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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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준비
응접실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아디슈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라야바르트의 요청을 받고 황궁을 지키기 시작한 뒤로부터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렸다.
사실 신뢰와 헌신 측에서도 자신들의 이미지가 일반인들에게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미 뿌리 깊게 박혀진 이미지를 바꿀 좋은 수단이 없었다. 애초에 교리 자체가 그 모양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라야바르트의 요청을 수락한 것에는, 그런 식으로 뿌리 깊게 박힌 폭력배라는 이미지를 수호자라는 이미지로 전환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 보이는 수단으로 암살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라야바르트를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의도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더구나 황자의 암살을 막아내는데 실패하면서, 신뢰와 헌신의 추종자들이 지닌 능력에 대한 믿음 그 자체에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토너먼트를 발동해 실추된 자존심이라도 되찾으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실패. 여기에 자신의 친딸인 하마란이 배교자로 추락하면서 라야바르트로 파견된 수호자들의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아디슈에 대한 교단의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해 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현재 수호자의 본단에서는 이대로 아디슈에게 라야바르트에 파견된 수호자들을 총괄하게 두어도 좋은가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라야바르트 황궁에 대한 파견 자체가 무용한 것이 아니냐는 식의 의견마저 나올 정도였다.
책임자 자리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게 되면 그것 역시 신뢰와 헌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격. 아디슈로서는 그런 모든 것들이 아쉬울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지금 그런 자신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뢰와 헌신이라는 이름이 지닌 가치 그 자체를 수호하는 자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최고의 가치를 수호하는 진정한 수호자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그것은 마치 바짝 말라 갈라진 땅에 내리는 한 줄기 비와도 같은 말이었다. 너무나 달콤해서 자신도 모르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유혹과도 같았다.
사실 수호자들이 폭력배라 불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행동이 지닌 명분을 다른 이들이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먼저 상대를 납득시키고 그것을 행동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라는 절대적인 의지에 기댄 빠르고 간결한 판단의 일환으로서의 행동이기에, 그들의 행동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공권력이 아닌 폭력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는 그런 그들의 행동을 모든 이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계약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패러다임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것이다.
이것이라면 기존의 행동 양식을 수정하지 않더라도, 신뢰와 헌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계약은 단순히 물품을 사고팔기 위한 행위로 정의될 수도 있지만, 크게는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규범을 뜻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흔히 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 사회의 규약이나,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관습이나 도덕 역시 결국은 계약의 한 갈래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약의 수호자라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인간 사회라는 커다란 하나의 완성된 가치 그 자체를 수호하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유무형의 가치를 지켜내고 그것이 더욱 융성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
이 얼마나 영예로운 일인가. 이 얼마나 신뢰와 헌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책무란 말인가!
아디슈는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 새인가 반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신에게 계약의 수호자라는 것이 되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남자는 의자에 다시 앉아 그 옆의 여자가 타준 차를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드러난 모습만을 봐서는 그저 경망스럽기 짝이 없는 그런 인물인데, 그 안에는 세상을 경영할 만한 놀라운 시선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디슈는 다시 그 옆에 앉아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자신의 딸에게로 향했다.
그래서였나.
어째서 신뢰와 헌신께서 배교자가 된 자신의 딸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집행자의 옆에 붙여 놓나 싶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신뢰와 헌신께서는. 이 남자가 경색되어 버린 수호자들의 앞날을 밝힐 한 줄기 등불이라는 사실을.
“좋은 말씀, 잘 들었소.”
말투가 바뀌었다.
차를 홀짝거리면서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형진도 속이 타던 중이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뭔가 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 망할 수호자의 대장 놈은 도대체가 속을 알아보기 힘들다. 이건 거의 포커 페이스 수준을 넘어 아이언 페이스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때문에 돌아온 대답이 유화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한 즉시, 형진은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그리고 속으로 욕했다. 망할 놈. 그럴 거면 진작 좀 확확 반응을 해주면 오죽 좋았나.
“그럼, 받아들일 건가?”
“받아들이고 싶소만, 이 일은 나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오. 수호자 전체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는 일이니.”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시오. 신께 여쭈어 보고 확답을 드리리다.”
“잠시라면 얼마나?”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오.”
원래 신뢰와 헌신은 공포와 죽음처럼 재깍재깍 답을 하고 그러는 신이 아니다. 교단의 최고위 관리자급 인물이 청원을 해도 하루 정도는 걸리는 것이 상례. 하지만 하마란 때의 일을 보면 배교자의 발생 같은 위급한 상황에 대해서는 제법 빠른 지시가 내려오곤 한다. 형진의 일장연설에 묻히긴 했지만, 새로 발생한 배교자에 대한 일 역시 문의를 해야 하니 이번만큼은 아마 답이 빨리 내려오지 않을까.
아디슈가 양해를 구하고 남은 한 명의 수호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구석에 앉아 있던 새로운 배교자가 하마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나도 널 따라가게 되는 걸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후…”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형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눈을 즐겁게 할 예쁘장한 여자라면 몰라도 이런 시커먼 남자 녀석이 다시 자신의 집에 엉겨 붙는 건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머슴이라면 할 데 마그로도 충분하다!
