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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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 어흥!
신뢰와 헌신 측에서 계약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고는 해도, 곧바로 형진이 일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로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할 지에 대한 내부 논의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거창한 것부터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아. 곧바로 사회 체계 그 자체에 간섭하려 들면, 기존의 권력자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설 테니까. 물론 수호자들의 힘에는 저항할 수 없다 해도, 여론을 몰아가기 시작하면 오히려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기껏 만들어가려던 새로운 이미지가 박살날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이를테면, 상거래의 공증 같은 거. 물론 모양 빠지는 일일 수도 있어. 요즘 수호자들 먹고 살기 힘드냐는 핀잔이 돌아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의 인식에 수호자가 정말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해. 사기를 치려는 마음이 들다가도 신뢰와 헌신의 이름을 떠올리고, 계약을 맺을 때 수호자가 공증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도록 만들어야 해. 모든 믿음이 필요한 계약을 맺음에 있어 신뢰와 헌신의 이름에 걸고 라는 경구가 당연하게 흘러나오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굳이 신뢰와 헌신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그 이름을 찬양하게 될 거야.”
“아…”
아디슈는 물론이고 하마란이나 구사일생으로 배교자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난 이름 모를 수호자 역시 형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가 제시한 계약의 수호자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완전히 현혹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미엘은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저들이 형진이 진실로 노리는 것이 눈앞에 흔들어 보이고 있는 계약의 수호자가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작은 목표인 상거래의 공증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긴 막상 내막을 알게 되더라도 신뢰와 헌신으로서는 뭐라 욕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무조건 형진이 그들을 이용해 먹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계약의 수호자라는 개념이 정착되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은 바로 신뢰와 헌신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신뢰와 헌신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도 있다. 어쩌면 신뢰와 헌신은 그것을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기에 감히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고 드는 형진의 말을 모르는 척 따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뭔데?”
“우리들이 나아갈 길에 대해 이렇게 큰 도움을 주는 이유가 뭐요?”
아디슈의 시선이 슬며시 하마란을 향했다가 다시 형진에게로 돌아온다. 혹시 배교자로서 자신의 딸이 이 남자의 곁에 머무는 와중에 뭔가 일이 있었나 싶은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교단의 일로 안 좋게 떠나보내기는 했지만, 어쨌든 아디슈도 따지고 보면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형진과 하마란 사이에는 어떤 핑크빛 무드도 생겨나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럴 여력이 없다. 말이 쉽지. 여자 세 명을 데리고 사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중 한 명이 혼자서 십인분이라면, 이건 이미 전쟁이나 다름없는 일.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여자를 들이라는 건 그냥 말려 죽이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뭐긴. 당연히 그게 나에게도 이익이기 때문이지.”
“어떤…”
“실은 내가 얼마 뒤에 큰 거래를 하거든. 그때 수호자 쪽에 맡길 일이 있을지도 몰라. 액수가 좀 크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
수호자들은 물론이고 그런가 보다 하며 듣고 있던 미엘마저도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목적을 까발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다.
특히나 미엘은 너무 놀란 나머지 사래가 들려서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을 정도다.
형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오히려 되물었다.
“왜? 이상해?”
“그게…”
“아, 그리고… 그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아마 더 큰 일을 맡기게 될 지도 몰라. 그러니 차분하게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쌓는 일부터 시작하도록 해. 아까 내가 말한 대로.”
“…”
이쯤 되면 통이 큰 건지 간이 부은 건지도 모르겠다. 보통 이런 꿍꿍이가 있으면 잘 숨겼다가 나중에 터뜨리거나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대놓고 부려먹겠다고 공언해 버리다니.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를.
“걱정 마. 신뢰와 헌신의 이름을 욕되게 할 일은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크게 사람들에게 칭송받게 될 걸.”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사실 이게 옳다. 그가 신뢰와 헌신의 추종자들에게 계약의 수호자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수호자들을 직접 부려먹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들의 관계가 수직적인 종속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협력 관계라는 뜻이고, 이런 협력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신뢰이다. 때문에 형진은 처음부터 숨기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고, 이런 그의 태도는 아디슈에게 충분히 먹혀 들어갔다.
“정말이오?”
그래서일까. 아디슈는 확인하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을 뿐, 불쾌한 기색은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바로 그 신성 폭력배가 맞나 싶을 정도의 변화다.
형진은 그런 아디슈를 향해 씩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신뢰와 헌신의 이름에 걸고.”
“훗.”
아디슈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집행자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걸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라고.
이전이라면 함부로 내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겠지만, 지금은 이 말이 그렇게 기분 좋게 들릴 수가 없다. 비아냥이 아닌, 그 이름의 진의를 되새기고자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겠소. 그럼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소.”
“이곳으로 연락을 보내면 되나?”
형진의 물음에 아디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소. 앞서도 말했지만, 여기 하마란에게 말하면 나와 바로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신뢰와 헌신께서 조치를 취해주셨으니까.”
