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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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미혹
살짝 잠이 들었던 여신이 다시 깨어났을 때, 이미 시간은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잠시 몽롱한 기분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던 여신은 뒤늦게서야 자신이 무방비하게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작은 아틀리에 안에는 이미 그녀를 제외한 어떠한 인기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창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보고서야 이미 밤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신이었지만, 그토록 정신없고 바쁜 하루를 보내다가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밤에 홀로 남겨지자 뭔가 가슴 한켠이 허전한 기분이 되어 버린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뒤늦게서야 어디선가 풍겨지는 고소한 냄새를 알아차렸다. 냄새가 느껴지는 방향을 살펴보니, 탁자 위에 덮개가 씌워진 채 놓여있는 쟁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얼른 다가가서 덮개를 들어 올려 보았다. 그러자 이내 너무나 황홀한 음식 냄새가 그녀에게로 화악 밀려든다.
“아…”
잠시 눈을 감고 온몸을 감싸오는 맛있는 향기를 만끽하던 여신은 이내 쟁반 한켠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깨울까 하다가 너무 곤히 잠드신 것 같아서요. 주무시다가 배가 고프시면 드세요. 유아 올림.
“고마워요…”
쪽지에 적힌 메모를 읽은 것 뿐인데 메이드복을 입은 채 생긋 웃으며 말하는 희망과 생명의 신녀 유아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다. 아직 음식은 먹지도 않았는데 가슴 속 한 구석이 뭉클하는 이 느낌은 도대체 뭔지.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킨 여신은 쟁반 안에 담긴 음식을 살펴보았다. 넓적한 모양의 아마도 토기의 일종이 아닐까 싶은 냄비에 해물이 그득하게 담긴 국물 요리가 담겨 있고, 그 옆에는 곁들여 먹을 빵과 와인이 놓여 있다.
더구나 요리를 담은 쟁반과 덮개는 도시락 용기처럼 내용물의 온도와 신선도를 유지시켜주는 룬이 새겨져 있는 특제품이라 여신 앞에 놓여진 음식은 막 만들어진 것처럼 따끈따끈하고 맛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쪽지 뒷면에는 이것이 어떤 요리이며 어떻게 먹으면 더 맛있는지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지금 그녀 앞에 놓인 이 음식은 까수엘라라고 불리는 스페인 요리다. 뚝배기 스타일의 냄비에 올리브 오일을 넣고 달군 후 마늘과 고추를 넣어 향을 내고, 마늘의 색이 변할 즈음 새우와 조갯살, 오징어 같은 갖은 해물과 허브, 소금, 화이트 와인을 넣고 중불에 푹 끓인 후 후추를 뿌려 마무리한, 이를테면 스페인판 해물 뚝배기라고 할 수 있는 요리다. 해물향이 우러난 올리브 오일에 빵을 적셔 먹거나 건더기인 해물을 빵 위에 올리는 식으로 곁들여 먹어도 된다. 여기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면 안주로도 그만.
음식은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은은하게 풍겨지는 향기와 쪽지에 담긴 정성만으로도 뿌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쪽지에 적힌 대로 빵을 집어 한쪽에 놓은 다음 그 위에 맛있는 향기를 풍기고 있는 새우 한 마리를 얹어서 먹어 보았다.
“우으으으음!”
마늘과 고추, 그리고 해물의 향이 적절하게 배어들어간 올리브 오일이 촉촉하게 스며들어간 빵의 풍미만으로도 이미 자신도 모르게 발버둥을 칠 것만 같다. 여기에 잘 익은 새우살이 입안에서 톡 하고 터지는 그 식감이라니.
빵 한 조각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자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지라 여신은 쟁반에 담긴 음식을 와구와구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앞서 식사 시간에 이미 그녀의 식사량을 파악해 두었는지, 언뜻 보기에는 체구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여신은 냄비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국물까지 빵으로 싹싹 발라 먹고서도 어쩐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우…”
맛있다. 정말 둘이 먹다 옆에서 전쟁이 터져도 모를 정도로 맛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아쉽다. 그렇게 잠이 들지 않았더라면, 이 맛있는 식사를 이 섬에 사는 마음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 너무나 아쉽다.
