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17
217====================
46. 발동.
“흐응.”
유아의 눈이 가늘어진다. 미엘과 단둘이 외박을 하고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오자 질투가 발동한 모양이다.
“둘이서만 가서 노니까 좋아요?”
“그게… 크흠.”
그나마 다행이라면 시간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이 걱정되어 밤을 새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정도. 만약 메신저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살짝 눈을 흘기는 정도의 바가지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난처해하는 형진이 안 되어 보였던지, 슬며시 미엘이 나서며 중재를 시도해 본다.
“아름다운 섬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참에 전부 가보지 않을래요?”
“섬이요?”
“네. 낙원처럼 아름다운 섬이에요. 낮에는 파란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지고, 밤에는 수많은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는 그런 곳이죠.”
“…”
몇 마디 말만으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다. 하지만 유아의 눈은 꿈에 젖어 몽롱하게 변하기보다는 더욱더 가늘어진다.
“그런 좋은 곳에서 단둘이 있었던 거에요? 낮부터 밤까지?”
“그건…”
아차 싶었던지 미엘이 눈을 피한다. 과연. 유아도 더 이상 맹한 곰탱이는 아니라 이건가.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제랄딘이 끼어들었다.
“그런 곳이라면 저도 한 번 가보고 싶어요.”
“그래?”
“아예 이참에 모두 함께 가보는 게 어때요?”
결국 이 말이 기화가 되어 때 아닌 한 겨울에 남쪽의 외딴 섬으로 집안의 식구 모두가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사용자 숙소에서 혼자 끙끙 앓고 있던 할 데 마그까지 전부 다.
“와아아!”
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의 모습에 카트린은 탄성을 터뜨렸고, 라야바르트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아름답고 거대한 풍경에 다른 이들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만큼은 촌뜨기 시골 처녀 유아도, 수도의 잘 나가는 귀족 아가씨 제랄딘도 차이가 없는 일이다.
형진은 일단 적당한 나무 그늘 근처에 아가씨들이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천막을 쳤다.
그러자 문득 유아가 얘기를 꺼낸다.
“이참에 여기에 별장을 하나 짓는 건 어때요?”
“별장?”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일이다. 물론 요정의 문을 통하면 얼마든지 집에서 잘 수도 있지만, 집에 가서 자는 것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별장에서 잠드는 건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말이 쉽지, 집을 짓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진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비록 본격적인 특화분야는 하나 뿐이지만, 다른 분야들도 기본적으로 전문 분야 수준은 되고 그 정도라면 충분한 노동력이 뒷받침될 경우 집 한 채 정도 짓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디 보자.”
형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섬 한 쪽에 높이 솟은 언덕으로 시선을 돌렸다. 낮은 지역의 모래 사장은 풍랑이 심해지면 파도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지만, 언덕 위라면 어지간히 큰 해일이 아니고서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그럼 한 번 살펴볼까. 림, 애들 데리고 따라와.”
-넵, 스승님!
언덕 위를 잠시 돌아보던 형진은 적당한 곳을 찾았다. 언덕 정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움푹 패인 듯한 느낌의 작은 분지다. 사실 분지라고 하기엔 규모가 너무 작긴 하지만 널찍한 마당을 지닌 집 한 채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정도는 된다.
“여기 정도면 적당하겠군.”
바닷바람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트막한 잡목 정도를 제외하고는 큰 나무도 별로 없어서 터를 닦는 것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형진은 종이를 꺼내 우선 대략적인 조감도를 몇 개 그렸다.
“이 중에서 하나 골라봐.”
“정말로 지으려고요?”
“물론.”
처음 별장을 짓자고 얘기를 꺼내기는 했어도 이렇게 빨리 시작할 줄은 미처 몰랐는지 유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래 걸리지 않아요?”
“글쎄. 터를 닦는데 다소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그 외엔 생각보다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
물론 크고 거창한 집을 짓는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형진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담한 크기의 작은 집이었다. 어떻게 보면 별장보다는 방갈로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제서야 유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형진이 그린 몇 가지 조감도 가운데 하나를 골랐다. 그녀가 고른 것은 방 두 개와 작은 테라스가 달린 형태의 것이었다.
지을 집의 형태가 선택되자, 형진은 림을 비롯한 요정들을 불러서 터를 다지는 작업을 맡겼다.
