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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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개벽
신전.
그것은 어찌 보면 추종자가 자신의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경의.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강대한 힘을 가졌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전이란 신을 모시는 것이지만, 반대로 참배객들을 맞이하는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추종자들이 지닌 힘의 크기로만 따진다면 이 세계에는 희망과 생명이 아니라 공포와 죽음, 그리고 신뢰와 헌신의 신전이 더 많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그들에 대한 신앙이 일반인으로서는 접하기 어려운, 그만큼 덜 세속적인 부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들은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계약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거듭나려 하고 있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에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기반이 있어야 하는 법. 지금으로서는 일반인들이 수호자들에게 계약의 공증을 의뢰하고 싶어도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수호자들이 시장에서 상주하며 계약에 강제로 끼어들 수도 없는 일이고.
신전은 그래서 필요하다. 때문에 신뢰와 헌신 측에서도 조만간 신전의 건립을 위한 준비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바로 그 부분을 형진이 찌르고 들어간 것이다.
“신전이라…”
아디슈는 흥미를 보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수호자들은 부수는 것은 자신이 있어도 무언가를 만들거나 짓는 건 완전히 젬병이나 다름없다. 뿐인가. 건립에 필요한 토지나 기타 부대 비용까지 생각하면 단순무식한 수호자들로서는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 그런 차에 일에 대한 댓가로 신전을 지어주겠다니 절로 귀가 솔깃해진다.
형진은 아디슈가 솔깃해 하는 반응을 보이자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쪽도 보호와 균형의 신상에 대해서 들어 봤지?”
아디슈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른 곳의 신상도 훌륭하지만, 그리칸에 들어선 신상은 인간의 손으로 빚은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하다고 하더군. 기회가 있다면 나도 한 번 가서 보고 싶을 정도다.”
수호자 가운데서도 고위급 인사에 해당하는 아디슈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라면, 보호와 균형의 신상은 이미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거 사실은 우리 쪽에서 만든 거야.”
“역시… 그랬군.”
의외로 아디슈는 그리 놀라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보호와 균형의 신상이 희망과 생명의 신전에 들어섰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어째서인지 이 남자의 얼굴이 떠올렸던 탓이다.
“흥미가 있나?”
“있다.”
아디슈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로 그렇게 즉답을 건넸다. 보호와 균형의 신상은 그 영험함은 물론이고 조각상 자체로도 수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명작이라는 찬사를 듣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최소한 부수는 것밖에 모르는 자신들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디슈는 단서를 달았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의견이다. 정확한 것은 답을 들은 후 말해 주겠다.”
형진은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답했다.
“편한 대로 해.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줘. 알다시피, 상황이 좀 급박하거든.”
“물론.”
필요한 일은 이것으로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로우너 자작의 모든 재산은 희망과 생명의 신전에 귀속되었으며, 문제의 소지가 있는 계승권자들은 세계 각지의 신전으로 흩어져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럼 이제는 이걸 치워야 할 것 같은데.”
성문에 이번 일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앞으로 이 영지가 희망과 생명의 관리 하에 들어간다는 내용을 담은 공고를 붙이는 일까지 마치자, 남은 것은 수레 안에 가득 담긴 시체들을 처리하는 일 뿐이다.
본보기로 수호자들에게 여기까지 끌고 오게 했지만, 시체들을 이렇게 방치하는 건 결코 좋지 않은 일이다. 집행자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탓에 페스타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해도, 질병이나 기타 다른 여러 가지 문제를 유발할 수 있으니 가급적 깔끔하게 처리해야만 한다.
“적당한 곳에 버려야 하나.”
화산 같은 곳에 던져 넣으면 알아서 처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유아의 등 뒤에 숨어있던 보호와 균형이 하엘의 등에 올라탄 모습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저…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응? 여신님,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헤헤. 모두가 바쁜 것 같아서… 혹시 도움이 될만한 일이 없을까 하고…”
“아하.”
아무래도 오귀스트와 할이 영주의 식구와 심복들을 여기 저기 흩어보내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슬쩍 요정의 문을 타고 넘어온 모양이다.
“뭔가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게… 이 일은 하엘에게 맡겨 보는 것이 어떨까 해서요.”
“하엘이요?”
“네. 아시겠지만 이 아이는 파괴와 재생의 구현자이지요. 물론 파괴와 재생이나 그 추종자인 구현자들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안 좋은 얘기가 많긴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들 역시 아주 중요한 일을 맡고 있어요. 이런 시신들을 온전히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 역시 그런 일 가운데 하나죠.”
“아하.”
확실히 불이 지닌 성질에는 그러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신이고 추종자고 간에 일단 태우고 보는 미친놈들 뿐이라는 점이겠지만.
“알겠습니다. 여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따라야겠죠.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도움이 되어서 기뻐요.”
하엘은 여신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처럼 탈것 상태에서 벗어나 인간 여성의 모습이 되었다. 물론 예전에 입고 있던 옷은 홀라당 태워 먹은 뒤라 풍성한 꼬리로 몸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수레에 실려 있던 시체들은 하나씩 내려져 성의 중정에 나열 되었다. 그 중에는 첨탑 위에 솟은 깃대에 꼬치처럼 꿰어져 있던 자작의 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레에 실려 있던 시신들이 모두 내려지자, 하엘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불꽃을 일으켰다. 그녀가 손을 한번 휘저을 때마다 땅바닥에 눕혀져 있던 시신들은 마치 도깨비불 같은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타올라 사라져 간다. 이미 죽은 시신이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두터운 암반을 단숨에 뚫고 올라가던 그녀의 힘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신들에서 일어난 불꽃은 높게 솟아올라 마치 오로라가 땅에 내려 온 것과도 같은 장관을 연출했다. 성 아래에 위치한 마을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며 가슴 졸이던 사람들은 갑자기 성 안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올라 하늘을 물들이자 그 신비한 광경에 크게 놀랐다.
