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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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현현
면담은 일단 그렇게 끝났다. 모처럼 옷가게에 들른 김에 여름용 의류와 옷감을 좀 샀다. 린넨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삼베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지 좀 애매한 옷감이 주를 이룬다. 기젤이나 여급들은 벌써부터 여름옷을 준비하나 싶었는지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매상을 올려주니 그런가보다 하고 주문대로 수량을 맞춰준다.
옷 보따리를 손에 들고 가다가 형진이 문득 이렇게 말했다.
“이 반지, 버릴까?”
“네?”
형진의 말에 셋 모두 깜짝 놀랐다.
조만간 찾아올 무언가를 생각하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무려 전설급 아이템이다. 뿐인가. 숨겨진 옵션이 일시적으로 개방되는 순간 신성급으로 변하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원래 신성급 아이템이었던 것이 어떤 이유로 성능이 떨어지게 되면서 전설급으로 격하된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돈으로 살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닌 것이다.
그런 아이템을 버린다니. 어지간해서는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좀 아깝지 않아요?”
제랄딘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물론 나도 그냥 아무데나 막 버리겠다는 얘긴 아니야. 다만 어디 다른 사람이 찾기 어려운 장소에 숨겨놓는다든가 하는 식은 안 될까 싶어서.”
그제서야 셋은 그럴 법 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여자가 하나 더 늘어나는 건 그녀들뿐만 아니라 형진으로서도 곤란한 일이다. 그냥 평범한 여자라도 난감할 판에 무려 여신이라니. 게다가 그냥 여신도 아니고 민폐성이 다분한 의존증 환자다. 공포와 죽음께서는 적당히 잘 부려먹으라고 그러셨지만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여자들로서도 마찬가지다. 모처럼 넷이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데, 여기에 느닷없이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르는 여신이 끼어들어서 상전 행세를 하기 시작하면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찾아오고 나면 이미 늦다. 할 거라면 후딱 해치워야 한다. 모르긴 해도 형진을 콕 집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신물의 위치를 추적해서 오고 있을 테니, 도착하기 전에 어디 적당한 곳에 숨겨둔다면 쓸데없이 민폐 여신을 상전으로 모시는 불상사 같은 것은 생기지 않으리라.
네 남녀는 서로의 눈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이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좋아. 그럼 일단 이걸…”
형진은 그렇게 말하며 반지를 빼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어라?”
반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보이긴 하는데 마치 환영처럼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잠깐만요. 제가 한 번…”
미엘이 급히 마법 해제를 시도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유아가 저주 해제를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 보니 이런 문구가 새로 추가 되어 있었다.
-현재 사용자에게 귀속. 착용해제 불가. 현 상태의 해제는 보호와 균형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헐… 귀속? 착용해제 불가?”
귀속이라니. 착용해제 불가라니. 어느 틈에 이런 옵션이 생겼단 말인가. 과연 만만찮은 민폐 여신. 도망갈지도 모르니 미리 선수를 친 모양이다.
이래서는 벗는 것은 물론이고 버리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어쩌지?”
난감해 하는 형진의 말에 제랄딘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손가락을 잘라 보는 건 어떨까요?”
“뭬야?”
“제, 제랄딘님. 그건 좀.”
“제라… 아무리 진이 싫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당황한 세 사람의 반응에 제랄딘은 얼른 손을 내저으며 이렇게 보충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유아님이 가진 기적의 성광을 발휘하면 손가락이 잘린 상처 정도는 바로 나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일단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반지를 빼낸 다음에 다시 회복을 시키면 어떨까 해서.”
“…”
과연. 그런 방법이.
미엘은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아는 안색이 핼쑥해지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정인의 손가락을 잘랐다가 다시 붙이라니,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크흠. 그건 내 생각에도 좀… 이렇게까지 조치를 취했다면 단순히 손가락을 자른다고 떨어질 것 같지도 않고.”
