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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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진입
한바탕 웃고 나니 뭔가 맥이 탁 풀린다. 두려워하고 걱정했던 것이 거짓말 같이 느껴질 정도. 그래. 이건 상이다. 과거의 나를 직시하고, 감추어둔 채 묻어뒀던 그 모든 것의 주박으로부터 해방되라는 상.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층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러자 슬며시 공복이 느껴졌고, 다시 웃음이 새어나온다. 자신이 얼마나 굳은 표정으로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길래 여신께서 배고프다는 말도 못하고 혼자 꾹 눌러 참고 있었겠나 생각하니 간신히 눌러 참았던 웃음이 다시 비어져 나온다.
“일단 뭐 좀 먹을까요?”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진님이 그러길 원하신다면…”
어딘가의 츤데레 여주인공처럼 그렇게 고개를 돌린 채 말하는 여신의 모습에 형진은 다시 한 번 미친놈처럼 키킥거리며 그곳에 자리를 펴고 음식을 차렸다.
어차피 음식이야 넘친다. 도핑용으로 이것저것 챙겨둔 것도 있고 조만간 있을 납품용 전투식량도 있고.
잘 무두질해서 말려둔 동굴곰의 가죽을 돗자리처럼 펴고 넓게 펼쳐진 평원을 바라보며 식사를 즐긴다. 자꾸만 웃어대는 것이 창피했던지 방금 전까지 뾰로통하게 삐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여신께서도 갖가지 음식이 눈앞에 펼쳐지자 전용의 포크를 장비가 장팔사모 다루듯 휘두르며 식사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사를 하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이곳이 단순히 게임 속이라면, 이런 식으로 공복이 해결되는 건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하는 그런 느낌. 물론 허세와 망상의 권능이라면 보통의 인간이 지닌 감각을 속이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자신은 그렇다 쳐도 보호와 권능은 엄연히 여신이 아닌가. 그런 여신이 아마루 아바타 상태라고는 해도 허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음식을 먹고 공복에서 벗어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흠…”
공포와 죽음께서 내리신 퀘스트 내용을 다시 훑어본다. 그곳에는 거짓된 천국이라는 문구가 명시되어 있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지금 그들이 있는 이 공간이 진짜 엘리시온과는 다른 곳임을 의미한다.
뭔가 이 게임의 실체에 대한 실마리가 잡힐 듯 말 듯 아리송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아직 뭔가를 확정짓는 것은 너무 섣부른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신이 만들었는데 보통의 가상 현실 게임과는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겠나 싶은 생각도 조금쯤은 드는 게 사실이고. 중요한 건 왜 이런 걸 이곳에 만들었느냐는 점이 되겠지만, 그것 역시 지금 당장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일단 그건 그렇다 치고.
예상 외의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다시 엘리시온이라는 이름을 지닌 게임에 접속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좋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곧바로 깽판을 놓고 게임을 박살 내버리는 것이 가장 간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보통 게임이 아니다. 바로 허세와 망상이라는 신이 직접 손을 댄 물건이니, 그가 이곳에서 게임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하는 어떤 일을 벌이게 된다면 허세와 망상에게 그 일이 전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을 파악하게 된다면 허세와 망상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에게 제재를 가하고자 할 수도 있다.
단순히 대미궁의 코어를 기능 정지시키는 것이든,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침범한 형진이라는 이물질에 직접 손을 쓰는 것이든 간에, 신이라는 존재와 직접 손을 섞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허세와 망상은 눈앞에서 슈크림을 생쥐처럼 파먹고 있는 보호와 균형과는 달리 잊혀진 신이 아니다. 한때는 비록 부정을 저지르긴 했어도 공포와 죽음이나 신뢰와 헌신 같은 강대한 신들을 밀쳐내고 토너먼트를 장악했던 적도 있는 그런 신이다.
