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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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현현
섬으로 돌아온 식구들은 곧장 유아부터 찾았다. 특히 암흑의 밤에 완전히 잠겨 있었던 세 명은 잠들지 못하고 있던 유아에게 이상이 없는지 확인부터 받았다.
“괜찮아요. 저주가 깃든 것 같지도 않고, 몸에도 이상이 없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그게…”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솔직히 형진으로서도 당황스런 일이라 뭐라 말을 하기도 난감할 정도다.
게다가 이것이 벌써 몇 번째인지. 우연도 계속되면 필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쯤 되면 신이라 불리는 존재와 뭔가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역시 매크로 체조 때문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다. 유아를 신녀로 만들고 자신을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로 만든 바로 그것.
다른 이가 실행했을 경우 자칫 강신이 유발될 수 있기 때문에 이후로는 다른 이에게 공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비밀에 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형진 본인은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것 이외의 다른 효과가 없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유아처럼 확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느릿하게 신들에 대한 친화력 그 자체가 늘어서 이런 식으로 신성급의 아이템 같은 것을 발견하기 쉬워진 것은 아닐까.
물론 신성급의 아이템이든 신이든 많이 접촉하면 좋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말이든 뭐든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응이 가능한 신이 아니라, 미친놈 같이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대응 자체가 불가능한 신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그건 참 여러모로 난감하다 못해 재앙에 가까운 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확실히 생각만 해도 섬뜩한 일이다. 파괴와 재생 같은 녀석이나 그런 녀석의 힘이 이번처럼 의도하지 않은 상태로 불려 나온다면 그건 단순히 재앙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난감한 일이 될테니까. 특히나 이번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이 진행된다면 더욱더 그렇다.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제어할 수 없다면 자신과 주위를 망치는 흉기에 불과하니까.
신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 그런 존재의 눈에 자주 띄는 것은 결코 행운이라고 하기 어렵다.
유아는 괜찮은 것 같다고 했지만, 신과 관련된 일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날은 일단 다른 이들과 떨어져 던전 한가운데 있는 성소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그냥 섬에 남아 있으라니까.”
“싫어요.”
“휴…”
하지만 모처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성소에 나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려들은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특히 유아의 경우엔 이번 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함께 있겠다며 달라붙는다.
“역시 계약을 되돌리는 것이.”
미엘의 경우엔 자신과의 계약이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렇게 말했다. 물론 미엘과의 계약이 방아쇠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 하지만 스트란드에서의 일이 벌어진 것은 미스틱 링 때문이고, 미스틱 링을 손에 넣은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지금 형진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드는 진짜 원인이다.
아무래도 설명을 하지 않으면 계속 불안해 할 것 같아서, 어떤 신의 힘이 작용한 것인지 정도는 말해 주기로 했다
“보호와 균형이라는 이름 들어봤어?”
“…”
미엘은 물론이고 유아와 제랄딘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야 유명한 신이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 존재를 일일이 다 외우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괜히 잊혀진 신이겠는가.
“그런 신도 있어요?”
유아가 그렇게 묻자 미엘이 살살 다독이듯 말한다.
“그냥 되는 대로 아무 이름이나 막 주워섬기고 그러면 안 돼요. 신들이 노하시면 어쩌려고.”
“맞아요.”
미엘의 말에 맞장구치는 제랄딘을 보니 확실히 잊혀진 신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이런 신의 이름까지 빠짐없이 적어둔 주정뱅이가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건지도. 그 양반, 엘리시온에서는 뭐하고 지내려나.
“끙…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사기를 칠까. 너희들은 날 도대체 뭘로 보는 거야?”
“변태?”
“사기꾼?”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하지 않나 싶어서 유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잠시 동공지진을 일으키더니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다. 세상에, 유아 너마저!
“아아… 가장의 권위가…”
“킥킥.”
땅을 짚으며 좌절한 모습을 선보이자 셋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도 나름 심각한 상황인데 이렇게 마냥 화기애애해도 좋은 건가 모르겠다.
“아, 맞다.”
그때, 문득 유아가 손뼉을 짝 하고 마주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진이 걱정하는 건, 그러니까 잠시나마 의식을 잃은 사이에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때문이잖아요.”
“그렇지.”
얘가 웬 일이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고 그러나. 막 유아가 갑자기 똑똑해 보인다.
형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유아는 그 정도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듯이 이렇게 말을 잇는다.
“그럼 물어보면 되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응? 누구한테?”
“신께요.”
“…”
잠시 형진은 물론이고 미엘과 제랄딘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네. 그런 방법이 있었네.”
“왜 그 생각을 못했죠?”
“그러게요.”
본래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면 몰라도, 여기는 신이 엄연히 존재하고 대답도 곧잘 해주는 곳이다. 더구나 공포와 죽음이라면 관음보살스러운 취향상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다 보고 있었을 터.
“크흠. 그러면 날이 밝는 대로 물어보러 가자.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리칸과 정 반대 위치에서 일하는 지부장 하나 정도는 알아둘 걸 그랬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쪽이 밤이라도 얼마든지 가서 물어볼 수 있었을 테니.
