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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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진입
“하… 하하…”
그랬던 것이었나. 이렇게 다시 한 가지를 알고 나니 아귀가 딱딱 막아 들어가는 느낌이다. 자신의 캐릭터가, 계정이 그렇게 가차 없이 삭제되어 버렸던 이유가 이제야 그래서 그랬구나 라는 식으로 딱 머리 속에 들어와 박힌다.
이곳, 엘리시온이라는 게임이 허세와 망상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고, 캐시라는 것이 추종자들이 신들에게 봉헌하는 공헌도와 그 개념이 일치하는 것이라면, 과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캐릭터와 계정이 삭제되어도 이상한 것이 전혀 없다.
물론 허세와 망상이 자신에게 제재를 가하는 것에 관여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자칫 엘리시온이라는 황금 어장을 박살낼 수도 있는 위험요소라는 사실만으로도 훌륭한 이유가 된다. 게다가 공헌도는 하나도 쌓지 않은 주제에 자칫 게임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으니 더 문제가 되기 전에 싹을 잘라 버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열성적으로 공헌도를 봉헌하는 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뭐랄까. 확실한 이유를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쾌하기 보다는 허탈한 감정이 더 앞선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이 허탈하고, 또 그런 식으로나마 납득이 된다는 사실이 어이없다. 망할.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그 일이 기화가 되어 지금의 그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때 느꼈던 처참했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가 지금의 모습과 능력을 갖추기를 기원하며 그런 짓을 벌였던 것조차 아닌 이상은.
확 다 뒤집어 버릴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대미궁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엘리시온이라는 게임 전체를 지탱하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법. 형진이 엘리시온을 만든 장본인이라도 그런 식으로 전부 한 곳에 모아 두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던전이란 기본적으로 언젠가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장악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한 구조물이니까. 물론 더 자세한 것은 확인을 해봐야 겠지만.
어쩌면 대미궁에 그러한 것을 남겨둔 것은 이 세계에 남은, 요정이라는 이름의 추종자 종족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요정여왕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신물인 허세와 망상의 단장이 마스터키로서 작동하는 구조물인데다, 요정의 나라로 통하는 입구가 발디프스 대산맥 안에 존재하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확실히 차고 넘칠 정도의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원래는 나중에 이곳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고 나면 기회를 봐서 불러들이려 했거나, 필요한 일이 생기면 유용한 노동력인 요정들의 도움을 받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것이 허세와 망상의 진의였는지는 지금으로서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아직은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
“진님?”
토끼를 구해준다더니 또다시 심각모드로 들어가 버린 형진의 모습에 여신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잠시 뭣 좀 생각하느라…”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그렇게 대답했지만, 여신은 머뭇거리다가 문득 두 손을 꼭 마주 쥔 채로 형진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다.
“진님.”
“네?”
우물쭈물 거리던 여신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역시… 많이 비싼가요?”
“그거야…”
형진이 대답을 얼버무리자, 여신은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저, 더 열심히 일할게요. 그러니 제발 이번만 어떻게 안 될까요?”
“…”
월급날을 열흘 남겨 놓고 제발 한 번만 가불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이 이럴까. 아니, 여신의 이토록 숭고하고 애절한 모습에 그런 속된 비유를 가져다 붙이는 건 옳지 못한 일이다. 물론 예상치 못한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형진이 정말 악독한 심성을 가졌다면, 불행히도 그는 이렇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여신에게 차마 불경한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아니, 이걸 불행히도라고 말하는 시점에서 이미 타락 확정인 건가.
“풉. 죄, 죄송합니다. 그거 때문에 고민하던 것이 아닙니다. 잠시만요.”
“…”
다시금 형진이 웃음을 터뜨리자 여신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동시에 볼을 부풀린다. 형진은 그 모습에 한번 더 웃음이 뿜어져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얼른 구매창에서 주머니 토끼인지 지갑 토끼인지 하는 녀석을 구매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정말 삐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구매 완료가 뜨자 형진의 인벤토리에 펫 목걸이 하나가 들어온다. 확인해 보니 이 목걸이를 손에 쥐고 사용하면 펫 정보창에 등록되며 문제의 주머니 토끼가 소환되는 모양이다.
