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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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미혹
잠시 갈팡질팡하는 기미를 보였던 보호와 균형을 훌륭하게 설득했다고 착각하며, 형진은 아틀리에 한켠을 말끔히 치우고는 어젯밤 미리 의뢰를 통해 주문해 두었던 최고급 대리석을 들여놓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신상은 대리석이 제격이다. 새하얀 대리석에 조각된 신상은 설령 그 종교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번쯤 감탄하며 돌아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법이니까.
물론 모든 신전에 들여놓을 신상을 대리석으로 조각할 생각은 아니다. 다른 신전에 들여놓을 신상은 그냥 도자기식으로 만든 다음 하얀 유약을 바르는 정도로 충분하다. 지금 만들 신상은 일단 이 섬에 만들 작은 신전에 들여놓았다가, 나중에 보호와 균형의 제대로 된 신전이 들어서면 그곳에 옮겨놓을 생각이다.
사실 현대에 남겨진 하얀색의 신상이나 조각은 원래 모습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제껏 순수한 하얀색으로 대표되던 이런 아름다운 조각품의 대부분은 본래 채색된 작품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혹시라도 흔적이 남았던 경우에도 그것을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성실한 고고학자들에 의해 깨끗하게 닦여졌을 정도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무채색의 하얀색 조각상은 어떻게 보면 오해로부터 시작된 왜곡된 미의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실제의 모습으로 채색 복원된 작품들은 오히려 사람들의 눈에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고아한 느낌마저 전해지던 무채색의 작품들에 알록달록한 색깔이 덧입혀지는 순간, 어쩐지 백화점 마네킹을 보는 것 같은 부담스러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현실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는 어찌 보면 채색된 조각상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을 표현한 것이라면 모를까, 여신을 표현한 신상이라면 굳이 현실성에 주안점을 두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 아닐까.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일단 목탄으로 석재 위에 대략의 스케치를 했다. 미리 찰흙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지 준비를 했다고는 해도 대략의 위치는 가늠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스케치가 끝나자 곧바로 작업이 시작된다.
대리석은 본래 변성암이기 때문에 조직이 치밀하고 견고하며, 방향성이 균일해서 깨지는 경향이 덜하다. 게다가 색이 미려하고 연마할 경우 매끈한 질감을 얻기 쉽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조각의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열과 산에 약하다는 것이지만, 비가 맞지 않도록 실내에 들여놓고 화재에 주의한다면 매우 오랫동안 그 형상을 유지할 수 있다.
형진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자, 보호와 균형은 소파에 앉은 채 그 모습을 홀린 것처럼 지켜보았다.
톡톡 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이 깎여 나간다. 처음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던 하얀색 돌덩어리가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형상을 갖추어 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신비해서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 유아가 슬며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 때도 설마 아침나절이 훌쩍 지나 점심때가 되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유아는 소파에 앉아 있던 보호와 균형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손가락을 들어 가만히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자신이 들여 보고 있다는 사실을 형진에게 알리지 말라는 뜻이다. 유아는 이 집의 식구들 중 누구보다도 형진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고, 때문에 이렇게 무언가에 열중하기 시작한 상태의 형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유아는 여신이 가만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자, 살짝 손짓해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는 여신을 문 밖으로 데리고 나온 뒤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같이 가요.”
“네? 하지만… 진님은…”
“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도핑하면서 계속 뭔가를 먹을 테니까요. 오히려 저렇게 열중하고 있을 때 누가 방해하고 그러면 어린 애처럼 짜증낼 때도 있으니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요.”
“아하.”
여신은 그럴 듯 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아를 따라 조리장이 있는 마을 중앙으로 향했다.
“유아님, 진님은 역시나 작업에 열중하고 계신 겁니까?”