어쨌든 대책이 세워지자 그들은 조금이나마 편하게 잠이 들었다가 아침이 되기가 무섭게 부랴부랴 그리칸의 지부장인 기젤을 찾아 옷가게로 향했다.
“어라, 여긴… 기젤님의 옷가게?”
“응.”
“설마… 이 분도 집행자였어요?”
“말 안했나.”
“안했거든요?”
유아한테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솔직히 형진도 헷갈린다. 혹시 말했는데 까먹고 이렇게 따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믿을 수밖에.
“그랬군.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 다행이네.”
“치.”
이제는 유아도 집행자들이 마냥 무섭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아는 터라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많은 집행자들이 주위에 있다는 것에 좀 놀라는 정도.
안으로 들어서자 고상한 자세로 혼자 소식지를 읽으며 차를 즐기고 있던 기젤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한다.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이렇게 한꺼번에 찾아오시고.”
“하하. 물을 것도 있고 겸사겸사 매상도 올려드릴까 하고요.”
“그건 참 반가운 일이군요. 그럼…”
기젤은 바로 여급들을 부르려 했지만 형진은 그런 그를 만류했다.
“아, 잠시만요. 이건 함께 들어야 할 얘기라.”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여기 앉으시지요.”
형진과 유아, 미엘, 그리고 제랄딘이 차례대로 자리를 나누어 앉자, 기젤은 차분하게 그들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아침이 되기가 무섭게 달려온 터라 아직 식사를 못한 그들은 따뜻한 차가 몸 안으로 스며들자 조금이나마 편안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자, 그럼 들어볼까요. 무엇을 묻고 싶으십니까.”
“실은 어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형진이 간단하게 스트란드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기젤은 쓰고 있던 외알 안경을 벗어서 닦으며 대답했다.
“스트란드. 그렇군요. 요새 주위가 소란스럽다 했더니, 그쪽에서 불경한 자들이 밀려들고 있었군요.”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이던 차에 잘 됐다는 식의 대답. 유아는 그런 기젤의 눈빛에서 살짝 섬뜩한 기분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형진의 손을 잡았다.
기젤은 유아의 그런 모습을 보고서야 아차 싶었던지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사과의 뜻을 비친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외알 안경을 정성스럽게 닦아서 본래대로 걸친 다음에야 형진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리고, 걱정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 문의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을요.”
스트란드쪽이 훨씬 규모가 큰 도시인 것 같은데 그쪽은 지부가 없는 건가. 그러고 보니 어제도 딱히 그쪽의 지부장을 만나보자는 얘기가 없었던 걸 보면, 스트란드도 이쪽 그리칸 지부에 속한 모양이다.
기젤은 잠시 눈을 감고 명상하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천천히 눈을 뜨더니 자신의 앞에 앉은 이들을 차례로 둘러보고는 형진에게 이렇게 답했다.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은 지닌 바 신물을 통해 보호와 균형의 힘이 작용해 그릇을 넓히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또한 의식을 잃은 동안 스트란드에서 벌어졌던 일은, 진님의 의지가 은연중에 발현되어 벌어진 것일 뿐이라는 전언이셨습니다.”
“그럼…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는 건가요?”
“아마도요. 물론 지금보다 더 큰 힘을 손에 넣으신다면 그때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보호와 균형은 약간 민폐스럽긴 해도 미친놈이나 폭력배의 민폐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하십니다.”
“아… 다행이군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기젤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비로소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역시 공포와 죽음. 보답으로 오늘 밤 화끈한 라이브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땡큐.
“그런데… 민폐스럽다고요?”
그때, 문득 미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괜찮다는 말에 안심하기는 했어도 그 부분이 다시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러자 기젤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바로 알아들으실 거라 하시더군요.”
“뭐라시던가요.”
기젤은 차를 한 잔 들이키고는 이렇게 답했다.
“그녀는 심각한 의존증입니다. 자신의 신물이 깨어났음을 알게 된다면, 조만간 진님을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뭐… 신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냥 막 굴리셔도 관심만 주면 아주 좋아할 테니까 부디 잘 이용해 먹으라는 것이 공포와 죽음께서 남기진 마지막 전언이셨습니다.”
“…”
형진은 물론이고 옆에서 그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세 여자 모두 잠시 황망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째서 기젤이 대답하기 전에 자신들을 먼저 돌아보았던 것인지.
“자, 잠시만요. 의존증이라뇨? 그리고 여신이라고요?”
“네. 뭐… 하지만 여신이라고 해도 아마 큰 힘은 없을 겁니다. 워낙 오랫동안 잊혀지다시피 해서. 아시다시피, 신의 힘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면이 있거든요.”
“그거야… 그렇다 쳐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보호와 균형은 진님을 더욱 놓치지 않으려 들 겁니다. 사실상 하나 뿐인, 어쩌면 마지막 추종자가 될 수도 있는 분이니까요.”
“…”
“하기야 그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잊혀졌다면 의존증이 아니라도 울고 불며 매달릴 만도 하죠. 어떤 의미에서는 망각이란 신에게 있어 죽음과도 같은 상태일테니까요.”
이번엔 의존증인가. 정말이지, 이곳의 신들은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인물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기야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공포와 죽음께서도 관음증이니 말 다한 것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