쁜 세 여자가 무방비 상태로 누워있는 모습을 오랜 시간 동안 지켜봐야 하는 일이 괴로웠을지도 모르지만, 태생 자체가 귀공자인 크루그는 별로 부담스러운 기색도 없이 그녀들을 지키며 독서에 열중할 뿐이다.
과거 그 엄청난 소음 공해를 당하고도 이렇게 흔들림 없이 보초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크루그의 엄청난 정신력을 증명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크루그가 있기에 그녀들이 이렇게 안심하고 회합장에 접속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카트린과 유아가 차례로 회합장에 접속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제랄딘 역시 눈을 감고 회합장에 들어섰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녀가 들어선 곳은 바로 세계 각지에서 모여드는 정보를 모아 두는 장서관이었다.
커다란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장서관에 접속한 그녀는 곧바로 형진이 마련해준 새로운 기능을 활용해 엘 파르드 지역에 산재한 신전의 최고 사제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급한 안건이 있으니 재무 관련 담당 사제들을 장서관으로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 비서관 제랄딘.]형진이 비서라는 등급을 새로 만들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을 직급 대신 쓰는 사람은 제랄딘이 유일했다. 유아는 이미 신녀라는 확고부동한 직위가 있었고, 미엘은 처음의 몇 번 외에는 회합장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랄딘은 유아만큼 회합장을 자주 이용하면서도 교단 내에서 사용할 별도의 지위가 없는 상태이다 보니, 새로 부여된 등급인 비서를 아예 직급 대신 사용하게 된 것이다.
제랄딘이 메시지를 보내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엘 파르드 지역에 위치한 신전의 재무 담당 사제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개중에는 재무 담당 사제가 따로 없어서 신전 최고 사제가 직접 온 경우도 있었다.
제랄딘은 그들을 자리에 앉힌 다음,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오늘 이렇게 급하게 엘 파르드 지역의 사제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대리자께서 시급히 처리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있어서입니다.”
장서관에 모인 사제들은 그제서야 이 자리에 모인 것이 모두 엘 파르드 지역의 사제들임을 깨닫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도 현재 엘 파르드 주변에서 벌어지는 급박한 사정에 대해서는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설마… 전쟁입니까.”
물론 엘 파르드는 현재도 전쟁 상태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라는 계절적인 영향도 있고 해서 엘 파르드 전역이 사실상의 휴전 상태에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지금 사제들이 말하는 내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 안의 세력들끼리 치고 받는 것이 아닌, 국가라는 커다란 집단이 치고 받는 그런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치열한 내전 중이라 해도 신전은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한 발자국 빗겨 서 있는 상태다. 아무리 정신 나간 놈들이라도 감히 신전에 대고 해코지를 할 엄두는 아직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털어 먹을 것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물자 조달 의뢰를 통해 각 신전의 재정 상황이 개선되고 그렇게 쌓인 재물을 다시 신전들이 인근 지역의 구호를 위해 내놓기 시작하면서, 희망과 생명의 신전이 사실은 상당한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구호도 적당히 상황 봐가면서 해야 하는 일인데, 이 호구신의 사제들은 일단 눈앞에서 누가 도움의 손길을 청하면 지나치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런 상황 때문에라도 생각이 있는 사제들은 현재의 상황이 매우 위태롭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렇게 엘 파르드 지역의 사제들이 소집되자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제랄딘은 그런 사제들을 향해 고아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아, 다행입니다.”
단정적인 제랄딘의 대답에 사제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럼… 대리자께서는 무슨 일로 저희들을.”
뒤이어 이어진 또다른 사제의 질문에 제랄딘은 이렇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현재 엘 파르드의 식량 사정은 매우 취약합니다. 최근 의뢰를 통해 신전의 재정 사정이 호전되었음에도 식량 사정은 좀처럼 호전되지 못하는 상태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게… 비서관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전쟁에는 돈이 든다. 또한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먹어야만 하니, 식량도 필요하다. 문제는 그렇게 전쟁에 나선 이들이 알고 보면 각 지역에서 생산 활동에 참여하던 사람이라는 점. 다시 말해 전쟁이 길어질수록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자의 양은 한 없이 추락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뿐인가. 대규모 전투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인근의 모든 지역에서 그 순간 생산 활동이 딱 멈춰 버린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야 할 시기의 땅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그 지역은 한 해 농사를 완전히 망쳐 버린다. 전투로 일해야 할 사람이 죽어 버리면, 땅이 있어도 경작을 할 수조차 없게 된다.
