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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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개벽
이젠 꼼짝없이 다 죽는구나.
횃불을 들고 성으로 들어온 수호자들의 모습과, 혼자서 도망치려다가 어이없이 죽어버린 자작의 모습을 보는 순간 성에 남은 영주의 인척과 심복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지키던 병사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수발을 들어주던 시녀와 시종들까지 모조리 도망친 상황. 게다가 이러한 어마무시한 존재들이 접근하고 있음에도 기별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성 아래 마을의 주민들. 자작처럼 배신감에 몸을 떨 겨를도 없이 그들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공포와 직면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절망이었다.
하지만 막상 성 안에 남은 사람들을 한 군데 모은 수호자들은 그들을 처형하기는커녕 엉뚱한 짓을 하기 시작한다. 뭔지 모를 빨간 딱지를 성 안 곳곳에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저씨, 그게 뭐야?”
철모르는 영주의 자식 가운데 하나가 수호자들의 행태가 이상했는지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그렇지 않아도 좌불안석 오들오들 떨고 있던 가족들이 얼른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수호자들에게 엎드려 사죄한다.
“죄송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입니다. 그러니 제발 목숨만은… 흑흑.”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지역에서는 사실상의 왕족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렸던 자들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굴하고 처량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권위나 권력이라는 것의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고, 자신들보다 강한 권위와 권력에 언제든지 고개를 숙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수호자들이 보기엔 그런 행동들조차 역겹기 그지없는 일. 하지만 그들은 오늘 단순히 누군가를 박살내러 온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까지 아이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한 적도 없다.
“안 죽여.”
질질 짜는 것이 짜증스러웠던지 결국 보초를 서던 수호자 하나가 그렇게 대답했다. 영주의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 저 수호자들의 입에서 자신들의 말에 대한 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다.
“네? 지금… 뭐라고…”
“…”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렇게 반문했지만, 수호자는 지그시 노려볼 뿐 다시 답하지 않았다.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할 정도로 아량이 넘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호자로부터 다시 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영주의 가족과 그 심복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지금도 긴가민가했지만, 어쨌든 굳이 더 따져 물어서 화를 돋울 이유도 없다.
그렇게 수호자들이 열심히 빨간 딱지를 성안 구석구석에 붙이는 작업이 끝나자, 비로소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 안으로 들어섰다.
“오오, 훌륭해. 정말 수고했어.”
그들은 다름 아닌 형진과 그의 식구들이었다.
“일단 하라는 대로 하긴 했다만, 이러면 되는 것이 맞나?”
수호자들을 통솔하고 있던 아디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주먹을 쓰지 않고 차압 딱지만 열심히 붙이고 다니는 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영 어색하고 찜찜한 탓이다.
하지만 형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되물었다.
“물론. 그런데 자작은?”
“그게…”
자작의 행방을 묻는 형진의 말에 아디슈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손을 들어 첨탑 위에 꼬치처럼 꿰어진 시체 하나를 가리켰다.
“끙… 어쩌다?”
“그게… 밧줄을 타고 내려가 도망치려고 하길래 끌어 올린다는 게 그만 너무 힘을 줘서…”
“…”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그림이 그려지긴 하지만, 얼마나 운이 없으면 저런 식으로 최후를 맞이했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 단순히 운의 문제로만 생각할 것이 아닌가. 어쩌면 알게 모르게 지켜보던 누군가의 의지가 개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할 수 없지. 이미 죽어버린 걸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덕분에 얘기가 좀 복잡해지긴 했으나,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다. 형진은 그렇게 잠시 아디슈와 대화를 나누다가 끌려 나와 한 곳에 모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들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날도 추운데 간단하게 끝내도록 하지. 상속자가 누구야. 손들어 봐.”
“…”
하지만 그들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수호자들과도 스스럼없이 대답하는 이 정체불명의 사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니 함부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군. 나는 희망과 생명 신전으로부터 이번 사태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은 대리자야.”
물론 형진은 자신의 진정한 신분 가운데 하나를 드러내 보인 것이었지만, 듣는 이들은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얘기를 그저 이번 일에 대한 것만으로 국한해서 이해했다. 하기야, 여신의 뜻을 대신해 교단 전체를 주무르는 대리자라는 건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신을 모시는 추종자들로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지위다.
“희망과 생명 신전… 말씀입니까?”