뜬금없이 집행자들의 메시지로 그렇게 공포와 죽음을 찾는 형진의 모습에 미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저 녀석 좀 어떻게 해달라고. 난 더 이상 내 집에 시커먼 남자 놈이 들어오는 걸 용납할 수 없어!] “쿡!”못 말려.
정말 이 남자가 방금 전에 수호자는 물론이고 듣는 이를 모조리 홀려버릴 듯한 언변을 구사하던 그 남자가 맞는 걸까.
미엘은 킥킥거리며 메시지를 통해 기도라고는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잡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형진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그의 귀를 잡아끌었다.
“아, 아파! 무슨 짓이야!”
“헛소리 그만하고 여기 누워요.”
“헛소리라니! 이게 얼마나 중대한… 아, 아프다고!”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무릎베개 자체는 싫지 않았던 모양인지 미엘이 이끄는 대로 가만히 옆으로 눕는다.
미엘은 가만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저 나불대는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콱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 또한 느꼈다.
단순한 욕망이나 번식을 위한 정기의 섭취가 아니라, 그와 키스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참 뜬금없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째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뜬금없다. 하지만 미엘은 자신의 그런 충동이 참 뜬금없다고 느끼면서도, 어째서 그런 충동이 갑자기 일어나는지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현란한 언변으로 꽝꽝 언 얼음장 같은 수호자들을 녹여버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마음 속까지 함께 녹아버린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새삼스럽게 반해 버렸다고 해야 하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런 모습에 반해버린다는 것이 참 어이없다 싶지만, 가슴 한구석이 자꾸만 뜨겁게 용솟음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변태가 옮은 모양이다. 이 남자에게서.
가만히 손가락으로 형진의 입술을 어루만진다. 폭신한 무릎의 감촉을 즐기고 있던 형진도 그런 미엘의 행동이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그제서야 비로소 눈치챘다.
[왜 그래?] [뭐가요?] [어째 평소랑 다른 것 같아서.] [그런가요?] [새삼스럽게 나한테 다시 반하기라도 한 거야?] [네. 그런 것 같아요.]장난스럽게 묻던 형진은 그만 말문이 딱 막히고 말았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긍정할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 당신이 너무 멋있어서 발정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러니 책임져요.] [뭐?]대놓고 발정 운운하는 미엘의 말에 형진은 기겁하고 말았다. 이미 한 번 그녀가 제대로 발정하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노, 농담이지?] [왜요? 싫어요?] [싫다기 보다는… 그러니까, 좀 무섭달까.] [쿡쿡. 걱정 말아요. 그때랑은 좀 다른 의미니까.]미엘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형진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치 혼이 달아날 것만 같은 농밀한 입맞춤에 형진은 멍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할게요. 하지만 오늘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에요.] [하, 하하…]형진은 그렇게 어색하게 웃다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두 사람이 황급히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사람 시선도 좀 신경 쓰라고.] [왜요? 부끄러워요?] [그것보다는… 어쩐지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서 말이지.] [쿡쿡.]그렇게 대놓고 두 배교자 앞에서 염장질을 하고 있자니, 문득 문이 열리며 아디슈가 방 안으로 혼자 들어왔다. 형진은 문가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이미 슬쩍 일어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단정하게 자리에 앉은 상태였다.
아디슈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뭔 일이라고 있었던 것일까. 살짝 궁금증이 일긴 했지만, 아디슈는 모른 척 형진에게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소.”
“그 정도 쯤이야. 그런데, 결정은 내려졌는지.”
아디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와 헌신께서는 당신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기로 하셨소.”
아싸. 형진이 속으로 쾌재를 올리는 순간 아디슈는 구석에 자리한 두 배교자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더불어, 당신으로 인해 배교자의 신세가 된 저 둘의 죄 또한 사해주시기로 결정을 내리셨소.”
“네?”
“저, 저희들의 죄를… 말씀이십니까?”
놀란 하마란과 그 옆에 앉은 수호자가 되묻자 아디슈는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야 둘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감히 신뢰와 헌신의 뜻을 의심하다니. 이러다 다시 신뢰와 헌신께서 노여워하시면 어쩌려고.
아디슈가 언짢은 표정을 지은 채 둘을 노려다 보고 있자, 형진이 넌지시 다시 말을 건넸다.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그럼 하마란은 다시 당신들에게로 돌아가는 건가?”
그제서야 아디슈는 둘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형진을 바라보았다.
“그건 아니오. 그녀는 연락 창구로서 앞으로도 그대 곁에 머물게 될 것이오.”
그럼 하마란은 그대로 남고, 새로운 배교자는 죄가 없는 걸로 되었으니 다시 원상복귀. 이로써 모든 것은 형진의 계획대로 된 셈이다.
[공포와 죽음께 경의를. 캄사합니다!] [못말려.]둘이 배교자 신분에서 벗어난 것은 축하할 만한 일이니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지만 이것은 형진의 생각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두 배교자의 죄가 사라졌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수호자들에게 있어 형진이라는 존재가 마치 천재지변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재앙이라는 것을 신뢰와 헌신이 인정했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으로부터 공인 받은 재앙급의 집행자라고 해야 하나. 모르긴 해도 앞으로 수호자들은 형진과 마주할 때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행동과 언사를 삼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