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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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개벽
어쨌건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혹시라도 새로운 지배자가 관대함을 버리고 다른 마음을 먹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밤을 지샜던 사람들은, 아침이 밝아와도 성으로부터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조심스럽게 다시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을 시작했다. 자경단원은 마을을 지키고, 아줌마들은 식사와 빨래를 준비하며, 아저씨들은 장작을 쪼개고, 아이들은 부모를 돕기 위해 물을 길어오는 식으로.
차이가 있다면 성에서 일했던 이들. 시녀나 시종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성을 지키던 병사나 지휘관들은 언제 성에서 수호자들이 몰려나와 자신들에게 벌을 내릴지 몰라 노심초사했고, 개중에 지은 죄가 많아 쫄리는 사람들은 아침이 되어도 별 움직임이 없는 듯 보이자 재빨리 짐을 싸서 가족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그런 식으로 사흘 정도가 지나자 성 아래 마을에는 남을 사람은 남고 떠날 사람은 떠나는 식으로 정리가 대충 끝났다. 그리고 그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 안에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사흘이 지나도록 밥 짓는 연기조차 피우지 않는 모습에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가 싶었던 사람들은 갑자기 성문이 열리자 기겁을 하고 얼른 다시 집 안으로 숨었다. 새로운 지배자가 늘상 하는 작업, 이를테면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기득권층의 숙청 같은 것이 이루어지리라 예상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숙청 작업의 대상이 될 만한 이들은 이미 모두 도망쳐 버리고 난 상황이지만, 왜 도망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봤냐는 식으로 물고 늘어지기라도 하면 괜히 구경 나갔다가 집안 하나 폭삭 망하는 건 일도 아니니 일단 피하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 이루어진 일은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성문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수호자가 아니었다. 마차에 자재와 공구를 잔뜩 싣고 나온 그들은 바로 요정들이었다.
요정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왁자지껄 떠들어 대면서 마을 안에 존재하는 몇몇 건물로 다가가서 곧바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영주에 의해 운영되던 일종의 공영 상점이나 심복들이 소유한 건물들이었다.
그렇게 한 나절을 뚝딱거리며 뭔가를 만들던 요정들은 밤이 되어서야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서 다가가 보았지만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울타리가 쳐져 있는 모습만을 확인했고, 좀 더 용기가 있던 몇몇 사람은 그 울타리에 붙어있는 공고까지 살폈다.
[채용공고] 모집인원: 점원 00명(인원미정)성별: 무관
연령: 무관
학력: 무관
업무: 접객, 매장관리 (초보가능. 시녀나 시종으로 일한 적이 있는 경험자는 우대합니다)
-희망과 생명, 신뢰와 헌신, 보호와 균형 신도는 ‘특별히!’ 우대합니다.
근무기간: 자유
근무일수: 최하 주3일 (협의 가능)
근무시간: 협의후 결정
급여: 기본급-업무시간당 주화 2개. (특근수당, 야근수당, 시간외 수당, 중식비, 교통비 지급)
휴가: 연차, 월차, 출산, 가산 휴가 모두 유급으로 적용됩니다.
(모집은 필요한 인원이 채워질 때까지 계속 진행됩니다. 단, 면접은 오후 티타임 시간에만 성의 위병소에서 진행되니 이점 양해 바랍니다. 기타 문의 사항은 면접시 말씀 주시면 친절하게 답해 드립니다.)
“이게 뭐지?”
“글쎄… 시중 들 사람을 새로 뽑는 건가?”
“점원이라고 되어 있는데?”
“가게를 내려고 그러는 건가?”
“혹시 김밥천국이라는 걸 여기도 내려고 그러는 걸지도.”
“아하.”
눈치 빠른 사람들은 채용공고만 보고서도 대충 가게를 내려고 그러는 건가보다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뒤에 붙은 내용들이 뭔가 애매모호하다.