“무서워서 그래요?”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뭘. 그냥 그렇다는 거지.”
역시 무서운 거구만. 세 여자는 바로 그런 형진의 심경을 알아챘지만 굳이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말대로 이렇게까지 조치를 취했다면 단순히 손가락을 자르는 정도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어려울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괜히 생사람 잡는 일일 뿐이다.
결국 네 사람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채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불안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들을 반긴다.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형진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스트란드에서의 일을 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황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거 참… 신들도 여러 가지로 고충이 있나 보군요.”
“뭐랄까. 그런 점에서 보면 어쩐지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신에게 인간미라니. 마치 블랙 코미디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형진은 반려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후… 피곤해.”
형진은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침대에 벌렁 누웠다.
“눕더라도 일단 뭐라도 먹어요. 아침 식사도 못했잖아요.”
“유아가 만들어줄래? 어쩐지 다 귀찮아졌어.”
“어휴. 이 어리광쟁이.”
어리광을 부리는 형진의 모습에 유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그의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물을 가져다 발까지 씻겨주고 난 뒤에야 비로소 식사를 준비하러 밖으로 나갔다. 누가 교육시켰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모범적인 메이드가 아닐 수 없다.
사온 옷가지를 옆방으로 가져가 정리하는 일을 마친 제랄딘이 뒤늦게 침실로 들어오더니 침대에 벌러덩 누운 형진의 모습에 역시나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그의 옷을 갈아입힌다.
“이상해.”
“뭐가요.”
“오늘따라 전부 너무 고분고분하고 잘 보살펴 주는 것이. 나 뭔가 잘못했나? 그래서 혹시 이런 식으로 시위를 하는 거야?”
“킥.”
제랄딘은 작게 웃더니, 살짝 눈을 흘기며 말했다.
“반지, 버리겠다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 그래서가 아닐까요?”
“그게 뭐?”
“모르면 됐어요.”
외출복을 벗기고 간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히는 일이 끝나자 제랄딘은 그 옷들을 가지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미엘.”
“후아아암… 졸려요. 말 걸지 말아요. 어제 한숨도 못 잤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내 목도리 모습으로 청초한 아가씨 모습으로 변화해서 형진의 품을 파고들었다. 마치 그곳이 자기 자리라는 듯이. 여신의 일 때문에 마음이 상했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렇게 품안에서 잠이 든 미엘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자니, 유아와 제랄딘이 전복죽을 쟁반에 담아서 가지고 왔다.
“자요. 피곤하실 텐데 먹고 푹 주무세요.”
“고마워.”
고소한 전복죽을 먹고 나자, 유아와 제랄딘은 설거지를 끝내기가 무섭게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미엘처럼 형진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쩐지 민폐 여신 따위의 위협은 자신들이 물리치겠다는 기백이 은연중에 느껴진다. 귀여운 녀석들. 이젠 제법 질투도 할 줄 알고, 제법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하룻밤을 꼬박 세운 탓에 그들은 한나절 동안 그대로 곯아떨어지듯 잠이 들고 말았다. 덕분에 깨고 보니 다시 한밤중. 뭔가 낮밤이 바뀌어 버린 듯한 느낌이다.
“기왕 잠에서 깼으니 산책이나 할까?”
“그럴까요.”
미엘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얼른 여우 목도리로 모습을 바꾸어 형진의 목을 휘감았다. 그렇게 자고도 아직 졸린 건가 싶긴 해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또 귀여워서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형진이 수영복으로 갈아입자, 유아와 제랄딘도 눈짓을 교환하더니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비키니 수영복에 얇은 덧옷을 입은 모습을 보니 눈이 다 호강이다.
역시 래시가드 같은 걸 보여주지 않고 비키니 수영복을 바로 보여준 건 신의 한수인지도. 후후후.
“눈빛이 음흉해요.”
“내가 뭘.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여러분이 너무 아름다운 탓입니다.”
“핏. 말이나 못하면.”
