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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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돌파
스스로 불을 끄길래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역시 미친놈은 미친놈일 뿐이다.
일단 급히 공격을 피하긴 했지만 이래저래 난감하다. 그냥 평범한 미친놈이라도 상대하기가 난감한데, 미엘과 아는 사이라면 그냥 막 죽여 버리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엘! 잠만 자지 말고 설명 좀 해봐!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크크!] [대충 감 잡았을 텐데요.] [그러니까, 대충 말고 정확한 설명을 해보란 말이야!] [친동생은 아님. 안 본지 꽤 되었음. 나도 쟤가 미친놈한테 귀의한 건 몰랐음. 예전부터 좀 귀찮게 따라다니고 그런 면이 있긴 했는데 안 본 사이에 저렇게 본격적으로 맛이 갔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음. 적당히 두들겨 패서 정신 좀 차리게 해주길 바래요. 임산부는 숙면이 필요해서 이만.] [이럴 때만 임산부냐!]형진이 메시지를 써 넣었지만 미엘은 귀찮다는 듯이 다시 또아리를 틀고 쿨쿨 잠이 들어버린다. 이런 나쁜 마누라를 보았나. 지금 남편이 타죽게 생겼는데 잠이 오냔 말이다!
속이 타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만큼 형진의 실력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다가 바꿔 생각해 보면 미엘의 여동생을 자처하는 저 녀석은 아직 발정기를 마무리 짓지 못했을 테니 흑요호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터. 그것은 다시 말해 10인분 상태의 미엘과는 현격한 전력차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문제는 저 미친놈의 불꽃만 어떻게 잘 처리하면 된다는 얘긴데.
하지만 본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도 불꽃 자체의 속성인지 엄청난 속도를 가지고 공격을 하고 있어서 피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꽈광!
“이크!”
이전에 보았던 제랄딘의 연속 꼬리치기와 같은 느낌의 공격이 하엘의 꼬리를 통해 펼쳐진다. 잠깐. 본신의 힘을 못 쓰는 거면 꼬리도 못 써야 하는 거 아닌가. 미엘은 본신의 힘을 해방시키기 이전에는 꼬리도 드러내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혹시 미엘 쪽이 나이가 많다보니 발정기를 견디는 게 어려워서 그만큼 힘을 더 아끼고 있었던 건가.
“도망치지 맛!”
“농담이지? 그걸 그대로 맞으면 죽는다고!”
“그냥 죽어!”
“어이, 아무리 그래도 형부한테 너무 말을 막 하는 거 아니야?”
“너 따위를 형부라고 부르느니, 차라리 죽어 버릴 거야!”
“처제, 말이 너무 험하잖아?”
“닥쳐!”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애꿎은 산은 하엘이 쏟아 붓는 불꽃놀이에 휘말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건조한 겨울철이다. 그런 상황에 작심하고 불꽃을 휘두르는 미친년 하나가 등장하니, 주위의 산이 모조리 불길에 휩싸이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다.
숨죽인 채 나무 둥치나 토굴 속에서 겨울을 보내던 동물들은 갑자기 일어난 이 천재지변에 놀라 급히 도망을 치기 시작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더니 그야말로 딱 그짝이다.
“젠장!”
미엘과의 계약으로 얻은 힘을 발휘해 녀석의 불붙은 채로 미쳐 날뛰는 하엘의 꼬리를 막아보려 했지만, 원판과 짝퉁의 차이는 애초에 극복할 여지조차 없었다.
어쩐다.
일단 꼬리 몇 개 정도 잘라 놓고 생각해 봐야 하나.
그런데 저 꼬리 잘려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미엘이 꼬리를 툭툭 분리해서 분신으로 써먹고 그러는 거 보면 잘려도 별 의미 없는 일일 것 같은데.
[우… 시끄러.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아직도라니.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는 거 안 보여?] [제압하기가 곤란해서 그런 건가요?] [맞아. 무슨 좋은 방법 없어?]그냥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몇 배나 힘든 일이란 걸 이렇게 다시 뼈저리도록 느끼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형진의 말에 미엘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렇게 말했다.