신도들을 특별히 우대하는 거야, 성의 새로운 주인이 그쪽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특근수단이니 야근수당이니 시간외 수당이니 하는 건 또 뭔가. 거기에 중식비와 교통비를 지급한다고? 설마 점심값이랑 출근하는데 필요한 비용까지 다 내준다는 건가?
게다가 휴가라니. 연차니 월차니 하는 단어도 생소하고 더구나 모두 유급으로 적용된다는 말도 뭔 소린지 알아먹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런 모든 아리송함을 제외하고서라도 눈에 쏙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급여가 시간당 주화 2개라는 부분이다.
보통 시녀나 시종들은 숙박하며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즉, 업무 시간 자체가 자고 먹고 싸는 기본적인 시간을 제외한 전부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이런 시간을 제외하고 최대로 잡는다면, 일하는 시간은 대충 15시간 정도. 그 시간 동안의 급여가 모두 시급으로 계산된다 치면…
“헉… 하루에 주화 30개도 벌 수 있다는 소리네?”
“하, 한 달이면… 허억!”
물론 근무 일수가 최하 주3일이라고 되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최하이고 뒤에 협의 가능이라고 붙어 있으니 얼마든지 늘릴 수 있음을 사람들은 바로 알아챘다. 즉,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한 달에 동화 열 개도 거뜬히 벌 수 있다는 얘기. 다른 건 개떡 같이 알아먹으면서 그런 부분은 찰떡같이 알아먹는 사람들이다.
말이 동화 열 개지, 일 년이면 은화 한 개를 가뿐히 넘어가는 고수익이다. 참고로 지금까지 이 영지에서 연수입을 은화로 따질 수 있는 이들은 장원을 나누어 받은 고위급 기사이거나 시녀장, 시종장 같은 영주의 최측근 정도가 고작이다. 게다가 저건 그냥 기본급이다. 뒤에 붙은 수당이라는 것까지 감안을 한다면…
호구다.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사람들의 눈에 불똥이 튀기 시작한다.
사실 불안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비싼 돈을 받으면 비싼 값을 해야 한다는 정도는 당연한 얘기니까. 하지만 저 정도 금액이라면 일단 면접이라는 걸 보기에는 충분한 동기 부여가 된다.
사람들은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시녀나 시종으로 일했다는 것이 성의 새로운 주인에게 책잡힐까 두려워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성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혹시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집 안에 숨어있던 부역자들을 끌어내기 위한 보기 좋은 미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다. 굳이 그런 식으로 부역자를 찾아낼 것 같았으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밤새도록 끙끙 고민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이 용기를 내어 다음날 오후 티타임때 조심스럽게 성의 위병소에 가보았다.
위병소에 도착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자, 장신의 메이드 하나가 나타나 묻는다. 어지간한 장정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구. 출렁이는 두 가슴은 흉폭하게 느껴질 정도다.
“어서 오세요. 채용 공고를 보고 오셨나요?”
“네, 뭐…”
내용은 분명 친절한데, 말투나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다. 메이드가 아니라 차라리 수호자나 그런 사람이라고 하면 믿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면접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위병소에서 면접을 보는 게 아니었나. 공고에는 그렇게 써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메이드를 따라가자 예전에 영주가 접견실로 쓰던 방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가, 감사합니다.”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가자, 몇 개의 의자가 길게 주욱 나열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전에 영주가 앉곤 했던 옥좌에는 한 남자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옆에 놓여진 의자에는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미인 둘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한명은 귀여운 느낌, 또 한 명은 고아하고 기품 있는 느낌이다.
“아무데나 편한 자리에 앉으세요.”
두 명의 미인들 가운데 기품 있는 느낌을 지닌 쪽이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머뭇거리며 하나씩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침내 사람들이 모두 의자에 앉자 다시금 기품 있는 쪽의 미인이 입을 열었다.
“가장 왼쪽 분부터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름과 나이, 그리고 잘 하는 일 같은 걸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가장 왼쪽에 앉아 있던, 주근깨가 살짝 내려앉은 빨강 머리 시녀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안즈입니다. 나이는 열아홉이고… 성에서 시녀로 일했…”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옥좌에 앉아 있던 남자가 크게 외쳤다.