“그래.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기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잘난 자작 나리께서 참 터무니없는 일을 저질러 버렸거든. 아무리 호구스러워 보여도 그렇지, 감히 신전을 털러 나서다니 그야말로 미친 짓이 따로 없지. 안 그래?”
상황을 미처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미친 짓이다. 아무리 호구니 뭐니 해도 신의 것을 넘보다니.
“그럼… 수호자들께서는 왜…”
그제서야 그나마 나이 지긋한 이 하나가 조심스럽게 대화에 나선다. 형진은 빙긋 웃고는 수호자들을 돌아보며 대답해 주었다.
“아, 쟤들? 쟤들은 그 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온 거야.”
“다른 일이요?”
“그래. 너희들도 알고 있지? 자작이 희망과 생명의 신전으로부터 식량을 빌렸던 일.”
“…”
그들은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많은 식량을 선뜻 빌려준 은인에게 고마움을 표하지는 못할망정 도적질을 하려 했으니 벌을 받아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수호자들이 온 건 다른 게 아니야.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계약을 이어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무언가를 빌려주고 어쩌고 하는 것도 기본적인 신뢰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안 그래?”
“말씀대로…입니다.”
“그래서 신뢰와 헌신을 받드는 수호자들이 그 이름에 걸맞게 이번 계약의 마무리를 지으려고 온 것뿐이야.”
“계약이요?”
“그래. 빌려준 식량, 다시 돌려받아야겠어. 지금 당장.”
형진의 입에서 그러한 선언이 나옴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제랄딘이 서류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민다.
“어이쿠… 참 많이도 빌려 가셨어. 자, 너희들도 확인해 보도록.”
그들은 머뭇거리며 형진이 건네준 서류를 살피더니 이내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이, 이건…”
“왜? 많아? 제대로 계산한 것 맞을 텐데?”
성의 회계를 맡고 있던 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 이 금액은 말이 안 됩니다. 이건 사기입니다!”
“사기? 지금 사기라고 했어? 그 입에서 지금 사기라는 말이 나온 건가?”
순간 형진의 몸에서 스멀스멀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사기라고? 어디가?”
“그, 그게…”
회계를 맡고 있던 영주의 심복은 급히 계약서를 확인해 반론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렇지 않아도 파리하던 안색이 더욱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렇다. 계약서에는 처음부터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다. 현물 또는 그에 상응하는 재물이라고. 또한 그 가치는 거래 당시의 가치로 계산한다고.
“이럴… 수가…”
이러한 독소조항이 있는 것을 어째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아니다. 정확히는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알고서도 그냥 넘겨 버렸던 것이다. 호구신의 사제들 따위가 이런 계약서를 근거로 어떤 식으로든 강제 집행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알고서도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호구신의 사제들의 우습게 봤기에 자작은 빌린 식량을 털어 먹자, 겁도 없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고 들었던 것이다.
“멍청한 호구들이라고 비웃으며 받아먹을 때는 좋았지? 하지만 이미 늦었어.”
수호자들이 무언가 서류를 건네자, 제랄딘이 그것을 확인하고는 형진에게 다시 넘겼다. 그는 그것을 잠시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이군. 그대들에게 나름 희망적인 소식이 있어. 들어 볼 텐가?”
“…”
대답할 엄두도 못내고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들이었지만, 형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할 일을 했다.
“어디 보자… 원래는 이 영지가 보유한 재화나 토지, 건물의 가치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자작이 몰래 들고 도망치던 재산이 꽤 되더군. 덕분에 너희들이 몸으로 갚아야 할 비용이 꽤 줄어들었어. 대충 한 명당 금화 열 개 정도만 갚으면 되겠네. 김밥천국에서 일한다면 대충… 백만 일쯤 열심히 일하면 되겠군.”
“컥…”
계산이 빠른 자들은 그 말을 듣는 즉시 거품을 물고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형진은 계산이 느린 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백만 일은 좀 이해하기 어렵지? 그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겠어? 대충 2700년쯤 일하면 돼. 별 거 아니지? 금화 열 개.”
그러자 새파랗게 질려 있던 영주의 부인이 급히 나서며 말했다.
“가, 갚을게요. 금화 열 개. 그러니 제발 저희들을 놓아 주세요.”
“오, 갚을 방법이 있어? 따로 숨겨둔 재산이라도 있는 거야?”
물론 없다. 이미 몸에 걸친 잠옷 외의 모든 재산이 수호자들에 의해 차압되어 버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없지만… 친정에 말한다면 그 정도는…”
“친정? 아… 이란델 자작가? 글쎄. 솔직히 그 선택은 그리 추천하질 않는데.”
