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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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장악
살짝 잠이 들었다.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봐서 그런지 검은 토끼가 자꾸만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는 이상한 광경을 꿈에서 보았다. 몇 마리나 넘어오나 하고 세어 보다가 백 마리쯤 되었을 때,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귀스트님! 오귀스트님!”
“으음… 네?”
얼른 눈을 떠보니 하마란이 급한 표정을 지은 채 그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벌써 밤이 되었나.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오귀스트는 이내 정색을 하고 하마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 그래봐야 뒷머리가 떠 있는 상태라 폼은 안나지만.
“진님이 급히 찾아요. 던전에 문제가 생겼대요.”
“네?”
오귀스트는 황급히 코어 관리 화면을 띄우고는 상황을 살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대미궁의 악마 사건 이후로 잠잠하던 파스파 왕국 방면의 미궁에 대규모의 인원이 침입해서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지. 오귀스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형진에게 달려갔다.
진은 마침 장비를 갖추고 어디론가 가려던 참이었다.
“아, 오셨군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형진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카트린이나 유아가 듣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죽이지 않고 쫓아내기만 한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습니다.”
“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많은 인원을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이 내쫓았다면 상대가 아량을 베푼 것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 파스파 왕국의 인간들은 그것을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제약이 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식으로. 그리고 그 생각은 어차피 죽지 않는다면 한번쯤 전력을 투입해 도전해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발상으로 이어진 것이리라.
어리석은 일이다. 형진이 그들을 죽이지 않고 내쫓은 것은 굳이 그럴 필요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파스파 왕국의 공략대 가운데 가장 핵심 전력인 하엘을 빼돌렸으니, 그런 조무래기들을 때려 잡아봐야 입맛만 버릴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인 줄도 모르고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하루살이들이 다시 미궁의 공략에 나섰다. 질이 안 되면 양으로라도 밀어붙이겠다는 건가.
사태를 파악한 오귀스트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돕겠습니다.”
그러자 형진은 오귀스트 옆에 선 하마란의 모습을 흘깃 보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지만, 오늘 오귀스트님은 선약이…”
기껏 자고 있던 사람을 급히 불러들인 주제에 이제와서 무슨 소린지. 아마도 하마란에게 원망을 듣지 않으려는 면피인 모양이었지만 오귀스트는 미처 그런 형진의 꿍꿍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거라면…”
하지만 오귀스트가 대답하기도 전에 하마란이 나서며 대답한다.
“파스파 왕국은 감히 신뢰와 헌신을 능멸한 자들. 저 역시 수호자를 대표해 이 일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이런.”
하마란의 그와 같은 말에 진은 잠시 혀를 차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면피나 하려고 꺼낸 말인데 하마란까지 끼어들게 생겼으니 이번엔 오귀스트의 원망을 듣게 생겼다. 그래서 오귀스트의 분위기를 슬쩍 살폈지만 그는 의외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마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건가. 하기야 그 정도는 감안하고 사귀는 것이겠지만.
“알겠습니다. 두 분의 생각이 그렇다면 말릴 수 없겠죠. 하지만 그 전에 치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배후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두 분께서는 명실상부한 대미궁의 악마가 되어 주셔야 하겠습니다. 여신님.”
“네. 진님.”
여신은 붉은 빛이 감도는 검은 털빛의 흑요호 위에 얹어진 품위 있는 안장 위에 올라탄 채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하엘. 두 분과 계약을 맺어주세요.”
“…”
하엘은 찍 소리도 못하고 오귀스트와 하마란에게 다가가 그들의 손가락을 살짝 무는 것으로 계약을 진행했다. 계약을 맺으면서도 억울하다는 듯이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꽤 처량해 보였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정상적인 계약이 아니라서 흑요호의 힘을 제대로 쓰는 건 사실 무리다. 하지만 그것은 형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그가 바라는 것은 외형적인 부분만을 발현해 신분을 감추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오귀스트나 하마란은 굳이 흑요호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강한 힘을 갖춘 이들이기 때문이다.