“합격!”
“네?”
“19는 금이다. 줄여서 19금. 당연히 합격. 다음!”
“…”
순간 남자 옆에 앉아 있던 두 미인이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즈라는 이름의 시녀에게 말했다.
“안즈님. 합격입니다. 닷새후 신입사원 환영회가 있으니 반드시 참석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일단 뭔지는 몰라도 합격이라니 얼떨떨해 하면서도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몰라 불안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약값이 필요하던 상황이라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즈라는 이름의 시녀가 자리에 앉자, 이번에는 조금 더 앳되어 보이는 소녀가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야… 라고 해요. 나이는 열다섯… 아니, 열아홉이고요… 시녀로 일한 경험은 없지만… 뭐든지 시켜주시면 잘 할 자신이 있어요. 제발 저도 일하게 해주세요.”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듯한 느낌. 사실 앞서 소개를 했던 안즈도 그렇지만 지금 여기 모인 이들 대부분이 급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나선 사람들이다.
“크으. 샤바샤바아이샤바. 그래, 당연히 합격이지. 너도 합격!”
“정말요? 감사합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의 옆에 자리 잡은 두 미인, 유아와 제랄딘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소야의 나이와 이름을 서류에 적어 넣고는 닷새 후의 신입사원 환영회에 반드시 참석하라는 말을 전한다.
그렇다. 애초에 이 면접이라는 것 자체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형진은 불합격을 시킬 생각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렇게 면접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즉석에서 합격통지까지 받은 이들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접견실을 빠져 나갔다. 뭔가 영 미심쩍긴 해도 일단 합격은 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밖으로 나가는데,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신의 메이드가 그들을 불러세운다.
“면접비입니다. 받아가세요.”
“네?”
면접비를 받아가라니. 하지만 어지간한 장정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의 메이드 하마란의 기세에 압도되어 더 이상 뭐라 말도 못하고 그녀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헉!”
혹시나 싶어 봉투를 열어보던 안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다. 봉투 안에 자그마치 주화가 세 개나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정말 저희들에게 주시는 건가요?”
“물론. 뭔가 문제라도?”
하마란의 말에 안즈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뭐라고 했다가 다시 돌려달라고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날의 면접이 끝났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티타임이 되자, 성의 위병소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어제의 일을 전해들은 사람들이었다.
“괜찮은 걸까요. 저렇게 아무나 마구 받아들여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랄딘이 묻자, 형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오늘은 적당히 걸러내야지. 호구스러운 이미지라면 이미 어제 일로 사람들의 머리속에 팍 파고들었을 테니까.”
선시어외(先始於?). 전국시대 연나라의 재상 곽외의 고사로부터 나온 말이다. 따지고 보면 형진은 성을 차지하기만 했을 뿐, 이 영지에서 어떠한 인맥이나 기반도 갖추지 못한 상태. 그런 상황에서 기득권층을 제외하고 자신의 기반을 온전히 다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떡밥을 던져야만 한다. 곽외가 먼저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라고 했듯이, 형진은 가장 먼저 용기를 내어 면접에 응한 사람들에게 그 댓가를 주었을 뿐이다.
“교육을 맡은 사제들의 준비는 끝났지?”
“네.”
이 영지는 참 별볼일 없는 곳이다. 특산물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땅 파서 농사짓는 것 외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작이 신전을 털어먹는 무리수를 생각한 것도 그런 입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 하지만 그래서 더 좋다. 이런 척박한 곳이라도 희망과 생명의 가호가 있다면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 테니.
“그런데 내 눈이 이상한 건가. 묘하게 어린 여자애들이 많아 보이는데.”
“…”
어쨌든 뭔가 얼렁뚱땅이라는 느낌의 면접이 끝나고 합격 통보를 받은 이들은 다시 며칠 뒤 성에 모였다. 바로 신입사원 환영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