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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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예속
형진은 계속해서 중심 코어가 있을 거라 예상되는 지점으로의 전진을 계속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접근하면 할수록,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하네.”
악을 쓰며 달려드는 파트반 무리를 쓰러뜨리고 난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로 얻은 두 시녀의 호위를 받으며 룻을 줍고 있던 여신이 그런 형진의 말에 반응한다.
“뭐가요?”
“아니… 그게… 뭐라고 해야 하나. 어쩐지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라서요.”
“그래요? 길을 헷갈리거나 한 건 아니구요?”
“네. 그건 틀림없습니다.”
그냥 감에 따라 움직이거나 지형을 확인할 수단이 없다면 모르지만, 형진은 서브 코어를 설치하는 식으로 지형 그 자체를 밝혀 나가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 식의 착각을 일으킬 여지는 전혀 없다.
잠시 더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역시나 별다른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형진은 그냥 착각이겠거니 하며 다시 전진을 계속했다.
그런데 그렇게 전진하다보니 통로의 구조가 조금씩 이상해진다. 동굴의 형태 자체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쭉 뻗은 직선 형태의 통로가 많아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몬스터의 출현 빈도도 늘어났다. 어떨 때는 채 몇 걸음 움직이기도 전에 새로운 리젠 장소가 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래도 중심 코어에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여신은 형진이 하려는 일이 잘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대답한 것이지만, 형진은 역시나 계속해서 그 강도를 더해가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다소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예전에 그가 했던 게임의 던전과 비슷하다는 식의 기시감이 아닌가 하고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엘리시온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했던 게임도 마찬가지.
물론 엘리시온의 경우엔 전투 컨텐츠보다 생활 쪽에 전념해서 그런 쪽의 정보가 부족하긴 했지만, 그도 던전이나 레이드 보스 공략 같은 영상은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는데 적어도 이런 식의 구조물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쨌거나 그렇게 조금은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대미궁 내부를 탐색하다가, 기존에 설치한 서브 코어의 탐색 범위를 벗어난 것을 깨닫고는 새로운 서브 코어의 설치를 시도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코어의 설치가 거부되었습니다.]“엥?”
설치 거부라니.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지금까지 대미궁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라 형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이번에도 코어의 설치가 거부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튕겨지든 그가 만든 코어가 다시 돌아온다.
혹시 중심 코어에 인접한 지역이라서?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코어의 장악력이 높은 지역이라면 새로운 코어의 설치를 거부하는 식의 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확실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단순히 범위가 겹친다고 해서 코어 설치가 거부되었다는 메시지가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응? 잠깐만.”
그렇다. 메시지가 나왔다. 어째서?
형진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메시지 시스템은 공포와 죽음께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보다 정보를 간단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실제로 유아의 경우엔 조력자 신분을 얻기 전까지 그런 식의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하지 못했다. 이것은 다른 일반인도 마찬가지여서, 형진이 만든 음식을 먹더라도 그저 기운이 난다거나 활력이 생긴다거나 힘이 솟는다거나 하는 식의 느낌만 받을 뿐, 명확한 정보를 전달받지는 못한다.
그런데 메시지가 나왔다. 그것도 코어의 설치가 거부되었다는 식의.
실패가 아니다. 거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간단하다. 코어의 설치에 대한 메시지가 이미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런 식의 코어 설치가 형진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상하다. 일전에 형진이 코어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순간 던전 창조라는 스킬이 새로 만들어졌고, 그것이 업적 알림을 통해 알려지기까지 했다. 만약 코어 설치 자체가 형진이 처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던전 창조라는 이름 자체는 형진이 붙인 것이기에 의미가 없다.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형진이 만든 기술의 본질은 희귀급 이상의 아이템에 임의로 인간의 사념체를 융합하여 코어로 만든다는 그것을 활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형진이 만든 기술에서는 코어 설치가 거부된다는 식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막말로 바로 옆에 딱 붙여서 두 개의 코어를 설치해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형진과 같은 방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코어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던전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하나의 코어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코어를 연계시켜 설치하는 보다 복잡한 기술이라면.
그렇다면 이미 이런 식으로 코어 설치가 거부되었다는 메시지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코어 설치만의 목적이 아니라, 여러 개의 코어를 연계시켜 특정한 효과를 유도하는 식의 기술이라면, 정해진 장소가 아닌 곳에 새로운 코어를 설치할 경우 간섭 효과가 일어나 기존에 설치된 코어의 연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
그것을 깨달은 순간, 형진은 지금까지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형진은 곧바로 자신이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한 곳 이후의 구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몬스터의 리젠 위치와 예상되는 중심 코어와 서브 코어의 위치 또한 확인했으며, 지나온 통로의 형태 또한 다시 확인해 봤다.
그랬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느낀 기시감은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하하… 그랬군. 그래서 묘하게 자꾸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거야.”
허탈할 정도다. 왜 이것을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대미궁.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복잡한 회로였다.