“새로 얻은 힘을 사용하는 것이 좀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이 힘을 통해 모습을 완전히 숨긴 상태에서 움직이시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지만…”
하마란은 신뢰와 헌신의 이름을 감추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렇게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형진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그녀의 말을 막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 여기서 신뢰와 헌신의 이름을 드러내면 다른 수호자들이 신을 능멸한 죄를 묻지 못하잖아.”
“아… 그렇군요. 무슨 얘긴지 알겠습니다.”
하마란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혼자 나서서 벌을 주는 것과 수호자들이 힘을 합쳐 벌을 내리는 건 확실히 차원이 다른 일임을 이해한 것이다.
준비가 끝나자 형진은 미궁에 진입한 파스파 왕국 공략대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요정의 문을 열었다.
“저는 여신님과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두 분은 함께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요정의 나라로 우선 이동하자 형진은 미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먼저 가십시오. 저쪽에서 뭔가 준비한 것이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그럼 이만.”
오귀스트는 하마란과 함께 미궁으로 이동하기가 무섭게 방금 하엘과의 계약을 통해 얻은 환수 강령의 스킬을 사용해 온 몸을 검은 기운으로 감쌌다.
우선 가장 가까운 코어의 정보를 확인했다. 적어도 열 팀 이상의 공략대가 동시에 움직이며 던전을 공략중인 것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수가 많군요. 저런 식이라면 리젠이 되었을 때 큰 피해가 생길 수도 있는데.”
“가장 가까운 적은 어느 쪽이죠?”
“이쪽 방향입니다. 잡으세요.”
“네.”
오귀스트는 장비를 갖추고는 하마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동 스킬이 없는 그녀는 순순히 오귀스트의 손을 맞잡았고 둘은 곧바로 던전을 빠른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달려가면서 오귀스트는 속으로 혀를 찼다. 모처럼 좋은 일을 앞두고 이게 무슨 일인지. 마치 누가 꼭 하늘에서 내려다 보며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잠시 달리자, 임프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한 무리의 공략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동시에 칩니다.”
“네.”
오귀스트는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긴 후 그녀의 등을 밀어 주었고, 하마란은 그 반동을 이용해 허공으로 튕기듯 날아올라 그대로 공략대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헉!”
“막아!”
전방을 막아내고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들고 있던 방패로 그녀의 강습을 막아내려 했지만, 분노한 신의 힘이 가득 담긴 그녀의 발차기가 방패째로 그들을 찍어 누른다.
“컥!”
“악마다! 대미궁의 악마다!”
검은 기운을 전신에 두른 하마란의 강습은 공략대를 단숨에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들의 악몽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푹!
“커헉!”
놀란 와중에도 하마란을 향해 석궁을 겨누던 트래커가 등 뒤에서 떨어져 내린 칼날에 피를 뿌리며 엎어진다. 갑작스럽게 후방의 인원이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그렇지 않아도 혼란에 빠져 있던 공략대는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애초에 좋게 좋게 쫓아낼 때 그냥 얌전히 있었으면 이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이들 중에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온 자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전쟁이나 다름없는 상황. 전쟁에 나선 자 치고 억울하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는가.
“뒤, 뒤에도 있어!”
“이럴 수가! 한 마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마리라니. 님이라고 불러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하기야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몬스터 취급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물러나요!”
그때 대열 중간에서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략대 인원들이 허겁지겁 옆으로 갈라서며 하마란 주위에서 물러선다.
화악!
그리고 쏟아지는 빛줄기.
이것이었나. 이들이 믿고 있던 비장의 무기가.
오귀스트는 하마란에게로 쏟아지는 빛줄기를 보며 화들짝 놀라 그것을 사용한 여자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이내 한줄기 사자후와 함께 커다란 폭음이 던전 안을 뒤흔든다.
“큭!”
손을 들어 터져 나오는 폭발의 섬광을 막아낸 오귀스트는 급히 하마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사자후를 발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무언가를 튕겨 내고는 그것을 사용한 여자를 향해 이미 덤벼드는 중이었다.
“컥!”