일단 쟁반 위에 다시 덮개를 씌워둔 여신은 다시 침대로 돌아가려다가 옆에 놓여진 작은 욕조를 보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욕조라고는 하지만 몸 전체를 담그고 목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그런 욕조는 아니다. 도너츠 형태로 만들어진 목조 의자 안쪽에 신선한 물이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었는데, 그곳에 발을 담그고 족욕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그런 아담한 욕조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이미 작동을 시켜두었는지 물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욕조 주변은 물론이고 수면 위에도 작은 꽃잎들이 동동 떠서 향기를 더해주고 있다.
여신은 가만히 치마를 끌어올려 작은 발을 드러내고는 욕조에 자리를 잡은 뒤 발을 물에 담갔다.
“아…”
고작 발을 담근 것뿐이다. 고작 그것뿐인데, 포근하면서도 싱그럽고 향기로운 물의 기운이 마치 발을 타고 몸 전체를 감싸오는 듯한 기이한 쾌감이 느껴진다. 뭐랄까. 몸 전체가 건강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피로가 발끝으로 사악 밀려서 빠져 나가버리는 그런 나른한 그 행복감이라니.
물론 그녀에게는 신체를 최적화시켜주는 균형의 권능이 있다. 하지만 그 권능은 아직 제대로 발현되지도 않은 상태이고, 설령 제대로 발현되더라도 이쪽이 더 기분 좋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잠시 발끝을 간질이는 물의 흐름을 즐기던 여신은 다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형진이 선물한 가구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옷장. 그 너머로 반쯤 누운 채 몸 전체를 기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소파가 보인다. 하지만 여신은 다음 순간 소파 너머로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얼른 욕조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온전한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커다란 감동에 젖어 들었다.
그곳에 놓인 것은 신상이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마치 푸른 바다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귀여운 요정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감탄하는 모습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채색이 되어 있지도 않고 재질도 고작해야 찰흙을 이겨 만든 것뿐인데, 이토록 생동감이 넘치다니.
여신은 잠시 너무나 커다란 감동에 젖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그는 정체가 무엇이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정말 공포와 죽음의 집행자가 맞는 걸까 싶은 생각마저 떠오른다. 사실은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어딘가의 알지 못하는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잠시 그 생을 즐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떠오를 정도다.
그렇게 잠시 감동에 젖어 신상을 바라보고 있던 여신은 다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확 붉어지고 말았다.
저 신상을 만들 때의 진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그의 손이 스쳐지나가며 그녀의 머리카락과 가슴과 허리와 다리의 굴곡이 완성되는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여신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진지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그 손끝으로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진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의 손끝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완성되어가는 신상의 모습을 어느 새인가 자신과 일체화시켜 버린 것이다.
너무나 망측한 생각에 여신은 금새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더 이상 신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얼른 침대로 돌아가 시트 위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결국 그녀는 그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형진의 눈빛이 떠올라 버린 탓이다.
“안녕하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피곤하시죠?”
“그냥 조금…”
“어쩜 좋아. 일단 이리 앉으세요. 금방 식사 준비가 끝날 테니까.”
“네.”
밤을 새버린 것보다는 이것저것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생각들 때문에 조금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신을 보자 유아는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주기 바쁘다.
여신은 그런 유아의 친절에 고마워하면서도 슬그머니 요리에 열중하고 있는 형진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얼굴에 아주 반짝 반짝 윤이 난다. 밤에 뭘 했는지 몰라도 아주 만족과 건강이라는 단어를 얼굴에 써붙여 둔 것 같은 그런 모습이다. 밤 동안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을 설쳤던 걸 생각하면 그 모습이 얄미울 듯도 싶은데, 이렇게 막상 얼굴을 보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쌓였던 응어리가 풀리는 듯한 느낌이다.