“자, 여기 있습니다. 이걸 사용하면 녀석이 소환된다고 하네요.”
“와아! 감사합니다!”
여신은 펫 목걸이를 받아들고는 너무 좋은지 형진의 어깨 위에서 깡총거리며 뛰다가 미끄러져 떨어질 뻔 했다. 형진이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받쳐주자 다시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 위에 자리를 잡은 여신은 얼른 입술을 내밀어 형진의 뺨에 입을 맞춘다.
“그냥… 별 뜻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감사의 표시로.”
충동적으로 저질러 놓고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는지 얼른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모습이 떠 얼마나 귀여운지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여신의 감사 키스를 받아보겠습니까.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아, 알면 됐어요.”
그렇게 대답하며 딴청을 부리던 여신은 다시 조심스럽게 형진에게 물었다.
“지금 불러내 봐도 되나요?”
“글쎄요.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몇 가지 문제가 있어서. 게다가 주위에 사람도 많고.”
그렇지 않아도 근처의 몇몇 사람들이 형진과 여신을 묘한 시선으로 흘끔거리고 있었다. 하기야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요정 형태의 펫이랑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보일 테니, 그런 식으로 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형진은 일단 간단하게 시세만 확인한 다음 거래소를 빠져 나왔다. 어차피 당장 무언가를 살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나 공헌도의 경우엔 여기서 구매를 하는 대로 모조리 허세와 망상의 수중에 들어가 버릴 테니 별로 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쩝. 공포와 죽음께서 공헌도 상점의 품목을 좀 늘려 주시면 팍팍 써드릴 텐데 말이지.
그렇게 거래소를 빠져 나오는데, 문득 마을에 모여 있던 자들에게 전체 공지가 전해진다.
[안녕하십니까. GM 그리칸입니다.]“풉!”
그거 참. 이렇게 공교로울 데가. 하필 GM 이름이 그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그리칸이라니.
이로써 이 엘리시온이 그가 넘어간 세계, 타나토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증거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오늘은 사전에 공지해 드린 대로, 보스 소환 이벤트를 벌이도록 하겠습니다. 보스는 마을 바깥에 조성된 대규모 결투장에 소환될 예정입니다. 이벤트 중에는 사망 패널티가 적용되지 않으니 참여하실 분들은 결투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아싸, 시작이다!”
“젠장! 도핑약 아직 못 샀는데!”
“어차피 한방에 죽을 녀석이 도핑은 무슨.”
“아니거든? 한 방에 안 죽거든? 나 방어구 강화했거든?”
이어진 GM의 공지에 유저들은 왁자지껄 떠들어 대며 마을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저희도 한 번 가볼까요? 가면서 그 녀석을 소환하는 것도 시험해 볼 겸.”
“네!”
주머니 토끼의 펫 목걸이를 손에 쥔 여신은 반색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지금 여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본 새로운 토끼일 뿐, 이벤트 같은 건 관심조차 없을 것이다.
대규모 결투장이 어딘지는 몰랐지만, 어차피 우르르 몰려가는 인파들에 파묻혀 따라가는 식이라 찾아가는 건 문제가 없었다.
“저긴가 보군요.”
“와아…”
어떻게 보면 마을보다 더 큰 구조물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마도 길드나 클랜 간의 대결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로마시대 전차 경기장 같은 느낌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인구 분산책으로 보아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조물이다.
결투장의 위치를 확인한 형진은 슬쩍 인파에서 빠져 나온 뒤 인적이 드문 물가로 갔다. 펫 목걸이를 들고 안절부절하는 여신의 갈망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사용해 보세요.”
“네!”
