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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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개벽
“흑흑흑…”
“울지마. 예쁜 얼굴이 미워지잖니.”
그런데 막상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가 뭔가 묘하다. 게다가 인원 구성도 뭔가 이상하다. 면접 때야 그런가보다 했지만, 막상 모아 놓고 보니 대부분이 어린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결혼 적령기를 살짝 넘어선 느낌의 여자들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이전에 시녀 일을 했었던 사람이다. 이쯤 되면 정말로 형진에게 변태 로리 기질이 발동해서 그런 사람들만 뽑았나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한 광경.
그러나 이건 형진에게 있어 매우 억울한 일이었다. 발단은 바로 면접비라고 해서 쥐어 보낸 주화 몇 개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세계에서는 면접을 봤다고 돈을 주는 관례 자체가 없다. 그러니 사람들은 이 면접비라는 것이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첫날 면접을 본 사람들이 대부분 나이 어린 여성 들이라는 사실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즉, 면접 보러 온 사람들이 나이 어린 여성들이었던 탓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 식으로 돈을 주었다는 해석을 자기들 멋대로 해버린 것이다.
둘째 날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형진이 묘하게 어린 여자애들이 많다고 느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운이 좋으면 면접이란 것에 붙어서 채용이 될 수도 있고, 운이 없더라도 나이 어린 여자들이 그렇게 모이면 기분이 좋아져서 면접비라는 것이라도 주지 않을까 하는 식의, 그런 얄팍한 기대가 이와 같은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전부 합격 통보를 받고 나서 마침내 신입사원 환영회라는 것에 참석하기 위해 모이게 되자, 이 소녀들은 앞으로 자신들에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지금 몇몇 소녀들이 울먹이고, 다른 이들의 표정 역시 좋지 않은 건 그래서였다.
사실 영지의 사정이 조금만 좋았어도 이렇게 한창 나이 때의 소녀나 아가씨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모여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미 죽어버린 자작이 신전으로부터 받은 식량의 아주 일부만이라도 영지민들에게 베풀기만 했어도, 어떤 일을 당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런 수상쩍은 채용 공고에는 응하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그렇게 새로 점원으로 채용된 여자들이 위병소 근처에 모인 채 울먹이고 있을 때, 성문이 조용히 열리며 면접 때 보았던 장신의 메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따라 오십시오.”
면접 보러 왔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이 장신의 메이드는 단순히 키만 큰 것이 아니었다. 은연중에 풍겨지는 위압감은 이전에 먼발치에서 보았던 기사들보다도 압도적이어서 감히 눈을 똑바로 마주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울먹거리던 소녀들도 바로 이 장신 메이드, 하마란의 기세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는지 끽 소리도 못하고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마란은 그녀들을 성 안에 마련된 연회장으로 이끌었다.
“우, 우와아아아…”
“허어억…”
그리고 그 순간,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따르던 그녀들은 절로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떡 벌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산해진미.
문자 그대로 산과 바다, 아니 세계 각지의 진귀한 먹을 거리가 연회장 가득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뭔지조차 알 수 없는 다양한 음식들이, 생전 경험해 본 적도 없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거대한 연회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 광경이라니.
이전에 성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시녀들조차도 눈앞에 펼쳐진 그 모습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작이 그리 사치가 심한 성격은 아니었어도, 가신들이나 인근의 귀족들을 불러들여 연회를 여는 적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차려진,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정도의 이 만찬과 비교하면 과거 자작이 열었던 연회는 정말 그냥 소소한 티타임 정도에 불과하다. 테이블이 온전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가득 차려진 이 엄청난 양의 음식이라니!
단순히 음식만으로 사람을 압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된 사람들 앞에, 일남이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면접 때 보았던 그 사람들이다.
형진은 유아와 제랄딘을 대동한 채 연회장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단상에 서더니,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잘 와주었다. 오늘은 그대들을 위한 날. 이 연회장 안에 차려진 모든 음식들은 모두 그대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사양 말고 양껏 들어도 좋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다 먹으려고 하다가 배탈이 나는 건 곤란해. 필요하면 싸가도 좋다. 그럼 자유롭게 즐기도록.”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자신들을 위해 차렸다는 말에 가장 나이가 많은 시녀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고, 다른 소녀들도 엉겁결에 그 시녀를 따라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좋아. 좋아.”