그렇게 잠시 난데없는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성 근처의 동정을 살피러 갔던 사람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 소식을 알렸다.
“공고가 붙었어!”
“뭐? 공고라고? 무슨?”
“그게… 앞으로 이 영지는 희망과 생명의 신전에서 관리한데. 영주가 빌린 식량을 갚지 못하게 되어서 영지 전체를 차압해 버렸대.”
“헉!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는지는 나도 몰라. 다만 신뢰와 헌신께서 공증한다고 되어 있더라고.”
“허…”
그제서야 사람들의 뇌리에는 그림 하나가 그려졌다.
영주가 신전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식량을 빌렸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영지 전체가 넘어가게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중간에 신뢰와 헌신이 개입했다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호구신의 사제들이라면 몰라도, 그들은 계약의 내용에 따라 강제로 채권 추심을 단행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럼…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성의 주인이 바뀐 이상 피지배층인 그들의 삶 역시 바뀔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닌가.
“글쎄… 그건 조만간 신전에서 사람이 나와서 결정할 거래. 다만 앞으로 외부의 침입에 대해서는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긴 수호자들이 버티고 있으니.”
요정의 문에 대한 것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영락없이 수호자들이 성 안에 버티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성에 남는 것은 형진이 놔두고 갈 토끼 몇 마리가 전부였다.
“일단 희망과 생명의 신전 소유가 되긴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이곳을 신전의 영역으로 선포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수호자들 때문인가요?”
“응. 그들이 이곳을 신전 부지로 달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군요.”
유아는 조금 우울한 얼굴로 하엘이 시신들을 불태우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형진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왜 사람들은 서로 싸워야만 하는 걸까요.”
형진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욕심이 많아서 그래. 재화는 한정되어 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서로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싸울 수밖에.”
“그럼 사람은 계속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건가요?”
“글쎄.”
이건 그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혹시 저 하늘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 공포와 죽음이라면 몰라도, 그 역시 필멸자에 불과한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유아도 스스로의 질문이 너무 막연하다 싶었던지 다른 얘기를 꺼냈다.
“이 영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음…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훗.”
따지고 보면 영주 뿐만 아니라 이 영지 안의 사람들 모두가 공범이나 다름없다. 영주가 어떤 일을 저지르려 하는지 알면서도 방조한 자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화장을 치르고 있는 시신들 역시 따지고 들어가면 이 영지 안에 살고 있는 누군가의 가족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죄를 학장해 나가면 한도 끝도 없다. 죄인은 반드시 처벌 받아야만 하지만, 그 한도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집행자는 꽤 일하기 편한 면이 있다. 누굴 죽여야 하고 누굴 살려야 하는지 공포와 죽음께서 명확하게 구분을 지어주시기 때문이다.
“초안이에요.”
“고마워.”
잠시 끙끙거리며 무언가를 끄적이던 제랄딘이 형진에게 서류 하나를 건넨다.
“그게 뭐에요?”
형진은 서류를 넘기며 유아의 질문에 답했다.
“영지 개발 계획.”
“이곳이요?”
“응.”
간단하게 대답하며 서류를 살피는 형진을 바라보며 제랄딘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정말로 이 계획대로 갈 건가요?”
“왜?”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무한정 베푸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요.”
제랄딘이 보기에는 이곳의 영지민들도 죽은 영주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렇게 무차별적인 지원을 퍼붓다니.
하지만 형진은 피식 웃었다.
“이곳은 본보기야.”
“본보기요?”
“희망과 생명이 영지를 경영하면 이렇게 호구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호구스러움. 지금 바로 확인해 보세요. 라는 느낌?”
“…”
진담인지 농담인지 몰라 얼굴을 찌푸리는 두 마눌을 바라보며 형진은 이렇게 말했다.
“오랜 세월 동안 희망과 생명 신전이 쌓아온 호구의 이미지.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이건 훌륭한 무기가 될 수도 있는 법이거든.”
“…”
“이 영지에서 벌어지는 호구스러운 일들을 바라보며 다른 이들이 부러움을 느끼는 순간, 엘 파르드라는 나라는 아래로부터 바뀌어 가게 될 거야. 이건 그것을 위한 투자인 셈이지.”
수호자들에 의한 채권 추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당연히 반발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반발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득권에 호응하는 자들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동하기 전에 이런 식으로 희망과 생명에 의해 다스려지는 영지의 모습이 하나의 이미지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절로 기존의 지배자와 새로운 지배자를 저울질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기득권에 힘을 실어 주려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희망과 생명의 신전이 보여주는 호구스러움에 기대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마치 이 영지가 변변한 싸움 한번 제대로 겪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처럼. 애초에 이건 승부를 가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싸움인 셈이다.
“자금이 만만치 않게 들 텐데요.”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누구 덕분에 새로운 사업을 시작도 못하는 바람에 잔뜩 쌓여 있으니까. 쳇.”
그렇게 말하면서도 벼락이 떨어질까봐 무서운지 하늘을 힐끔거리는 형진의 모습에 유아와 제랄딘은 킥킥거리며 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