오늘 아침 메뉴는 새우 빠네 파스타. 빵 안에 크림소스 파스타를 넣은 건 마찬가지지만, 커다란 새우 두 마리가 빠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다르다.
여신은 자신의 몫으로 나온 아침 식사를 먹으며 새삼 어제 먹었던 까수엘라의 맛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음식은 모두가 함께 먹을 때 더 맛있는 것 같다고. 앞으로는 절대 식사 시간에 빠지지 말아야겠다고.
식사 시간이 끝나자 형진은 유아와 림에게 뒷정리를 맡기고는 다시 아틀리에로 향했다. 여신은 그런 형진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며 말했다.
“신상… 봤어요. 너무 멋져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어요.”
“신상이요? 아… 그걸 보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그건 완성품이 아닙니다.”
“네?”
그렇게 멋진 신상이 완성품이 아니라니? 여신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형진은 그런 여신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건 이를테면 스케치 같은 겁니다. 조각을 만들기 전에 미리 어떤 형태가 될지 만들어서 구도 등을 살피기 위한 것이죠. 어제는 시간도 늦었고 해서 본격적인 작품을 만들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시험작을 만들어 본 것 뿐입니다.”
“아…”
그게 고작 시험작이었다고? 자신을 하룻밤 내내 잠 못 들게 만들었던 그 아름다운 작품이?
“생각보다 구도가 잘 나온 것 같아서 오늘은 본격적인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하던 중입니다.”
“그렇… 군요.”
물론 그럴 생각이 있다면 찰흙으로 만든 시작품을 동상 같은 걸로 만드는 방법도 있다. 보존성을 생각하면 그쪽이 더 나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금속은 너무 차가운 느낌이라 신상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형진은 재료를 바꾸어 조각을 통해 완성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저기…”
“말씀하십시오.”
형진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며 아틀리에의 문을 열었다. 문 너머로 드러나는 신상의 모습에 여신은 다시금 얼굴이 붉게 물들어 버리고 말았다.
“저기… 그러니까… 저건 아무래도 너무 과장된 모습 아닐까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저는 저렇게 아름답지도 않고.”
“그럴 리가요. 엄연히 여신님을 직접 스케치해서 만든 것인데요.”
형진은 혹시 여신이 신상을 사람들에게 신앙의 도구로 공개하는 것에 대해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건가 싶었다. 실제로 많은 수의 종교들이 조각이나 회화를 우상이라고 여기며 반대하는 경향을 가지고는 하니까.
“여신께서는 이런 신상이 우상처럼 여겨지실 지도 모릅니다만, 사실 보통 사람들은 어렵고 복잡한 교리보다 이런 상징물을 더 쉽게 받아들입니다. 포교를 하는 입장에서도 단순히 보호와 균형이라는 이름만을 언급하는 것보다는 이런 식의 아름다운 신상 하나를 들여놓고 이 분이 바로 보호와 균형이십니다 라고 설명을 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죠. 그건 그만큼 여신의 이름이 더 빨리 효과적으로 퍼져 나가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그렇군요.”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그냥… 부끄러워서 말한 것뿐인데. 그리고, 다시금 그의 손을 통해 신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생각을 하니 너무 부끄러워서 그런 건데.
하지만 형진은 그런 여신의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신상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구에서만 봐도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확 하고 꽂히는 종교의 이미지는 성경의 글귀보다는 성모 마리아상이나 불상 같은 것들이니까. 우상 숭배를 멀리하라고 설교 하는 목사의 등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이 아무렇지 않게 걸려 있는 건 그래서다. 단 하나의 상징물조차 존재하지 않는 종교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래도 가만 놔두면 하루 종일 설명할 기세라 여신은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았습니다. 진님의 뜻에 맡길게요.”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이럴 때 보면 똑똑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모르겠다. 하기야 인간도 아니고 여신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볼 정도의 존재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