형진은 웃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유아와 제랄딘을 데리고 다시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이렇게 되자 여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죠?”
“그, 글쎄.”
사람들의 시선이 시녀 경험이 있는 여성들에게로 쏠렸지만, 그녀들로서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뭐라고 답을 하기가 곤란했다.
결국 보다 못한 하마란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먹으라고 했으니 먹으면 됩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죠.”
“정말… 먹어도 되는 거에요?”
“당연히.”
“와아아아아!”
하마란이 재차 확인을 해주자, 차마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군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던 소녀들 가운데 몇이 환성을 터뜨리며 테이블로 달려갔다. 시녀들 가운데 몇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리려 하다가, 막상 그 모습을 보고서야 방을 빠져 나가는 하마란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화아아아아아! 너무 마시써어…”
“이렇게 부드러운 빵은 처음 먹어봐!”
“이게 뭐지? 뭔데 이렇게 달콤한 거지?”
선발대로 나선 소녀들이 그렇게 탄성을 터뜨리며 음식을 먹기 시작하자, 다른 이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 이건…”
다른 이들은 그저 처음 보는 음식인가보다 하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을 뿐이었지만, 성에서 시녀로 경험했던 사람들은 식탁에 놓여진 음식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그만 눈이 핑 하고 도는 느낌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작조차도 한두 병을 자신의 방에 숨겨 놓고 조심스럽게 한 잔 두 잔 마시던 값비싼 와인들이 마치 선술집에서 파는 싸구려 에일주처럼 여기 저기 널려 있다. 귀족들도 일 년에 몇 번 맛보기 어렵다는 동굴곰의 뒷다리가 통째로 구워져 상에 올려져 있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어지간한 아이 머리통보다 더 큰 전복을 통째로 구워서 내놓은 스테이크부터 시작해서, 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돌 정도의 엄청난 요리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모습에는 감탄은커녕 경악 밖에 나오지 않는다.
“설마… 이걸로 빚은 지워서 부려먹으려는 건가.”
“빚을 지게 하면 갚을 능력은 있고?”
“힉!”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런 의심을 품던 시녀는 어디선가 흘러나온 말에 기겁을 하고는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막상 말을 건넨 인물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시녀는 당황해서 주위를 살피다가 헛것을 들었나 하며 머뭇머뭇 식탁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말을 걸면 어떻게 해요?] [미안. 줘도 못 먹으니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사실 형진은 방에서 완전히 나간 것이 아니었다. 나가는 척 하면서 제랄딘과 함께 은신을 펼친 채 연회장을 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쟤들 저러다 배탈 나겠다. 유아, 사제들은 준비가 되었지?] [네. 들여보낼까요?] [그래야 할 것 같아. 애들이 너무 무섭게 먹어대서 좀 걱정스럽네.] [알았어요.]곧바로 연회장 바깥에서 대기중이던 유아가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오기가 무섭게 과식 중인 사람들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의심을 풀지 못하고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던 사람들은 과식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제들의 모습에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조심스럽게 음식으로 손을 뻗는다. 자작이 희망과 생명에게 진 빚 때문에 그 지경이 되었으면 한번쯤 의심할 만도 한데, 역시 오랫동안 쌓아온 호구 이미지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날 여자들은 배불리 먹고 즐기다가 다시 집에 한아름씩 되는 음식을 싸가지고 돌아갔다. 애초에 그걸 염두에 두고 만든 음식들이라, 그날 밤 성 아래 마을 사람들이 때 아닌 잔치를 벌여야만 했다.
“어떻게 되나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흑흑.”
“걱정 말아요. 이번 영주님은 아주 마음씨 착한 호구… 아니, 성인이세요.”
“그래.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야…”
곱게 길렀다고는 차마 말 못해도, 가슴으로 낳아 기른 딸아이를 그렇게 보내놓고 노심초사하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신입사원 환영회가 끝나고 다음 날이 되자, 점원으로 채용된 여자들은 누가 불러 모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위병소에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죠?”