“그거 다행이군. 괜히 번거롭게 오갈 필요는 없을 테니.”
아마도 메신저 비스무리한 기능을 부여한 것이 아닐까 싶지만, 굳이 다른 신의 추종자들에게 내려진 능력을 캐물을 필요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언제든 수호자에게 계약과 관련된 일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그렇게 수호자와의 협상을 잘 마무리한 형진은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궁을 빠져 나온 뒤, 바로 요정의 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버렸네. 던전이나 한 바퀴 돌다 올까.”
배교자의 굴레를 벗어 버린 덕분인지 한층 밝아진 표정의 하마란을 올려 보내고 나서 형진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미엘이 그의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
“벌써 잊었어요? 아까 내 얘기.”
“어, 그게…”
흠칫 놀라는 형진의 모습에 미엘은 배시시 웃더니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
“느껴지나요? 두근거리는 내 가슴이.”
비록 옷 위로 느껴지는 것이긴 하지만 풍만한 가슴 위로 콩닥거리며 세차게 박동하고 있는 심장의 울림이 적나라하게 전해진다.
어떻게 보면 노골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엘의 도발적인 그 행동에 형진은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크흠. 그럼… 살살 부탁해. 나 이래봬도 연약한 남자라고.”
“쿡쿡.”
엄살을 떠는 모습에 미엘은 키득거리며 웃었고, 형진은 그런 미엘을 품에 안은 채 요정의 문을 열었다.
“어디로 가려고요?”
“글쎄. 어디가 좋을까. 가고 싶은 곳이 있어?”
“음… 아무데나 상관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을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그거 참. 쉬울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어려운 요구사항이네.”
“그런가요?”
형진은 일단 그리칸 교외의 한적한 숲으로 향했다.
“여긴 너무 춥지 않아요?”
“크흠. 그런가.”
일단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려는 생각이었지만, 미엘은 이런 곳이라도 별로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춥지 않느냐는 것도 형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럼 따뜻한 곳으로 가볼까?”
“이 겨울에요?”
“전에 포도 생각나지?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다 보면 아직 따뜻한 곳이 나와. 물론 굉장히 멀기 때문에 하루 이틀 안에는 갈 수 없겠지만.”
그러자 미엘은 씩 웃으며 말했다.
“내 능력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응? 뭐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 훨씬 더 빨리 날 수 있어요.”
“정말? 그럼 왜 지금까지는…”
“그야 그 정도 속도로 날면 단순히 등에 타는 정도로는 버틸 수 없기 때문이죠. 결계도 감당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것이 엄연히 있으니까요.”
“그럼 소용없는 거 아닌가?”
“보통은 그렇겠죠. 하지만, 한 사람 정도라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게 어떤 방법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미엘이 거대한 흑요호로 모습을 바꾸더니, 느닷없이 형진을 콱 물어 버렸다.
“헉! 자, 잠깐!”
“걱정 말아요. 잡아먹으려는 거 아니니까.”
“…”
미엘은 그렇게 형진을 입 안에 머금은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입을 다문 채 비행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뒤쪽으로 펼쳐진 꼬리들로부터 강렬한 힘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순간 흑요호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하기 시작했다.
“켁!”
강렬한 반작용의 여파로 형진은 뒤로 확 밀려났다. 이대로 미엘의 목구멍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부드럽고 커다란 혓바닥이 그런 형진의 몸을 받아내며 밀려나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곧바로 목에 감겨 있던 작은 여우 모습의 미엘이 속삭인다.
“미안해요. 조금 천천히 가속하도록 할게요.”
“고, 고마워.”
거대한 환수의 입 안에서 하늘을 나는 체험이라니. 아무리 형진이라도 살 떨리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식이라면 여러 명을 데리고 비행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고.
사실 초음속이라든가 기타 고속 비행시 인체에 가해지는 문제의 대부분은 속도 그 자체로 인한 것보다는 얼마나 급하게 가속하느냐의 문제다. 따라서 이런 문제만 해결된다면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음속의 두 배로 나는 여객기에 탑승한 채 안락한 여행을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조금 가속이 완만하게 이어지자, 문득 목에 감겨 있던 미엘의 꼬리 하나가 확 하고 사람의 모습을 감추더니 은근하게 형진에게 몸을 기대온다.
닫힌 입 안이라서 주위가 온통 캄캄한 와중에도 형진은 자신에게 감겨오는 그녀의 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서, 설마… 여기서?”
“왜요. 뭔가 문제라도?”
“…”
문제 이전에…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입 안에는 좀!
자칫 잘못해서 그대로 꼴깍 삼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미엘은 그렇게 당황해 하는 형진이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그에게 더욱 몸을 밀착했다. 어느 새인가, 미엘의 두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석류석처럼 요요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엘?”
“왜요?”
“크흠… 그게 아무래도 여기서는…”
“괜찮아요. 미엘에게 다 맡겨요. 어흥.”
형진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의 촉촉한 입술에 의해 입이 막혀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