“네, 오귀스트님. 아쉽지만 점심은 우리끼리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대답은 오귀스트에게 했는데 그 옆에 앉아 있던 할이 실망 가득한 탄식을 내뱉는다. 식구가 되고 처음의 며칠 동안은 천벌 때문에 고생했지만, 도박 버릇만 빼면 성격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인지 금새 오귀스트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 틈엔가 식구들 틈에 완전히 녹아들어 버렸다.
어쨌든 유아와 림이 주축이 되어 요정들이 점심 식사 준비를 시작하자, 식구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채 저마다 얘기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하마란님.”
“네, 제랄딘님.”
“조만간 신전에서 식료에 대한 납품 계약을 맺으려고 합니다. 도움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오귀스트가 묻는다.
“본격적으로 음식점을 시작하는 겁니까?”
“네. 숙련 단계에 들어선 사제 분들이 나와서 일단 그 분들을 중심으로 시작해 보려고요.”
“한꺼번에 여는 것이 아니라요?”
“맞아요. 사실 음식점을 열었을 때 어떤 식의 시행착오가 일어나는지 저는 물론이고 사제 분들도 모르는 면이 많기 때문에, 우선 몇 군데를 시범적으로 열어서 확인을 해보려는 거에요.”
“과연. 그런 것이로군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카트린이 끼어들었다.
“그리칸에서도 열어요?”
“응. 음식점 열 때 다 같이 가볼까?”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카트린 같은 귀여운 손님이라면 누구든 환영할 걸. 친구들도 좋아할 거야.”
카트린과 제랄딘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하마란은 그들의 대화가 끝나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계약의 공증을 맡기실 생각입니까?”
“네.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 원하시는 지역과 일시를 알려 주십시오. 늦지 않으려면 미리 출발해야 할 테니.”
“그럴게요.”
보호와 균형은 대화에 끼지는 못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며 식사를 마치고 난 그녀는 다시 아틀리에로 돌아가 형진이 조각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날이 저물어 어둑해지자 그제서야 형진은 작업을 멈추고는 등불을 켠 다음 공구를 정리했다.
“후… 이거 오랜만에 하려니까 꽤 힘드네.”
그렇게 말하며 송글송글 맺힌 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던 형진은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자신을 지켜보는 여신의 시선을 느끼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루종일 그렇게 계셨던 겁니까?”
“네.”
“저런. 하다못해 카트린이랑 회합장이라도 가 계시지 않고.”
아차. 여신은 그제서야 자신이 카트린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심 먹을 때 뻔히 있는 걸 봐놓고서도 신녀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녀와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여신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모든 일을 잊을 정도로 누군가가 일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던 자신을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작업 끝난 거에요?”
그때 아틀리에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제랄딘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더니 작업을 멈춘 형진을 발견하고는 그렇게 묻는다.
“응. 날도 저물어 가니 오늘은 이쯤 해두려고.”
“그럼 가요. 오늘은 오귀스트님이 이만한 생선을 잡았어요.”
“그래?”
제랄딘의 손에 이끌려 조리대로 간 형진과 여신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말할 때 손을 크게 벌리는 모습을 단순히 과장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란 물고기가 기절한 채 조리대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돗돔? 다금바리? 자이언트 그루퍼?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쪽 물고기가 아닐까 싶다.
“이런 게 바다에 있었습니까?”
놀란 형진의 물음에 오귀스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먹이를 쫓다가 들어온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환초 안쪽에서 뭔가 거뭇한 놈이 보이길래 하마란님과 둘이 들어가서 잡아왔습니다.”
“허…”
하마란이랑 둘이 바다에서 뭘 했냐고 묻고 싶지만 일단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기절한 물고기를 만져보니 살이 딴딴한 것이 제법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이거 참. 오늘은 대충 먹으려고 했더니 이렇게 가만히 놔두질 않는군요.”
“하하하.”
“유아, 해체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준비해줘.”
“네.”
