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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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장악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뭔가?”
“글쎄?”
수도 라야에 체재중인 수호자의 지휘관인 아디슈 악타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설렁설렁 대답을 넘기는 형진을 심유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집행자라는 걸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아니, 집행자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단순히 집행자라는 신분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하는 얘기다.
얼마 전 파스파 왕국의 사제가 오기 전에 어떤 조건을 어떤 식으로 걸어올지 먼저 와서 나불나불 다 말했을 때는 그냥 라야 근처의 집행자 가운데 정보를 담당하는 자인가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파스파 왕국의 수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데려다 놓는 그의 능력을 보고는 깨달았다. 애초에 이 자에게는 거리라는 개념이 의미 없다는 사실.
“지금 상황에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디슈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캐묻지도 않았다. 여기서 더 묻는다고 대답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수고들 해. 대충 일 끝나면 소리쳐서 부르고.”
“알았다.”
수호자들이 이것 하나는 좋다. 달리 연락 수단을 정해 놓지 않아도 워낙 목청이 커서 어지간하면 그냥 육성으로 다 해결이 된다. 물론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는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겠지만.
형진이 품에 안겨 있던 하엘을 풀어주자, 주머니 속에 웅크리고 있던 여신이 얼른 빠져 나와 전용으로 만들어진 안장에 우아하게 자리 잡는다.
그런데 표정이 뭔가 걱정스러워 보인다. 아무래도 수호자들의 난동에 피해를 입을 평범한 사람들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호자들이 벌하고자 하는 대상은 신을 능멸한 자들뿐이니까요. 물론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도 무사하진 못하겠습니다만.”
“그런가요.”
“네, 아마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부서지고 파괴된 시설들을 다시 복구하려면 결국 보통 사람들에게도 부담이 가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 전체를 뜯어 고치지 않는 이상, 아니 뜯어 고치더라도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구분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아무리 호구라도 그런 섭리를 모르지는 않겠지만, 여신은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괜히 형진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귀여운 여신 같으니.
“그런데 우리는 어딜 가는 건가요?”
여신의 또다른 질문에 형진은 왕궁을 에워싸고 있는 성벽 위로 훌쩍 뛰어 오르며 말했다.
“파스파 왕국의 비보란 걸 탈취하러 갑니다.”
“비보요? 그게 뭔데요?”
“원래 하엘에게 일을 맡기는 댓가로 지불하려 했던 보물 말입니다. 비록 저 때문에 중간에 저지당하기는 했지만, 일한 만큼의 보상은 받아야죠.”
“아하.”
하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엄연히 자신이 일한 댓가로 받아야 하는 보상인데 왜 당신들이 그것을 대신 받네 마네 하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조용히 하라는 여신의 명령이 아직 강제력을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쳤지. 계약이고 뭐고 그냥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쳤어야 하는데. 여신이 언급된 시점에서 뭔가 잘못 되었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냥 도망쳤어야 하는데. 물론 그런다고 도망치는 것이 가능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렇게 속으로 계속 후회의 한숨을 삼키며 하엘은 여신이 이끄는 대로 형진의 뒤를 따라 성벽에 올랐다.
꽝!
바로 그때, 커다란 굉음과 함께 그들이 딛고 있던 성벽이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부르르 떨린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횃불처럼 타오르는 불꽃이 왕성 입구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물론 진짜 불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진짜보다 훨씬 무서운 불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수호자들이 헌신의 일격을 통해 한계치까지 힘을 끌어올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휘유. 예전에 봤던 만화가 생각나네. 저러다 막 에네르…”
하지만 형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섬광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더니 성문이 힘없이 주저앉아 버린다.
“헐.”
“와아…”
이곳의 왕성은 꽤 두텁고 탄탄하게 지어져 있었다. 하기야 집행자나 수호자 같은 말도 안 되는 인간들이 판치는 곳이니 그런 것이라도 지어놔야 마음이 편했겠지. 물론 저렇게 일격에 힘없이 주저앉아 버려서야 참 보람 없겠다 싶다만.