이런 상황이 무한 반복하게 되면, 결국 그 땅의 경제는 한없이 나락으로 치달아가게 된다. 그리고, 엘 파르드는 그런 지옥 같은 상황을 벌써 몇 년째 경험하고 있다. 괜히 공포와 죽음이 딱 집어서 엘 파르드를 평안하게 만들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니라고나 할까.
엘 파르드 지역의 신전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고민도 바로 이것이었다. 돈이 있어도 살 식량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형진에게 건의하려던 찰나, 요정들에 의한 우편 업무가 시작되었다.
타운 포탈을 돈벌이에 이용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거나, 떠올렸더라도 실행에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제들도 요정들을 통한 우편은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건 딱히 편법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일이었고, 그들의 신에게서 주어진 힘도 아니니 그런 식으로 활용한다고 배교 행위가 될 소지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랄딘이 식량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몇몇 사제들은 제 발 저린다는 식으로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제랄딘은 다시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겁먹으실 것 없습니다. 저도 대리자님께서도 여러분을 책망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아, 책망해야 할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군요. 그런 급박한 사정이 있다면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그래야 대책을 세워드릴 것이 아닙니까.”
“아…”
책망은 책망이되, 또한 책망이 아니다. 사제들은 살짝 감격한 표정마저 지어 보이며 제랄딘을 향해 감사의 시선을 보냈다.
제랄딘은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 착하고 선량한 사제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가슴 한 구석을 묵직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사제들을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대리자께서는, 대륙 각지의 값싼 식량을 수매해 엘 파르드 지역의 각 신전들에 공급을 하기로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물론, 이 부분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적으로 대리자께서 책임지실 것이니 여러분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세상에,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사제들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핏 들으면 단순히 신전에 식량에 공급을 하겠다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들의 호구 본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대리자가 이런 얘기를 꺼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엘 파르드 전역에 대대적으로 식량을 풀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제랄딘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것 또한 대리자의 일. 사제 여러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은혜로운 일이.”
“참으로 은혜로운 일입니다.”
사제들은 눈물마저 글썽거리며 제랄딘과 형진에게 연거푸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럴 때마다 제랄딘은 가슴 한쪽이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만 이 일이 성사되기 전에 여러분께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각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의 양을 파악해 주시는 일입니다. 필요로 하는 양을 대략이나마 알아야 수매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겠군요. 그럼 당장이라도…”
사제들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당장이라도 필요한 식량의 양을 알아보기 위해 움직이려 했지만, 제랄딘은 그들을 멈춰 세웠다.
“잠시만요.”
“네?”
“아직 얘기가 남았습니다.”
사제들은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랄딘은 나이에 상관없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제들의 모습에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다시 말했다.
“그냥 무작정 식량을 풀면 분명히 신전 주변의 권력자들이 문제를 일으킬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요.”
사제들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진다. 모처럼 사람들에게 식량을 풀었는데, 그걸 주변의 권력자들이 군대를 동원해 다 쓸어가 버리면 완전히 헛짓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풀죽은 표정을 지은 사제들에게 제랄딘은 마침내 이번에 사제들을 불러모은 가장 큰 이유를 꺼내 들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각 지역의 영주나 권력가들에게 문의를 넣어 필요한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물론, 그들에게 지급되는 식량은 공짜가 아닙니다. 그들은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빌려주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하시고, 필요한 양을 알아봐 주시면 됩니다.”
단순히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푸는 것뿐만 아니라, 영주나 다른 권력자들에게까지 식량을 빌려주겠다는 말에 사제들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수탈당할 지도 모르니, 아예 수탈할지도 모르는 자들의 입까지 단숨에 식량을 퍼부어 막아버리겠다는 형진의 배포에 질려 버린 것이다.
말이 쉽지. 한 나라 전체를 다 먹여 살리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무리 대리자가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도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아니, 가능한 것을 넘어서,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제들은 질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제랄딘은 그런 사제들을 바라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다시 말했다.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아시겠지요? 그럼, 바로 움직여 주세요.”
빚을 지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빚을 지면서도 자신이 똑똑하고 현명하며,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하물며 이번에 전면에 나서는 채권자는 다름 아닌 호구신의 사제들. 다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 의도를 의심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나서는 이상 각 지역의 영주나 그 밖의 권력자들은 멍청한 호구신의 사제들을 비웃으며 그들이 내미는 식량을 냉큼 입에 털어넣게 될 것이다. 바보같이 돌려 받지도 못할 식량들을 이렇게 풀어버리다니, 역시 멍청한 호구들은 어쩔 수 없다고 비웃으며.
그것이 자신들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채로.
호구신의 사제들. 이들이 바로 형진이 엘 파르드라는 나라를 손에 넣기 위해 내민 첫 번째 함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