[지금 혹시 인벤토리에 케이크 같은 거 들어 있나요? 수플레라든가, 쿠키라든가. 아무튼 달콤한 것 위주로.] [있긴 하지. 그건 왜?] [그중에 특제 요리는?] [있어.] [그럼 그거 꺼내서 던져 줘봐요.] [뭐?] [이유는 묻지 말고요. 던져 주면 어떻게 된 일인지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요.] […]이 여우 같은 마누라가 무슨 꿍꿍이인거지.
형진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지만, 달리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일단 미엘의 말대로 인벤토리에서 막 구운 따끈한 수플레 하나를 꺼내 멀찌감치 던졌다.
“!”
그러자 하엘은 잠시 움찔하는 듯 했지만, 이내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가해왔다.
[안 통하잖아!] [그렇게 말고요. 녀석의 입이 있는 곳을 향해서 던져야죠. 강아지한테 물어와 시키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 그런가. 이크!]다시금 세차게 몰아치는 꼬리 공격을 환영의 반딧불로 간신히 피한 형진은 인벤토리에서 달콤한 향기 가득한 와플파이를 꺼내어 꼬리 공격 후 드러난 하엘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헙!”
하엘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무언가를 무의식중에 손으로 쳐서 날려버리려다가, 거기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맡고는 본능적으로 입을 사용해덥석 물었다.
이런!
그렇게 반응해 놓고도 이게 뭔 짓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던 하엘. 그러나 그 생각은 채 1초도 그녀의 뇌리에 머물지 못하고 마치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리는 무언가에 휩쓸려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후와우와와와…”
그녀의 입으로부터 언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향긋한 버터향 가득한 와플 속에 어우러진 달콤한 딸기잼과 부드러운 바닐라, 그리고 새콤달콤한 과일의 과육이 어우러지는 그 맛이라니!
순식간에 그녀의 이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죽일둥 말둥 하면서 형진을 몰아치던 것도 잊고 오직 입에 물고 있는 와플 파이 하나에만 모든 생각이 집중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항거할 수 없는 유혹이었고, 또한 항거할 수 없는 쾌락이었다. 미엘이 그랬듯이, 하엘 역시 형진이 건넨 특제 요리의 마력에 너무나도 쉽게 함락되어 버린 것이다.
아니 미엘은 차라리 나았다. 최소한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된다는 식의 생각을 떠올릴 여유라도 있었으니까. 실수로 먹고 나서도 얼른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어 몸 안에 피어오르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라도 할 틈이 있었으니까.
하엘은 미친 듯이 형진을 공격하던 것도 잊고 입으로 받아든 와플을 와구와구 먹어치우다가 그 달콤함에 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만 했다.
“마시써… 후윽!”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몸 안에서 강렬하고도 뜨거운 기운이 확 하고 일어나는 듯한 기분에 하엘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몸을 감싸고 있는 파괴와 재생의 불꽃과는 확연하게 다른, 마치 몸의 세포 하나 하나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듯한 그 기이한 열기라니!
“너 이 자식! 음식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거냐!”
“무슨 소리야. 누가 들으면 독이라도 풀었는 줄 알겠네.”
“아니라고? 하지만…”
“허, 이거 참. 잘 보라고.”
형진은 억울하다는 듯이 인벤토리에서 특제품 와플 파이를 하나 꺼내더니 보란 듯이 맛있게 냠냠 먹어대기 시작한다.
막 구워서 따뜻한 와플 안에 잼과 크림, 그리고 과일을 하나 가득 담은 와플 파이 하나가 게눈 감추듯 형진의 입 속으로 사라지자 지켜보고 있던 하엘과 여신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여신님도 드실래요?”
“감사합니다.”
여신은 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주머니 속에서 맛있게 와플 파이를 먹는 모습을 보며 군침만 꼴딱꼴딱 삼키다가 형진이 새 와플 파이를 꺼내어 주자 마치 생쥐처럼 열심히 그것을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그 조그마한 몸집 어디에 그게 다 들어가는지, 정말 우주의 신비가 느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꼴깍.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을 보며, 군침만 꼴딱꼴딱 삼키는 흑요호가 여기 또 하나.