곧바로 호각 소리와 종소리, 그리고 고함 소리가 왕성 안에 시끄럽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형진은 느긋하게 왕성 안이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들끓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쩍 뛰어내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비보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요?”
“물론 알 턱이 없지요.”
“네? 그럼 어떻게 찾으려고요?”
하엘의 등에 올라 앞서가는 그의 뒤를 따르며 여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형진은 그런 여신을 돌아보며 빙긋 웃더니 이렇게 답했다.
“비보가 어딨는 지는 몰라도, 그걸 알만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아하.”
과연. 그제서야 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엘에게 전해주기로 한 비보가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값비싼 것이 분명할 터. 자칫하면 수호자들에 의해 성이 함락되어 버릴 수도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우선 챙겨야 할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비싸고 가치 있는 보물은 반드시 챙겨야만 하는 물품이다. 단순히 도망쳐서 생존하는 것이든, 아니면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 재기를 노리든 간에 보물은 큰 힘이 되어줄 테니까. 형진은 바로 그런 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서 필요한 물품을 빼앗으려는 속셈인 것이다.
꽈광!
“이크!”
또 뭔가를 박살냈는지 커다란 굉음과 함께 부서진 파편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날아들었다. 형진은 얼른 뒤에서 날아드는 파편을 피하고 여신을 돌아보았지만, 이미 하엘이 꼬리를 우산처럼 펼쳐 여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막아 내고 있었다.
역시 흑요효. 탈 것 중에서는 아마도 최강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오죽하면 라야를 왕복하면서 마음속으로 반드시 만들겠노라 몇 번이나 다짐했던 마차를 지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을까.
“누구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급하게 성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형진을 발견하고는 그렇게 고함을 지른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물론 피아식별은 꼭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누군지 물을 겨를이 있다면 호각을 불든 나팔을 불든 해서 주위의 다른 자들에게 또 다른 침입자가 있음을 알리는 것이 우선일 텐데.
그래서 형진은 어리석은 근위병들에게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집행자의 단검이라는 이름의 치명적인 대답을.
“컥!”
“크악!”
혹시나 해서 여신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의외로 침착하게 근위병들이 떨군 사념체들을 배낭 안에 담아 넣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혹시 사람을 죽여 대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지만 기우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던전 안에서 임프나 다른 몬스터들을 학살할 때도 묵묵히 룻을 주워 담는 일에만 열중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 와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곳은 이미 전장이고, 여신은 형진과의 계약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렇다고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죽여 대는 건 역시 별로 좋지 않은 일이다. 여신은 물론이고 공포와 죽음께서도 그런 건 그리 즐거워하지 않으실 테니까.
그렇게 판단을 내린 형진은 근처의 건물 위로 훌쩍 뛰어올라 주위를 살폈다. 슬슬 이쯤 되었으면 도망이든 항전이든 반응을 보일 때가 되었다.
“옳지.”
주위를 둘러보던 형진은 화려한 궁전 한쪽에서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전율의 질주를 펼쳐 왕궁 안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뭔가 이상하다. 누군가 도망치려는 모습 같기는 한데 생각보다 행렬이나 호위 병력의 규모가 작았다.
“잘못 짚었나.”
한쪽에 몸을 숨긴 채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문득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성 하나가 십여명의 시녀들에게 에워싸인 채 급히 건물 안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헤에. 공주쯤 되는 건가.”
형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공주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지체 높은 신분을 지닌 이라면 비보에 대한 단서를 알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꺄악!”
“웬 놈이냐!”
“막아! 귀비님을 보호하라!”
쳇. 유부녀였나. 하긴 뭐 여자를 어떻게 해보려고 온 것이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만.
형진이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자 경비병과 호위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달려들었지만, 손발을 한 번 휘저어 보이자 용오름과 폭렬 차기의 위력에 밀려 모두들 단숨에 나가 떨어지고 말았다.