그래도 예쁘다는 말이 싫지는 않은지 둘은 곧바로 형진의 팔을 하나씩 점령했다. 팔에 닿는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느낌이 꽤 좋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어쩐지 양팔에 족쇄 하나씩을 끼고 걷는 듯한 느낌이라는 정도. 하기야 이것도 배부른 소리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모두 함께 파도가 철썩이는 밤바다를 걸으니 그것도 꽤 운치 있는 일이다. 하늘에는 휘영청 달이 떠있고, 그 달빛이 부서지는 파도에 뒤섞여 밀려오는 바닷가를 아리따운 미녀들과 거닐고 있으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 맞다. 깜박했네.”
“뭘요?”
“후후후, 실은 말이지.”
음흉한 웃음소리를 내는 형진의 모습에 유아와 제랄딘이 이 남자가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품은 건가 싶었는지 흠칫하며 얼른 팔짱을 풀고 떨어진다.
“어이, 아직 말도 안 했는데 그 반응은 너무 심하지 않아?”
“어쩐지 듣지 않아도 내용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디 들어나 보자. 내가 뭘 말하려고 했는데.”
“보나마나 변태스러운 일이겠죠.”
“딩동댕. 정답입니다. 사실은 내가 공포와 죽음께 화끈한 라이브쇼를 보여드리겠다고 했거든. 그러니 순순히 이리 오도록 해.”
“싫다면요?”
“어허, 이런 못된 메이드들을 보았나. 벌을 줘야겠군. 받아라! 스파이럴 워터 샷!”
“꺄앗!”
“아하하하하!”
곧바로 셋은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물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크루그가 이런 모습을 봤다면 또 시작이군 하는 표정을 지으며 카트린을 데리고 들어갔을 듯한 그런 분위기다. 참고로 미엘은 귀찮다는 듯이 자신의 주위에 결계를 쳐서 물을 막아내며 계속 쿨쿨 잠만 자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모든 걸 잊고 깔깔거리며 물싸움을 하고 있는데, 문득 제랄딘이 멈칫하더니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잠깐만요.”
“왜?”
“혹시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아요?”
“응?”
무슨 소린가 싶어서 잠시 물싸움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처음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자, 철썩이는 파도 소리 너머에서 흐느껴 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뭐죠?”
뒤늦게서야 그 소리를 알아챈 유아가 얼른 형진의 팔을 끌어안으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글쎄. 혹시 해양 몬스터인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셋의 뇌리 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이 일치했다는 것 정도는 눈빛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확인부터.”
“네.”
그들은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워낙 소리가 작은데다 파도소리에 묻혀서 위치를 특정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은 탓에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은 이내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요정?”
솔직히 발견한 것부터가 대단한 일이다. 고작해야 손가락 하나 정도 크기나 될 법한 무언가가 모래사장에 처박혀서 하반신만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에 젖은 빨간 치마가 훌렁 뒤집혀서 바닥에 펼쳐져 있고, 호박 팬티를 입은 작은 다리가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형진은 말미잘을 연상하고 말았다.
“세상에. 왜 가만히 보고만 있어요. 일단 구해야죠.”
유아는 뒤늦게서야 그것을 알아보고는 얼른 달려가 모래 속에 처박혀 있는 그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괜찮아요?”
그렇게 물으면서도 유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정과 크기가 비슷한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딱 보는 순간 귀엽고 장난스러운 요정과는 어쩐지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흑흑흑… 흑흑흑흑…”
모래가 덕지덕지 묻은 모습으로 그렇게 엉엉 울던 그 무언가는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형진을 발견하더니 이내 크게 통곡하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와아앙! 내가 여길 찾느라 얼마나 힘들… 켁!”
하지만 그 무언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갑자기 눈물 콧물을 뿌리며 달려드는 무언가에 놀란 형진이 자신도 모르게 파리 잡듯이 후려쳐 모래사장에 처박아 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