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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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예속
자세히 살펴보니 몽마들은 유혹의 로트나라는 본디지 슈트를 입은 작은 요정 사이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할 녀석에 가져다주면 아주 좋아하면서 여러모로 애지중지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녀석도 요새 애들 기저귀 빤다 뭐한다 한껏 고생했으니 슬슬 선물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잉여인간 일직선으로 향하고 있는 판에 이런 것까지 가져다 주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될 것만 같아 무섭다.
“어, 어떻게 된 거지?”
“그러게. 원래 저 옷을 입으면 우리가 몸을 빼앗아야 하는데.”
역시 여신에게 바보 소리를 들을 정도의 녀석들이라 그런지 따로 묻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척척 비밀을 털어 놓는다.
“…”
물론 그 말을 들은 하엘은 그렇지 않아도 속이 부글부글 끓던 참이라 곧바로 화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쯧. 어디서 불을 피우고 난리야. 얼른 못 꺼? 피 같은 아이템이 상하잖아. 그거 내거거든?”
“진의 말대로에요. 어서 끄지 못해요?”
“…”
그러나 허리에 손을 척 얹은 채 화를 난 표정으로 꾸짖는 여신의 모습에 하엘은 다시 깨갱하며 마음속에 일어나는 불길을 꺼야만 했다. 차라리 화끈하게 불이라도 피웠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렇지도 못하니 속만 더 부글거린다.
하지만 그런 하엘의 모습과 그녀를 꾸짖는 여신, 그리고 그런 여신을 데리고 다니는 형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두 몽마는 비로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자신들을 깨우는 열쇠가 되는 아이템들을 착용한 건 무려 환수다. 그것도 딱 보는 순간 자신들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막강한 힘을 지닌 그런 환수.
게다가 그들의 눈앞에는 무려 여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들과 비슷한 크기의 체구를 가지고 있긴 해도 그녀가 지닌 격은 분명히 신의 그것이었다. 고작해야 다른 이의 마음 속 빈틈을 노려 몸을 빼앗거나, 마음 속에 기생해 정기를 빨아 먹는 정도의 능력을 지닌 그들로서는 허락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감히 똑바로 쳐다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런 엄청난 격을 지닌 존재다.
게다가 단 하나 뿐인 인간도 뭔가 이상하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는 동안 인간들에게도 뭔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무언가 강대한 신의 힘이 그의 정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영혼 자체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사면초가. 몸이라도 빼앗았으면 어떻게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인간과 여신, 그리고 환수는 그럴 마음만 있다면 마치 지나가던 개미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이듯이 그들을 소멸시켜 버릴 수 있는 존재들이다.
“살려주세요! 뭐든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흐어엉.”
“노예든 뭐든 상관없어요! 어떻게 풀려난 봉인인데… 엉엉엉.”
형진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그렇게 대성 통곡하는 녀석들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여신에게 물었다.
“몽마라고요?”
“네. 정확히는 허세와 망상을 모시던 시녀들이었다가, 죄를 짓고 저런 모습이 되어 버렸죠.”
허세와 망상?
갑자기 튀어나온 신의 이름에 형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죄였습니까.”
그러자 여신은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기 힘든 일입니까?”
“그게… 휴우. 할 수 없죠. 이건 비밀이니까 진님만 알고 계세요.”
“…”
원래 모든 비밀이 다 그렇게 퍼져 나가는 법이지. 게다가 자신만 알고 있으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지만, 멀뚱히 지켜보는 이가 셋이나 더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이런 여신에게 바보 소리를 들을 정도면, 이 몽마들은 도대체 얼마나 바보인거냐.
“사실은요. 얘들은 엄청 불쌍한 애들이에요.”
“왜요?”
“혹시 아세요? 허세와 망상이 이 세계를 버리고 사라져 버린 이유.”
그거라면 이미 요정들과 만났을 때 전해들은 얘기다.
“토너먼트에서 부정을 저지른 일 말씀이십니까?”