곧바로 피를 빼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들어낸 다음 살을 발라낸다. 얼마나 살이 딴딴한지 칼질도 쉽지 않을 지경이다.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생선을 해체 하는 과정이 끝나자, 형진은 본격적인 요리 준비를 시작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커다란, 그것도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이라면 역시 회가 생각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연 상태의 생선은 기생충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냉동과 해동의 과정을 거치면 이런 문제는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구에서나 통하는 얘기고 이곳에서는 또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형진은 잠시 조금 더 고민하다가 스테이크와 찜을 하기로 했다. 신농씨도 아니고 먹는 것 가지고 자기몸을 학대할 이유는 없는 일이니까.
먼저 준비하는 것은 찜.
팬에 버터 한 덩이를 넣어 녹인 다음, 마늘을 넣고 향이 살짝 나도록 볶아준다. 마늘 향이 올라온다 싶을 즈음 양파를 넣어주고, 양파가 색이 노릇해질 정도가 되면 깍둑썰기로 자른 토마토와 함께 고추와 레몬 쥬스, 소금, 후추를 넣어 익힌다.
이렇게 넣은 야채가 어느 정도 익으면 그 위에 두툼하게 저민 생선살을 올린다. 다시 그 위에 아래쪽에 깔린 야채 일부를 퍼서 덮고 레몬 조각을 얹은 다음 중불에 올려둔 채 뚜껑을 덮어 그대로 푹 찌기만 하면 된다.
찜의 준비가 끝나자 이번에는 스테이크를 굽는다. 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두툼하게 썰어낸 생선살을 올린 뒤 일전에 카레를 만들고 남은 향신료와 함께 소금을 뿌려 굽는다. 요리법은 간단하지만 재료가 좋으니 굳이 더 손을 댈 필요도 없다.
“잘 먹겠습니다!”
“후아아아! 이거, 살살 녹는데요?”
“하마란님, 내일은 저랑 같이 바깥 바다를 좀 돌아보죠.”
“됐어요.”
“그런!”
시끌벅적한 저녁시간이 끝나고 다시 밤이 찾아온다. 그리고 여신은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
아틀리에 한쪽 구석에 놓여진 만들다만 조각상을 보며 여신은 한숨을 푸욱 내쉬다가, 제법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그 조각상이 완성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더 지난 뒤의 일이었다.
“우와아아아.”
“머, 멋지다.”
“세상에. 이걸 정말 진님이 만든 겁니까?”
만드는 과정을 전부 지켜보긴 했지만, 여신은 그것이 마침내 완성되고 나서야 어째서 형진이 찰흙으로 만든 작은 신상을 스케치 같은 것에 불과하다고 한 것인지 절실히 이해했다.
사람의 키보다 좀 더 큰 크기의 그 조각상은 회합장에서 보았던 인간 크기의 여신을 일대일로 형상화해서 만든 것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실물대 크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모습을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는데, 형상 자체가 하늘로 떠오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이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공 효과로 인해 자연스럽게 보는 이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체력을 일시적으로 상승시키는 효과 또한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여신의 권능에 의한 효과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이 신상이 지닌 영험함을 우러르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의 이름은 ‘부활’. 원래는 이곳에 놔두려고 했는데, 그리칸이든 어디든 적당한 신전에 들여 놓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요. 이 정도 작품이라면 사제들이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도들의 가슴에 보호와 균형이라는 이름이 쉽게 각인될 테니까요.”
그렇게 형진과 유아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홀린 듯이 그 작품을 바라보고 있던 보호와 균형이 가만히 신상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상의 머리에 닿는 순간 영롱한 빛이 확 하고 피어오른다.
============================ 작품 후기 ============================
어라, 작품설정에 올린 그림이 바로 보이는 건가요?
모바일에서만 되는 기능인가.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원래 각편에 해당하는 작품 설정은 작품 설정 목록에서도 바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참고하려고 올려놨던 겁니다.
거슬리신다면 지우겠습니다. 말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