마침내 다른 사람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으슥한 수풀 뒤에 도착해서 그렇게 말을 건네자 여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펫 목걸이의 사용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여신은 그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본래 여신이긴 해도, 이곳의 규칙으로는 펫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펫이 펫을 소환하는 건 시스템 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
몇 번이고 시도를 해봐도 같은 결과가 나오자 여신은 눈물마저 그렁거리며 울먹이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정말 톡 건드리는 순간 눈가에 맺힌 눈물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그런 모습이다.
불쌍하고 안 되어 보여야 하는데, 어째선지 형진은 다시 웃어버릴 뻔 했다. 다행히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은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여신에게 말했다.
“다른 방법을 써봐야겠습니다. 일단 그걸 저에게 주세요.”
“네…”
어쩐지 역할이 반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보통은 문제가 생기면 신에게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빌어야 하는데, 이 여신은 어떻게 된 일인지 문제가 생기면 형진에게 맡겨 버리는 버릇이 생긴 모양이다.
형진은 일단 펫 목걸이를 받아들고 그것을 살펴 보았다. 모양은 그냥 평범한 애완동물의 목걸이를 닮았지만 엄연히 사용가능한 아이템이다.
사실 여신이 사용하나 그가 사용하나 소유권이 누구에게 속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니 큰 문제는 아니다. 여신으로서야 자신이 불러내고 싶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시스템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 그냥 형진이 불러내는 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방법이다.
여신은 그가 펫 목걸이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자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다. 저렇게 토끼가 좋을까. 그나마 있는 힘을 다 퍼줘서 잊혀질 정도로 무언가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좀 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긴 하다.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엉엉 울 기세라 그냥 모른 척 펫 목걸이를 사용한다. 그러자 곧바로 펫 목걸이가 사라지며 그들의 눈앞에 캥거루처럼 두 발로 선 귀여운 토끼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앞발을 든 채 뒷발로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토끼의 모습은 확실히 형진이 보기에도 꽤 귀엽다. 일반적인 토끼보다는 좀 살이 적은, 그래서 가축으로는 어떨까 싶은 형태. 하지만 단순히 외모만이라면 기존의 토끼보다 확실히 더 귀여운 느낌이다. 이러니까 여신이 안절부절할 수밖에.
“와아아아!”
여신은 크게 기뻐하며 얼른 형진의 어깨에서 뛰어내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토끼의 목을 껴안는다. 토끼는 얘가 왜이러나 하는 식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거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름은 어떻게 할까요.”
“음… 깡총이요.”
깡총이라. 딱 봐도 이 녀석의 외모에 걸맞는 이름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여신은 다시 한 번 그렇게 기뻐 하며 얼른 형진에게 날아와 그의 뺨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춰 주었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물론 그 와중에도 볼을 발그레하니 붉히고 있기는 하지만.
확인해 보니, 펫 정보창에 깡총이라는 이름으로 토끼가 등록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특기는 약초 탐지와 약초 캐기. 놔두면 근처에 약초가 있을 경우 알아서 그것을 캔 다음 주머니에 담아둔다고 되어 있다. 물론 펫 공통 스킬인 아이템 줍기 기능은 당연히 갖추어져 있고.
“자, 그럼 이벤트라는 것을 보러 갈까요?”
“네!”
여신은 어느 틈엔가 하엘의 등에 채워진 안장 위에 올라탄 모습으로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토끼를 사줬으니 그 값을 하고야 말겠다는 각오인 모양이다. 자신이 그렇게 가르치긴 했어도, 이 정도쯤 되면 아무리 악랄한 사기꾼인 형진이라도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그럼 시작합니다. 소환!] “와아아아아아아아!”
바로 그 때, 경기장으로부터 커다란 함성이 울려퍼진다. 아무래도 이벤트가 시작된 모양이다.
“이크. 시작되었나 봅니다. 어서 가죠.”
“네!”
============================ 작품 후기 ============================
2017.5.27. 주머니 토끼 소환 설정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