“아,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 설명하기가 쉽겠네요. 쟤들은 바로 그때 허세와 망상이 지은 죄를 전부 뒤집어썼어요. 하기야 그때 부정이 발각된 계기가 쟤들 때문이니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할 일이긴 하지만요. 신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일이랍니다.”
“…”
그제서야 여신이 보자마자 바보 운운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몹쓸 신은 희망과 생명 뿐인줄 알았더니, 허세와 망상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자기 죄를 아랫것들에게 뒤집어씌우고는 그냥 도망쳐 버리다니. 아니, 차라리 그냥 방치하다시피 했던 희망과 생명보다 이쪽이 훨씬 더 악질이다. 책임을 져야 할 자가 책임을 지지 않고 시녀에게 그것을 떠밀다니. 이런 게 갑의 횡포라는 것인가.
“흑흑흑…”
“엉엉엉…”
그 때 일이 생각난 모양인지 마야나와 로트나는 무척이나 서러운 모습으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쳇. 마음 약해지게스리.
“허세와 망상의 권속이라면 남은 아니지. 어쨌든 그 신의 힘도 내가 사용하는 중이니.”
그렇게 말하며 허세와 망상의 단장을 꺼내 보이자, 엉엉 울고 있던 마야나와 로트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그건…”
“그건… 요정들이 가지고 있을텐데… 어떻게?”
형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내가 요정왕이 되어 버렸거든.”
“아….”
“그런…”
마야나와 로트나는 잠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형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서로를 돌아보는가 싶더니 다시 형진을 향해 꾸벅 절을 했다.
“단장의 주인을 뵙습니다.”
“단장의 주인을 뵈어요.”
그렇게 인사를 한 두 몽마는 애절한 표정을 지은 채 다시 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의 주인이시며 요정왕이시라면 저희들과도 남이 아닙니다.”
“과거 저희들도 요정이었던 때가 있었죠. 비록 죄를 지어 이런 모습이 되어 버렸지만.”
“부디 아량을 베푸시어 저희들을 받아들여 주세요.”
“이렇게 눈물로 부탁드립니다.”
어째 딱 봐도 요정 사이즈인데다 처음 등장할 때의 그 모습도 어디서 많이 본 것이다 싶었더니 역시 그랬다. 하기야 그 중2병신의 시녀였다면 오히려 이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가만, 그럼 지금 데리고 있는 요정들도 이런 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얘기인가.
“얘들, 원래대로는 못 되돌리는 겁니까?”
형진의 물음에 여신을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벌을 준 당사자인 허세와 망상이 직접 손을 쓰지 않는 이상은, 아마도 어려울 걸요.”
“그렇군요.”
정기를 빨아 먹고 사는 몽마라고 하면 아무래도 꺼림직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다. 마야나와 로트나는 엎드려 빌면서도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결정권을 쥔 것처럼 보이는 요정왕의 태도에서는 그리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저기…”
“왜?”
“저희들… 기분 나쁘지 않으세요?”
“뭐가?”
“그러니까… 정기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거라든가.”
“그런 거라면 이미 질리도록 경험해 봐서.”
“네?”
몽마들의 놀랜 표정을 보며 형진은 여전히 자신의 목을 휘감은 채 쿨쿨 잠이 들어 있는 미엘의 꼬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요즘은 어지간한 일에는 깨지도 않을 정도다. 깨면 깨있는 대로, 잠들어 있으면 잠들어 있는 대로 신경 쓰이게 만드는 못된 마눌이다.
형진은 보호와 균형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여신님.”
“네.”
“혹시 시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시녀요? 글쎄요. 딱히…”
처음에 버릇을 그렇게 들여 버릇해서인지 여신은 뭐든 혼자서도 잘한다. 몸을 씻는 거라든가, 옷을 갈아입는 거라든가, 방을 청소하는 거라든가. 어지간한 일은 전부 혼자서 척척 할 수 있을 정도다. 요새는 카트린이랑 노는 것에 재미를 붙여서 바느질 같은 것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런가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그냥 저 녀석들은…”
형진이 그렇게 말하며 단검을 빼들자, 마야나와 로트나는 엉엉 울며 여신의 치맛자락을 감히 잡지는 못하고 잡는 시늉만 하며 매달렸다.