만약 이 세계에서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은연중에 그의 신도로 인정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그 힘은 과거보다 더 커졌을 수도 있다. 생산력은 물론이고 그것을 통한 인구 자체가 압도적인 지구의 인구를 끌어안았다면 그 힘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다시 퀘스트의 내용을 확인해 보았지만, 거짓된 천국의 실체를 확인해 보라는 내용 이후로는 갱신이 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 공간에 공포와 죽음의 힘이 미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집행자로서의 힘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차라리 한 번 확 뒤집어엎고 그냥 깔끔하게 잊을까 하는 생각도 떠올렸지만, 그건 너무 간단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좀 더 확실한 것이 좋지 않겠는가. 문제는 과연 어떤 것이 가장 확실하고 충격저인 방법인가 하는 점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잠시 생각을 정리한 형진은 일단 게임 내의 상황을 돌아보기로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던가. 지금 형진은 자신이 세계를 넘어간 이후에 이곳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부족한 상태다.
“후아아아아…”
형진이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동안, 여신은 자신 몫의 음식을 배불리 먹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는 앞에서 족히 삼인분은 먹어 치운 것 같은데. 저 작은 몸 어디로 그 많은 음식들이 다 들어가는지. 엉뚱한 곳에서 위대한 여신이다.
“더 드시지 않고요.”
배를 문지르며 풀어진 표정을 짓고 있던 여신은 형진의 말에 얼른 자세를 바로하며 대답했다.
“많이 먹었어요. 잘 먹었습니다!”
“만족스러우셨다니 다행이네요.”
형진은 자리를 정돈한 뒤, 워프 게이트로 다가섰다.
접속할 때 테스터라고 했던 것이 기억나서 혹시 뭔가 특별한 것이 없나 하고 살펴봤지만 그런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적어도 GM 명령어나 메뉴 같은 것이 눈에 띄지 않는 건 확실하다. 일단 이곳을 돌아보는 일이 끝나면 다시 대미궁으로 돌아가 코어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대미궁의 그 무지막지한 구조를 전부 해석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릴렉스. 릴렉스.
차분하게 마음을 먹어보자. 오늘은 그냥 정찰일 뿐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자. 서두를 필요 없다. 느긋하게 가는 거다. 느긋하게.
워프 게이트에 다가서자 이동할 수 있는 장소의 목록이 나타난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나타난 목록에 기재된 장소는 단 하나. 요르긴이라는 이름 뿐이다.
요르긴, 요르긴.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날랑 말랑.
뭔가 애매하긴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몇 가지는 분명해졌다. 요르긴이라는 곳은 적어도 그의 계정이 삭제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곳이거나, 또는 생산과 관련된 것이 전무해서 그가 알 필요가 없는 곳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동하겠습니다.”
“네.”
형진은 여신이 다시 어깨 위에 올라앉자 바로 워프 게이트를 통해 이동을 실행했다.
화악.
눈앞에 한 차례 빛이 쏟아지는가 싶더니,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북적대는 마을에 들어섰다.
“호오…”
딱 봐도 어느 정도 레벨이 되는 유저들로 보이는 자들이 마을 이곳 저곳에 들어차 있었다. 솔직히 예전에 엘리시온을 해보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사냥러들이 북적거리는 곳은 별로 본적이 없는 터라 조금 신기한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뒤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하는 거에요. 도착했으면 얼른 비켜서야죠. 그렇게 막고 서있으면 뒤에 오는 사람들은 어쩌라고요.”
“아, 죄송합니다.”
엉겁결에 사과를 하고 옆으로 비켜서자, 흥 하는 목소리와 함께 몇 사람의 유저들이 게이트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간다.
“오늘도 사람이 우글우글거리네.”
“후아. 천 명은 족히 되겠는데.”
“아무리 이벤트라도 이건 너무 하네. 이런 외딴 곳까지 사람이 이렇게 바글거려서야 원.”
“다음 맵 얼른 안 열리나. 이래서야 몹보다 사람이 더 많잖아.”
“사람보다 보스가 더 많이 나오면 그게 더 문제 아닌가?”
“그거야 그렇지만.”
오호라.