단지 그 구성 자체가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형태라는 차이가 있을 뿐. 형진이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그가 과거 보았던 여러 가지 회로판과 그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그가 봤었던 회로가 2차원적인 것이라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대미궁은 3차원 형상을 지닌 회로라 할 수 있었다.
서브 코어나 몬스터의 리젠 장소 등은 그런 회로에서 각각 전자 부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저항이나 코일이나 콘덴서나 다이오드 같은, 그런 식의 소자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회로판이었던 것이다.
“설마…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니.”
형진은 대미궁을 장악한 뒤 그것을 구성하는 코어들의 연계를 통해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가진 무언가를 만들어 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발상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구현되어 있었다. 그가 계획한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정밀한 형태로.
하지만 누가? 또한 어째서?
대미궁이 이미 그 자체로 거대한 연산 장치라면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던 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라면, 이런 식으로 그것을 훼손하려 드는 자가 나타나는 것을 그저 방관하지만은 않을 터.
때문에 형진은 긴장하며 주위에 대한 경계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도 딱히 그에게 적대적인 무언가가 출현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왜 그래요?”
갑자기 단검을 뽑아들고 주위를 경계하는 형진의 모습에 잠시 긴장한 모습을 보이던 여신은 아무리 봐도 별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게… 음… 혹시 이곳 대미궁에 대해 뭔가 알고 있으신 것 없으십니까?”
혹시나 해서 그렇게 물어봤지만, 여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시다시피 전 꽤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기 때문에…”
“그렇군요.”
보호와 균형은 잊혀져 있었기 때문에 이 세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빠짐없이 이 세계에 대한 것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라면 형진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곧바로 그리칸으로 돌아가 기젤을 통해 문의를 해볼까.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형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알려줄 것 같았으면, 그가 대미궁에 손을 대고 있을 때 이미 어떤 식으로든 대미궁의 실체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어떤 암묵적인 무언가에 의해 인간에게 이것에 대한 비밀이 알려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대로 대미궁의 중심에 다가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형진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절대 진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신에 의해 강제된 무언가라면 형진이 아무리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이고 다른 어떤 특별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이 대미궁 자체가 일종의 관문일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무언가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그렇다면 과연 그 자격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대미궁의 중심에 도달해,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형진은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는 양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집행자의 단검과, 체인 소드를 고쳐 쥐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추론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다. 무언가의 관문으로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우연치 않게 형진이 지닌 무언가가 이 대미궁이라는 거대하고 신비한 구조물을 지키는 보안의 일부를 회피하거나 무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지닌 대리자의 신분일 수도 있고, 함께 하고 있는 여신의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는 이미 대미궁의 실체에 접근한 상태. 여기서 일단 멈추든 계속해서 전진하든 모든 것은 그의 결정에 달려 있다.
공포와 죽음이라면 이미 그가 이곳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접근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천벌이든 뭐든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 막을 터. 그런 식의 강제적인 수단이 불가능하다면, 함께 하고 있는 여신에게라도 경고를 보내지 않을까.
형진은 한 번 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전진하겠습니다.”
“네.”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을 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신은 영락없이 자신에게 말한 내용이라 생각하고는 얼른 대답하며 배낭을 고쳐맨다.
피식.
형진은 그런 여신의 모습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는 이전까지와는 달리 조금 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대미궁의 중심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단 그 실체에 대한 것을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나서인지는 몰라도,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그가 생각하는 회로의 모습과 점점 더 유사한 느낌을 주기 시작한다.
기나긴 통로를 지나는 동안 몬스터나 함정이 전혀 없는 구간이 있는가 하면, 서너 걸음 차이로 연속된 함정과 리젠 장소가 존재하는 곳도 있었다. 한 번 돌파하고 나면 한 동안 리젠이 이루어지지 않는 장소가 있는가 하면, 해치우기가 무섭게 곧바로 새로운 몬스터가 소환되는 곳도 있었다.
“우와아아…”
그렇게 진행하다가 새로운 서브코어를 발견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무려 세 개나 되는 코어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 이거 안 가져가요?”
세 개의 코어가 반짝이는 빛을 뿜어내고 있는 모습을 감탄하며 지켜보던 여신은 형진이 그냥 그곳을 지나쳐 가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아무래도 뭔가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런가요.”
가져가기로 마음 먹는다면 그것을 보호하는 힘 정도는 인스턴트 킬로 부술 수 있겠지만, 형진은 이 거대한 구조물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고 싶었기에 그것에 손대는 것을 뒤로 미루었다. 어차피 가져가기로 마음먹는다면 요정의 문을 통해 언제든 돌아와서 가져갈 수 있으니 굳이 이 모든 것을 망가뜨릴 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미리 손을 댈 필요는 없다.
여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따져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처음부터 형진의 일을 돕는 것이 목적일 뿐, 대미궁이나 아이템 같은 것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