“여신님, 제발 살려주세요.”
“저희들 일 잘해요. 이래봬도 허세와 망상을 백년 가까이 모셨거든요.”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자비를!”
“엉엉… 어떤 여신이신지는 모르지만, 원하신다면 개종이라도 할께요. 그러니 제발…”
갑자기 달려들어 그렇게 울어대는 통에 당황해 하던 여신은 개종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말 정말인가요?”
“네? 어떤…”
이것저것 아무거나 마구 떠들어대던 중이라 어떤 말에 여신이 반응한 건지 몰라 마야나와 로트나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의외로 어울리는 주종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러니까. 방금 개종하겠다 그랬잖아요.”
“아! 그거요?”
“물론이죠! 원하신다면 여신을 진심으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여신은 눈을 빛내며 나름 근엄한 표정으로 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그 마음이 사실이라면, 내 손에 입을 맞추세요.”
마야나와 로트나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네? 저, 저희들이 어떻게 감히… 차라리 옷자락이나 발에…”
와. 정말 비굴하다. 하기야 여신이 한번 후 불면 날아가 버릴 듯한 가벼운 존재감의 몽마들이니 저러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신도가 되겠다면서 처음 하는 말도 받아들이지 않는 건가요?”
여신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마야나와 로트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명하신대로 받들겠습니다.”
마야나와 로트나는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여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마야나가 먼저 눈을 질끈 감고는 여신의 손에 입을 맞춘다. 그러자,
화악!
문득 마야나의 몸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드러난 등에 문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보호와 균형의 낙인이었다.
“아아…”
마야나는 자신의 몸에 깃든 따뜻한 빛의 기운에 놀라 탄성을 터뜨렸다.
“당신에게 내려진 죄를 사해주지는 못해요. 하지만 그 죄를 나누어 가볍게 만드는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는 마야나의 모습에 방긋 웃음을 짓던 보호와 균형은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는 로트나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자, 당신도요.”
“명을… 받듭니다.”
로트나 역시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자 등에 문양이 새겨진다. 추종자로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진님.”
“네.”
“혹시 저들에게 줄만한 옷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저 모습은 좀…”
“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물론 요정들 사이즈의 옷 따위 지고 다닐 리가 없다. 하지만 형진이 누구인가.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몇 가지 도구를 꺼내더니 자르고 붙여서 그럴 듯한 코트 하나를 만들어 낸다.
“일단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거라도 걸치고 있는 편이 낫겠군요.”
“아, 그러면 되겠네요. 돌아가면 제 옷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진과 여신이 마야나와 로트나에게 옷을 입히는 모습을 보며 하엘은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거 입고 있어야 하는 거지. 자꾸 이상한 곳을 죄어 와서 기분이 점점 나빠진다. 설마 다 알면서 저러는 거 아니겠지. 후… 말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만 벗어도 되냐고 물어라도 볼 텐데… 라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저 두 몽마가 개종을 하고 낙인을 받아 추종자가 되었다면, 여신의 직속 시녀가 되는 셈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고작해야 탈것 신세. 그렇다는 얘기는 설마…
하하,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 할 리가.
“그만 됐으니까 이제 그거 벗어.”
“…”
그렇게 속으로 안절부절하고 있자니, 형진의 말이 들려온다. 이어서 여신이 그래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엘은 비로소 이 기분 나쁜 옷을 벗을 수 있었다.
형진은 하엘이 다시 넘겨준 체인 소드와 본디지 슈트를 일단 인벤토리에 넣은 다음, 죽어 있는 괴물의 시체까지 알뜰하게 담아 넣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던전 탐색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앞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여신은 새로 생긴 두 명의 시녀에게 말했다.
“자! 조심해서 따라와요!”
“네! 여신님!”
“마음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
다시 탈것 신세가 된 하엘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형진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데, 기분 좋게 안장에 올라 있던 여신은 문득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별 거 아니겠거니 하며 다시 앞서가는 형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