성문을 열고 하마란이 모습을 드러내자, 연장자인 시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렇게 베풀어 주시는데 뭐라도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보답?”
하마란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요. 일단 말해보긴 할 테니 잠시 기다려요.”
“감사합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간 채 모습을 감추었던 하마란은 조금 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매장이 완공된 뒤에 시작하려고 했지만, 여러분의 열의를 높이 사서 바로 오늘부터 점원교육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하마란은 그들을 데리고 본래 성의 안주인이 사용하던 안채로 갔는데, 그곳에 도착하자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견습 사제들이 줄지어서 신입 점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분은 일단 제복을 착용해야 합니다. 여기 계신 견습 사제분들이 도와주실 테니 지시에 따라 주십시오. 아, 물론 제복에 대한 비용은 저희들이 전액 부담하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제복이라고는 해도 결국 메이드복의 변형이다. 어쩔 수 없다. 사업주 자체가 악덕 변태인데, 직원들이 그 손길을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형진이라고 해서 이 모든 상황이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쳇… 미니스커트로 하고 싶었는데. 아얏!”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는 형진의 뺨을 꼬집은 것은 바로 제랄딘이다.
“큰 일 날 소리 하지 말아요. 그러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렇지 않아도 죄다 어린 여자애들만 고용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분위기가 이상한데.”
“하지만…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라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자꾸 그러면 미엘 언니 깨울 거에요.”
“크흠. 그건 참아줘.”
미엘을 깨운다는 소리에 끽 소리도 못하고 찌그러지는 형진의 모습에 유아는 빙긋 웃음을 짓는다.
“어차피 어떻게 해 볼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말만 이렇다니까요.”
그 말을 들은 형진은 입이 댓발이나 나온 모습으로 툴툴 거리다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쳇. 할 수 없지. 내가 특별히 디자인한 메이드복은 우리 마눌들이나 입혀 보는 수밖에. 림! 그거 가져와봐!”
-네! 스승님!
림이 가져온 옷을 본 유아와 제랄딘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말이 메이드복이지, 앞치마를 제외하고는 컬러와 소매가 전부다.
“미쳤어요? 이런 걸 점원에게 입히려고 했단 말이에요?”
“하하, 설마 그럴 리가. 처음부터 이건 우리 예쁜 마눌들 입히려고 만든 거야. 봐. 사이즈도 딱 맞게 열두 벌만 만들었다고. 입어줄 거지?”
“어휴. 정말 못 말려.”
그렇게 형진이 마눌들과 투닥거리고 있을 동안 점원들은 새로운 제복을 모두 갖춰 입었다. 기본은 메이드복이지만, 긴 치마와 함께 착용한 앞치마 때문에 딱히 색기가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는 정갈한 제복이다.
“모두 준비가 되었나요.”
“네.”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하마란은 그들을 거느리고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혹시나 또 연회를 베풀어주는 건가 싶어서 침을 꼴깍 삼키던 소녀들은 연회장 내부를 가득 채운 구조물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여러분이 앞으로 일하게 될 매장의 내부 구조를 간략하게 꾸며놓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여러분들은 앞으로 해야 할 업무에 대한 교육과 그것에 대한 실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사하세요. 여기 계신 분들이 앞으로 여러분의 교육을 맡게 되실 겁니다.”
하마란이 가리킨 곳에는 오귀스트와 각 신전에서 차출된 고사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껏 여자들만 바글바글하던 곳에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내자 점원들은 수군거리며 새로운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마란은 그런 점원들을 보며 말했다.
“이쪽에 계신 남자분은 전직 기사이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상류층이 손님으로 왔을 때의 대응 방법과 예절등을 가르쳐 주실 예정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오귀스트의 소개를 마친 하마란은 다시 점원들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헌신의 일격을 불러일으켰다.
“참고로, 이 남자는 제 남편입니다. 혹시라도 꼬리를 치거나 하는 분은 절대 편히 죽지 못할 테니 그리 아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