맛을 보지 않았다면 모르되, 이미 맛을 봐버린 시점에서는 이미 항거할 방법이 없다. 그것을 먹는 모습은 물론이고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향기마저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먹고 싶다. 나도 먹고 싶다. 주머니 속에서 상반신만 드러낸 채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와플 파이를 와구와구 먹어대는 저 기묘한 존재의 입가에 붙은 잼과 크림이라도 핥아 먹고 싶다.
눈치 빠른 형진은 그런 하엘의 기색을 손쉽게 알아차리고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와플 파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렇게 맛있는 걸 독이 들었네 뭐네 하면서 폄하하다니. 뭐 할 수 없지. 우리끼리라도 맛있게 먹어치우는 수밖에.”
“…”
이미 주변은 하엘이 퍼뜨린 불꽃 때문에 시뻘건 화염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참상을 만들어 놓은 존재들은 와플 파이 하나 가지고 줄까 말까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편안하게 겨울잠 자다가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동물들 입장에서는 정말 이게 뭔 미친 짓인가 싶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엘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다시 거기에 뒤섞여 피어오르는 기이한 열기 때문에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먹고 싶다. 먹고 싶은데 여기서 저걸 먹고 싶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쩐지 굴욕적으로 느껴진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박살을 내버리고 싶은데, 또 막상 형진이 손에 들고 있는 와플 파이의 모습과 향기를 접하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헤벌레 풀어져 버린다. 도대체 저것이 무엇이기에 자신을 이토록 번뇌에 휩싸이도록 만든단 말인가!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받아!”
“헉!”
바로 그때, 갑자기 형진이 다시 한 번 하엘의 얼굴을 향해 와플 파이를 던졌다. 순간 하엘은 자신도 모르게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이성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형진이 던진 와플을 향해 꼬리를 휘둘렀고, 본능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받아먹기 위해 입을 내밀었다. 하지만 결과는 훨씬 더 긴 거리를 타격할 수 있는 꼬리의 승리.
와플 파이는 순식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 어어…”
눈앞에서 티끌조차 남기지 못하고 재가 되어 버린 와플 파이의 모습에 하엘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형진은 그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찼다.
“쯧, 모처럼 사람이 선의를 베풀면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어라?”
하지만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하엘의 몸에서 불꽃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녀의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에? 울어?”
“흑… 흐극… 흑… 우와아아앙!”
“…”
당황한 형진의 눈앞에서 하엘은 이내 그대로 퍼질러서 엉엉 울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의 울음에 호응하듯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형진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가가서 달래자니 다시 미친년으로 변모하여 덤벼들 것 같아 무섭고, 그렇다고 가만 놔두자니 어쩐지 철모르는 애를 울린 것 같아서 뭔가 안쓰럽고.
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시 인벤토리에서 와플 파이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하엘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는 잼과 크림, 그리고 과일외에 추가로 아이스크림까지 들어간 특별 버전 와플 파이다.
하엘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형진과 와플 파이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그것을 받아들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어쨌든 한 고비는 넘긴건가.
하지만 아직 안도하기엔 이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골칫 덩이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여신님.”
“네?”
“혹시 고용 계약서라는 거 아십니까?”
“고용 계약서요?”
여신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형진이 이런 저런 설명을 덧붙이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아요.”
고용 계약서는 바로 이전에 림과 처음 만났을 때 공포와 죽음께서 내려 주셨던 물건이다. 림과는 사제 관계로 묶인 덕분에 그것을 사용할 일이 없었지만, 이후 하마란과 만나게 되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그녀의 난동을 제약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다시 내려주시지 않는 이상 같은 물건을 다시 얻기는 힘든 일. 하지만 그의 곁에는 비록 약하긴 하지만 엄연히 여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존재가 있다.
“이거 말이죠?”
여신은 곧바로 고용 계약서를 만들어서 보여주었다.
“오, 맞습니다. 그걸 저에게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에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네?”
조건이라니. 순간 형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호구스럽기로는 신중에서 제일이 아닐까 싶은 보호와 균형이 무려 조건을 건 것이다!
그런 놀란 기색을 눈치 챈 것일까. 보호와 균형은 조금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와플 파이 하나 더 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