마법사였던 모양인지 그 와중에도 결계를 발동하려 했지만, 미처 완성되지 못한 결계 따위 수호자의 주먹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아니, 완성되었다 할지라도 분노한 수호자의 주먹이라면 단숨에 깨부수고도 남음이 있다.
여자 마법사는 하마란이 휘두른 주먹에 피를 뿜으며 날아가 처박혔고, 곧바로 마법인지 마법물품인지 모를 공격을 피하기 위해 대열이 흐트러진 공략대를 향해 성난 임프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크악!”
“컥!”
대열도 흩어지고, 정신마저 공황 상태에 빠진 공략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막아보려 해도 잔뜩 화가 난 임프들과 그 녀석들보다도 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하마란의 공격을 막아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략대들은 피를 뿌리며 모두 죽어 넘어졌다.
“괜찮소?”
“네, 뭐…”
하마란은 오귀스트가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걸자 그제서야 씨근덕거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분노를 갈무리했다.
원래는 마법 물품에 의해 공격을 받았을 때 상당히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공략대를 쳐죽이는 동안 수호자의 회복 능력이 그녀가 입은 부상을 말끔히 치료해 놓았다. 다만 입고 있던 옷은 그런 식으로 회복시킬 수가 없는지라 여기저기 맨살이 드러나 있는 상태였으나 그것도 흑요호의 힘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임프들은 공략대를 모조리 처치하자 주춤거리며 그들에게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다. 자신들을 도운 것을 보면 같은 편인 것 같긴 한데, 또 그렇다고 그냥 같은 편으로 인정하고 마음을 놓기엔 뭔가 불안한 탓이다.
“저 녀석들은 어쩌죠.”
“놔둬요. 어차피 죽여 봐야 다시 리젠될 테니까.”
“그렇군요.”
오귀스트는 하마란의 일격에 가슴이 함몰된 채 죽어 넘어진 여자 마법사에게서 그녀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마법 물품을 회수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폭염의 반지
등급 : 희귀
착용제한 : (일정 이상의 집중력, 정신력 보유)
설명 : 화염의 힘을 한 점에 모아 돌풍처럼 쏘아내는 반지
효과 : 스킬 ‘블래스트 파이어’ Lv.15 사용 가능 (하루 3회)
강화시 효과 : 스킬 ‘블래스트 파이어’ 효과 증가. 낮은 확률로 공격력 증가.
“설마 이걸 믿고 덤빈 건가.”
오귀스트는 혀를 찼다. 레벨 15의 스킬을 별도의 준비시간 필요없이 하루 3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은 확실히 대단한 바가 있지만, 파스파 왕국의 베이스 캠프를 죄다 박살내고 공략대를 죄다 쫓아내버린 대미궁의 악마를 상대하기엔 뭔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닐 거에요. 아마 이 여자가 가진 비장의 무기 같은 것이었겠죠.”
“하긴.”
오귀스트는 반지를 하마란에게 건네며 말했다.
“가져요.”
“제가요?”
“물론 수호자의 힘은 충분히 강하지만, 원거리에서의 견제 수단을 하나쯤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겁니다. 당신이 쓰러뜨린 적의 물건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하마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귀스트가 건넨 반지를 손에 꼈다. 하지만 오귀스트가 장만해 준 것도 아니고, 전투중에 얻은 전리품에 불과한데도 이 순간 그녀의 볼을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물론 그녀의 몸을 에워싸고 있는 흑요호의 힘 때문에 미처 오귀스트는 그런 하마란의 모습을 미처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들은 다른 공략대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즈음, 형진에 의해 불려온 십여 명의 수호자가 파스파 왕국의 왕성 정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미궁의 악마는 설정상 미궁을 나갈 수 없는 몸. 이건 다른 왕국의 또다른 개입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다. 만약 대미궁의 악마가 미궁에서 벗어나 어딘가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자위적인 차원에서라도 각국은 전력을 다해 그것을 토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호자라면 그런 제약이 없다. 게다가 이미 파스파 왕국은 신뢰와 헌신을 능멸한 죄를 저지른 상태. 그들은 대미궁의 악마를 자극해 끌어내든 그 실체를 확인하든 해서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미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