“네? 어째서… 연락만 닿으면 그 정도는 지불을…”
생각보다 머리가 둔한 영주 부인에게 형진은 다시금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이란델 자작가가 빌린 금액은 여기보다 더 많거든. 게다가 헛짓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조만간 그 집안에도 여기처럼 빨간 딱지가 처덕처덕 붙게 될 텐데.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컥…”
영주 부인이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형진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 당장은 좀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 편이 오히려 너희들에게는 나을지도 몰라. 어째서냐고? 간단한 얘기야. 지금 너희들이 몸값을 내고 풀려난다 한들 어디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호위하는 병력조차 없이 이 난세에 어린애와 노약자들끼리 마차를 끌고 길을 떠나 봐. 얼씨구나 하고 강도떼들이 달려들어서 속옷까지 홀라당 벗겨갈 걸. 그에 비하면 김밥천국은 그야말로 천국이지. 마음씨 착한 호구신의 사제들이 어련히 잘 돌봐 줄까. 아이들 굶길 걱정 안 해도 되고, 교육까지 알아서 다 시켜줄 뿐만 아니라, 사제라도 되면 설마 그 호구들이 같은 신을 모시는 식구한테까지 빚 갚으라고 하겠어? 아니지. 물론 아이들이 아닌 이들은 죽을 때까지 신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한테까지 빚을 떠넘길 생각은 없으니 안심해. 이야, 정말 좋다. 이래서 사람들이 호구호구 하나 봐. 그렇지?”
“…”
“그러니까 결정해. 어떻게 할래?”
시절이 이전만 같았어도 절대로 사제들의 종노릇을 하는 상황은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난세. 권력과 무력을 잃은 귀족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 지는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그렇다 쳐도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역시 이 방법이 최선일 수밖에 없다. 신전이 지닌 막강한 힘을 미처 알지 못했다면 몰라도, 이제 그들은 희망과 생명의 신전이 본래 그들이 알고 있던 것과 같은 단순한 호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었다.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좋아, 좋아. 역시 말이 잘 통하는 사람들은 이래서 좋다니까.”
형진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귀스트와 할에게 이들을 적당히 나눠서 각지의 신전에 보내도록 지시했다.
“이야. 덕분에 일이 아주 수월하게 끝났어. 역시 수호자. 신뢰와 헌신께서 자랑스러워 하실 만 해.”
“크흠. 그럼 우리들이 할 일은 끝난 건가.”
“물론. 하지만 앞으로 더 큰 일이 남았지. 이미 눈치 챘겠지만.”
“…”
아디슈는 잠시 형진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넌 엘 파르드 전체를 집어 삼킬 생각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형진은 그런 아디슈를 향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음, 원래는 나도 이런 나라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어. 하지만 저 위에 계신 분께서 신탁을 내리셔서 말이지. 알다시피 우리 처지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잖아. 얼마 전에 괜히 딴 짓 했다가 천벌이라는 거 한 번 맞아 봤는데, 진짜 그거 두 번 맞을 건 못 되더라고.”
사설이 길긴 했지만 아디슈는 핵심을 바로 짚었다.
“공포와 죽음께서 명하셨다고?”
“맞아. 하지만 굳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이런 일이 떨어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그게 뭔가.”
형진은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왕자거든.”
“누가? 네가?”
“응. 내 이름이 뭐였더라. 왕자일 때의 이름.”
그러자 제랄딘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했다.
“벨크라드진 엘 파르드에요. 어지간하면 이젠 기억 좀 하시죠?”
“그게 내 탓인가. 지을려면 좀 제대로 짓던가 하지. 왜 그렇게 외우기도 어려운 이름을 지어서는.”
“…”
아디슈로서는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형진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이 빙긋 웃어 보인다.
“아무튼 내가 그거래. 그래서 말인데.”
“…”
“이후의 일도 수호자에게 맡기고 싶어. 물론 보수는 신뢰와 헌신께서 만족하실 정도의 것으로 준비하도록 하지.”
“어떤?”
형진은 양손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이 상대에게 보이도록 활짝.
“열 곳. 기존에 희망과 생명의 신전이 들어서지 않은 도시나 마을 열 곳에 신전을 지어 줄게. 물론 신뢰와 헌신께서 만족하실 정도로 훌륭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