몇 개의 말뚝을 박은 뒤 끈으로 연결해 영역을 설정한 다음, 평평하게 지면을 판 다음 무거운 돌로 땅을 두드린다. 그렇게 요정들이 터를 다지는 동안, 형진은 물자 조달 의뢰를 통해 최고급 목재를 구한 뒤 통나무집의 제작에 들어갔다.
“바로 만드는 거에요?”
“응.”
터다지기를 막 시작했는데 벌써 집을 만들기 시작하는 형진의 모습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만들어서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원하는 위치에 내려놓고 고정시키면 끝. 참 쉽죠?”
“…”
말이 쉽지.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그 무게를 생각하면 절대 다른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다. 엄청난 양의 공헌도를 퍼부어 십만 단위의 무게를 보유한 형진이 아니고서야 누가 엄두를 내겠는가.
뚝딱거리며 금새 밑판을 만들고 기둥을 세운다. 따지고 보면 구조 자체는 이번에 몇 번이나 만들었던 침대와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좀 더 크기가 크고, 사방을 벽으로 막아 둔다는 차이가 있을 뿐.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하고 느긋하게 지켜볼 요량이었던 미엘이지만, 이래서는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집이 완성될 느낌이라 결국 그렇게 나섰다.
“음… 여긴 됐고, 가서 터다지는 것 좀 도와줘.”
“네.”
터다지기를 하는 김에, 미엘은 집이 들어설 자리 근처에 간단하게 결계를 설치했다. 바람 전부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약화시키는 느낌으로.
열 명분의 노동력을 가진 요정과 미엘이 힘을 합치자, 터를 다지는 작업은 금새 끝을 맺었다. 형진은 그들로부터 터다지기가 끝났다는 얘기를 듣자 집이 들어설 자리를 제외한 곳에 간단하게 정원을 꾸며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곧바로 판석을 깔아 길을 만들고 나무를 가져다 심는 일이 이루어졌다.
“다 됐다.”
그 모든 일이 끝나고 저녁 무렵이 되었을 즈음, 마침내 작은 집 한 채가 완성되었다. 형진은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깔끔하게 다져진 집터에 내려놓았다.
“잠시만요.”
곧바로 미엘이 몇 가지 마법 결계를 추가적으로 집에 걸어놓는다. 집에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만드는 내화결계를 비롯해, 많은 비가 와도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만들고, 마지막으로 방음 결계를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 작업이 완료 되었다.
“그런데 난방은요?”
“침대에 쓰던 룬을 바닥에 깔았어. 미엘, 활성화 했지?”
“물론이죠.”
그렇게 며칠 정도 섬에 머물며 하나하나 집을 만들자 언덕 아래의 작은 분지는 금새 작은 마을 같은 모습으로 변화했다. 집을 다 만들고 내친 김에 언덕 위에 작은 풍차를 만들어 보려고 설계를 하고 있는데, 제랄딘이 다가와 보고서를 건넨다.
“일차로 필요한 식량의 양을 추산해 봤어요.”
“어디.”
보고서의 앞쪽에는 합산된 식량의 양과 더불어 지역별 통계가 적혀 있었고, 뒤쪽에는 각 지역별로 확인된 실제 인구와 영주들의 전력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미친놈들. 고작 병력이 천명도 안 되면서 욕심은 더럽게 부리네.”
“식량을 받아서 그걸 미끼로 병력을 늘리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제 딴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거겠죠.”
만약 형진의 의도를 몰랐다면 이런 놈들에게 식량을 베풀어선 안 된다고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계획의 진정한 의도를 알고 있는 지금은 그렇게 헛된 욕심을 부리는 멍청한 작자들에게 조소를 던질 뿐이다.
“흠, 그래도 무조건 달라는 대로 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적당히 줄여봐.”
“어느 정도로요?”
“글쎄. 사제님들 능력을 한 번 보자고. 얼마나 깎을 수 있을지. 혹시 알아? 의외로 사제들 중에 제법 능력이 좋은 사람이 있을지.”
형진의 말에 제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별로 기대는 안 되는 걸요.”
“나도 그렇긴 해. 하지만 이 경우엔 깎으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거니까.”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제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하게 형진의 말을 메모했다.
“이곳은 뭐야. 왜 이렇게 적어?”