대충 지나치며 주워들으니 뭔가 이벤트가 열리는 모양이다.
“우와아…”
형진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여신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연신 탄성을 터뜨리느라 정신이 없다. 하기야 딱 봐도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사냥을 하러 온 건지 파티에 온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화려한 옷차림은 물론이고, 분명히 옷을 입고 있는데도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야시시한 코스튬에 이르기까지 별에 별 모습을 한 사람들이 딱 봐도 천 명 가까이 우글거리고 있으니 시골뜨기 여신인 보호와 균형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주위를 지나는 사람들이 워낙 눈에 띄는 옷차림이라, 단색의 두건에 눈가리개를 하고 트랜치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은 오히려 너무 수수해 보일 정도다. 그저 목을 휘감은 채 잠들어 있는 미엘이나 그녀의 꼬리를 소파 삼아 어깨에 앉아 있는 귀여운 여신, 그리고 툴툴거리는 기색이 가득한 모습으로 발치를 따라다니는 하엘의 존재 정도가 조금 특이해 보일 뿐. 그러나 그 마저도 펫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특별히 눈에 띈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다.
“여긴… 신기한 곳이네요.”
“그러게요.”
형진은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눈에 띄는 코스튬 같은 것이 있으면 마눌들에게 입혀 봐야겠다 생각하며 기억해 둔다는 핑계로 잠시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마을 한쪽에 자리 잡은 위탁거래소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장 이 게임을 끝장낸다든가 하는 식의 복수를 할 것이 아니라면, 활용할 수 있는 요소중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것이 바로 거래소다. 시세차익 같은 부분은 물론이고, 산업 기반이 아직은 취약할 수밖에 없는 그쪽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확인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이 게임 안에서 산 물건이 그쪽 세계에서 그대로 활용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노다지를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특히 금속 주괴 같은 것이 그렇다. 이런 광물 자원 같은 경우는 각 국가에서 전략 자원 비슷한 취급을 받기 때문에 소량이라면 몰라도 개인이 대량으로 구입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형진이 세공 분야의 장인에 오른 뒤로 금속 가공이 나을지 석재 가공이 나을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런 원자재 수급의 문제 때문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기억을 뒤져서 이런 저런 물건의 시세를 비교해 보고 있는데, 문득 여신이 무언가를 빤히 쳐다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역시나 거래소에 들러서 무언가를 살피고 있는 한 유저의 펫이었다. 상반신은 토끼인데 하반신은 캥거루 같은 느낌의,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모를 기이한 생물이다.
형진은 거래소의 품목을 검색해 그 펫의 이름을 알아냈다. 확인해 보니 테이머가 길들인 동물이 아니라 캐시로만 구매할 수 있는 프리미엄 펫인 주머니 토끼라는 녀석이다.
“한 마리 구해드릴까요?”
“네? 그, 그게…”
입을 헤 벌린 채 침까지 뚝뚝 흘리며 바라보던 주제에 형진이 물어보자 아니라는 척 황급히 딴청을 부린다. 물론 그래봐야 여전히 눈동자는 그 주머니 토끼라는 녀석을 계숙 뒤쫓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지간히 귀여운 것에는 사족을 못 쓰는 여신이다.
“잠시만요.”
형진은 구매할 방법이 없나 하고 구매창을 열어 보았다. 이전의 계정은 삭제가 되었고, 달리 현실로 돌아갈 방법도 의지도 없는 상황이라 캐시를 통한 구매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유저간의 거래가 가능한 품목이라면 금화든 아이템이든 써서 살 수도 있으니 그것을 확인해 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구매창을 여는 순간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보유한 캐시 항목에 수백만이 넘는 액수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그가 바라보는 와중에도 계속 그 양이 늘어가는 것이 아닌가.
순간 버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것은 테스터에게 주어진 일종의 보너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계속해서 증가하는 금액을 보는 순간 이것이 저쪽 세계의 무언가와 연동되는 개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엘리시온의 캐시는 바로 저쪽 세계의 공헌도와 같은 개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