“안녕.”
“…”
베일을 쓴 여자는 와들와들 떨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시녀들이 자신들의 주인을 구하고자 몸을 던져 그녀를 에워싸기 시작했지만, 형진이 다시 주먹을 한번 허공으로 올려치자, 속치마 속에 입고 있는 속옷을 드러낸 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주변 풀숲으로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휘유. 절경이로고.”
하늘에서 허여멀건 허벅지가 쏟아져 내리는 광경이란 건 확실히 흔히 볼 수 있는 절경이 아니다. 변태 중에서도 상변태인 형진이 그런 절경을 무시하면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 그래서 잠시 휘파람을 불며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문득 베일을 쓴 여자가 단검을 뽑아들고는 자신의 목을 겨누며 말했다.
“다, 다가오지 말아요.”
“응?”
형진을 향해 겨누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다. 다가가면 자살해 버리겠다는 소린가.
“휴…”
그 모습을 본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절개를 지키겠다는 그 숭고한 결심을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악당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그것만큼 허망한 위협도 없기 때문이다.
“그거, 설마 자살하겠다는 위협인가?”
“그래요.”
여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형진은 다시 한 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아, 이 판에 박힌 구태의연한 상황 설정과 반응이라니.
형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이봐.”
“네?”
이 상황에서도 존대라니, 참 곱게 자란 아가씨인 모양이다.
“그거 알아?”
“뭘요?”
“세상에는 말이야.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변태들이 있거든.”
“…”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게다가 딱하다는 듯한 저 말투는 또 뭐고.
“그런 변태들 중에는 말이지. 살아 있는 대상이 아니라 죽은 대상에게만 욕정하는 미친 것들도 있어. 그야말로 미친 변태들인 셈이지.”
친절한 설명이 이어지자 베일에 가려진 귀비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제서야 이해했기 때문이다.
형진은 천천히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귀비님이라고 했던가?”
“…”
“당신은 내가 그런 미친 변태놈이 아닐 거라고 단정할 수 있나? 만약 그런 미친 변태놈 앞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붉은 피를 그 하얀 드레스 위에 흩뿌리며 죽어 넘어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혹시 상상은 해봤어? 아아, 아직 못해 봤으면 지금 해봐도 괜찮아. 왜냐고? 난 자상한 남자거든.”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그녀는 마치 눈앞에 어떤 모습들이 펼쳐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상상 만으로도 끔찍한 그 모든 모습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녀는 무언가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두건을 눌러 쓰고 있는 한 남자가 자신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턱.
그리고, 뭘 어떻게 반응할 틈도 없이 형진의 손이 그런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 바로 단검을 쥔 채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그 손이다.
“자, 이렇게 와버렸어. 그럼 이제 당신은 무슨 행동을 해야 할까.”
형진은 그렇게 말하며 단검을 그녀의 목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익!”
귀비는 이제 완전히 공포에 질렸다. 이제 이 남자에게 죽고 나면 자신이 상상했던 모든 것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완전히 이성이 잠식되고 말았다.
“아, 아, 안 돼…”
그래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버티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단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런 그녀를 향해 형진은 다시 속삭였다.
“뭐야. 죽으려던 거 아니었어? 왜 버티는데? 응?”
“사, 살려…”
“뭐라고? 안 들리는데.”
“살려 주세요… 제발… 죽이지 말아줘요…”
완전히 공포에 짓눌려버린 그녀는 그렇게 울먹이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형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정말? 살고 싶어?”
“네… 제발… 살려 주세요. 뭐든지 할 테니… 제발 목숨만…”
방금 전 다가오면 스스로 죽겠다고 외치던 그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처량하게 울먹이며 애원하는 그 모습이라니. 이미 단검은 그녀의 목에 도달해 붉은 피가 방울지어 떨어지고 있었다.
형진은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 웃음은 그 어떤 악마의 것보다도 소름끼치는 웃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도록 하지. 파스파 왕국에 비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어. 그것이 어디 있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