“산드린 영지 말씀이신가요.”
“응.”
“저도 뭔가 착오가 있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확인해 보니 정말 최소한만 신청을 한 모양이더라구요.”
그녀의 대답에 형진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혹시 우리 의도를 눈치 챈 건가?”
하지만 제랄딘은 그런 형진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신전 쪽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양을 줄인 모양이에요.”
“끙.”
형진 같은 악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차라리 악덕 영주보다 이런 선한 영주 쪽이 더 골치 아픈 대상이다. 악당이야 원래 악한 대상이니 거리낌 없이 몰아칠 수 있지만, 이런 선한 영주는 주위의 신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처리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이래서는 곤란한데.”
시세를 따져 계산한 금액을 살펴봤지만 이대로라면 영지를 손에 넣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선한 영주라면 그냥 놔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제랄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해. 그런 식으로 하나씩 예외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일이거든.”
“…”
“게다가 말이지. 이번 대의 영주가 선하다고 해서 다음 대의 영주도 선하라는 법이 있나?”
“그건… 그렇지만.”
역시나 같은 귀족이라서 그런 걸까. 형진은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한 제랄딘의 손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작게 말했다.
“걱정 돼?”
“네.”
이 계획은 기본적으로 현재 엘 파르드에 존재하는 기득권 세력을 일소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정확히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가진 권리를 채권 추심을 통해 빼앗고, 그 자리에 신전 세력을 집어넣는 것이 이 계획의 핵심이다. 내정은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이 지방 자치의 형태로 실행하고, 사법과 국방과 같은 공권력은 신뢰와 헌신이 채우는 형태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근본적으로 한 가지 커다란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기존의 기득권 세력을 일소하고 신전 세력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에 있다. 특히 엘 파르드 주변 지역의 국가들은 이런 상황을 결코 방관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엘 파르드에서 일어난 일이 자신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프랑스에서 혁명의 불길이 일어나자 주위의 왕국들이 화들짝 놀라며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신이라는 절대적인 힘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같은 상황이 무조건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그에 걸맞은 대비를 할 필요는 분명히 있고, 제랄딘이 염려하는 것도 바로 그런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산드린 영지를 용납할 수 없는 거야.”
“반대 세력이 그곳으로 집결할 수도 있기 때문인가요?”
“맞아. 지금은 영민들을 위하고 신전을 존중한다 치더라도, 우리의 목적이 엘 파르드에서 귀족이라는 존재 자체를 치워버리려는 것임을 알게 된 후에도 그런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긴.”
치워버릴 수 있을 때 치워버리지 않으면, 나중에 그것보다 몇 배는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냉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어차피 치워버릴 것이라면 치울 수 있을 때 한꺼번에 치우는 것이 이롭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서로를 안은 채 조금은 흐뭇한 표정으로 상대를 응시하고 있는데, 문득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키스해. 키스해.
-쉿. 들리겠어.
-에이, 괜찮아. 우리 요정왕이 어떤 분이신데. 키스 정도는 남들 보는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변태왕이라고.
-정말?
-정말. 림이 그랬어. 방음 결계도 안 켜놓고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요정들의 속닥이는 소리에 제랄딘은 점점 얼굴이 붉어지더니, 이내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형진의 품을 빠져 나와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미엘, 아니 유아 정도만 되어도 형진과 함께 웃어버렸겠지만, 아직 형진과 함께 밤을 지낸 날이 얼마 안 되는 제랄딘에게는 이런 식의 말에 뻔뻔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도도하고 고아한 아가씨이면서 자신에게만은 그렇게 풋풋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보이니까 더 좋은 것인지도.
도망쳐 버린 제랄딘의 모습에 혀를 차던 형진은 다 된 밥에 초를 쳐버린 요정들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끙… 이 망할 녀석들이 구경을 하려면 입이나 다물던가!”
-이크!
-도망쳐!
-변태왕이 화났다!
-그럼 조용히 있으면 구경해도 된다는 건가?
-역시 변태왕!
-크크크, 이제야 말로 언덕 최속 이론을 보여줄 때가 되었군.
-녀석은 진화하고 있어!
-가랏! 승부다!
그렇게 와글대면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니 화낼 기운도 안 난다. 형진은 피식 웃어버리고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 풍차의 설계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