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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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마차
“아야야야야…”
망할 토끼 놈.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다니.
사실 이길 거라고는 생각도 않았다. 단지 누굴 향해서든 시원스럽게 뭔가를 풀어낼 대상이 필요했을 뿐.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름 체력이나 민첩 같은 수련을 했으니 조금은 해 볼만 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었지만.
간단하게 자평하자면, 그것은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쉬울 정도로 장렬한 개싸움이었다. 제대로 공격스킬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은신이나 잠행은 쓸 생각도 않고 물고 뜯고 차기를 반복하는 그것을 달리 뭐라고 표현할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형진에게나 해당하는 얘기일 뿐. 토끼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드는 누군가를 그야말로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팼다. 혹시라도 토끼의 종족 특성인 조루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불행히도 먼저 넉다운된 것은 역시나 형진이었다.
체력의 약점이 드러날 틈도 없이 뻗어버린 건지, 종족 특성마저 뛰어넘은 진정한 만렙 토끼인지도 형진은 끝내 알아낼 수 없었다.
기왕 이곳을 떠나는 김에 시원하게 이겨보고 싶었는데, 시원하게 두들겨 맞는 걸로 결말이 나고 만 셈이다.
역시 전투 스킬 없이 막무가내로 싸움을 벌이는 건 무리인 걸까, 아니면 정말 전투에는 소질이 없는 걸까.
그래도 그간의 수련이 아주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 일격에 뻗어버렸던 예전에 비하면 제법 오랫동안 버텼으니까. 비록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다행일 정도의 개싸움이긴 했어도 말이다.
“끙… 이거 왜 붓기가 안 빠지나.”
지나는 사람들이 형진의 얼굴을 보고는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망할 토끼 놈이 마치 원한이라도 있는지 얼굴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바람에 완전히 입체파나 야수파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버린 탓이다. 거짓말이 아니라, 이전에는 그냥 일격으로 자빠뜨리고 유유히 돌아가더만 이번에는 아주 이 악물고 패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혹시 일전에 잡아먹은 토끼랑 인척관계였던 것은 아닐까도 싶었지만, 그랬다면 아마 살아남지도 못했을 테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어느 쪽이 되었든, 그렇게 만렙 토끼는 다시 한 번 넘어야 할 벽으로 남게 되었고, 형진은 이래저래 아쉬움을 남긴 채 그란웰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
아란은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된다고 했지만, 그리칸은 생각보다 훨씬 더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만 믿고 무작정 걸어가려고 했다가는 아마도 길바닥에서 겨울을 만나 얼어 죽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추운 겨울을 길바닥에서 나고 싶은 생각은 없는 만큼, 형진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여기에 버스나 기차가 있을 리는 만무한 일. 쓸만한 건 역마차가 고작이다.
“그리칸까지 얼마입니까.”
“숙식은 알아서 해결. 출발시간에 맞춰 나오지 않아서 중간에 낙오되는 건 본인 책임. 이런 조건으로도 상관없다면 반트 동화 하나.”
“…”
인상도 접객태도도 풍채에 걸맞지 않게 뭔가 상당히 무뚝뚝한 아줌마다. 하긴 아줌마라고 다 누구 같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승차권을 대신할 목패를 건네받은 형진은 가는 도중에 쓸 물건들을 간단하게 구매했다. 그래봐야 침구 겸용으로 쓸 두툼한 망토와 물, 간이 식량 정도다. 대부분의 경우 숙식은 정거장으로 정해진 마을에서 해결하게 되지만, 장거리 여행 중에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단단히 준비하는 편이 좋다.
근처 가판에 벌려진 물품 가운데 계란이 있길래 하나 사서 얼굴을 문지른다. 차가운 계란의 느낌이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 와 닿으니 통증이 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다.
역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뭔가 유용한 게 없을까 하고 가판을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목토시. 목에 둘러서 추위를 막을 수도 있고, 끌어올리면 마스크 역할도 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다.
슬슬 추위가 다가오니 월동 대비로도 괜찮고, 끌어올려서 마스크식으로 쓰면 사냥개 코장식 같은 걸 장비했을 때도 유용하다. 코장식 자체는 월등하게 유용한 장비지만 아무래도 너무 외형이 튀는지라 드러내 놓고 쓰기가 난감하다. 그냥 괴짜로 인식하는 걸로 끝나면 차라리 다행. 하지만 그것이 뭔가 특별한 물건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 파리가 꼬이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런 물건으로 적당히 가리면 쓰기도 편하고 뒤탈 걱정도 줄어드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그렇게 잠시 쇼핑을 마치고 난 뒤 정거장에 마련된 긴 의자에 앉아 있는데, 한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뭘 봐. 구경났어? 확 눈알을… 컥!”
“입 다물어. 뭐가 잘 났다고 난리야?”
“…”
살펴보니 병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죄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손과 발에 족쇄를 채우고 쇠사슬로 묶은 채 끌고 오는 중이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번에 들어가면 십년은 꼬박 광산에 처박혀 있을 놈이니.”
“아하.”
아마도 그리칸 근처에 있다는 광산에서 노역형을 살게 될 모양이다. 문제는 죄수랑 같은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이 영 껄끄럽다는 정도. 공연히 여정 도중 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마차를 기다리던 다른 승객들도 그런 점이 걱정되었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를 눈치 챈 것인지 병사가 얼른 사람들을 무마했다.
“걱정 마십시오. 정말로 위험한 흉악범이면 이렇게 저 혼자 데리고 가겠습니까? 고작해야 소매치기 하다 걸린 잔챙이일 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야…”
잔챙이라는 말에 죄수는 다시 발끈하려다가 병사가 인상을 쓰고 노려보자 이내 찍 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저런 모습을 보면 병사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말썽의 소지가 있다면 일단 피하는 것이 상책이란 생각에 표 파는 아줌마에게 다가가 슬며시 물어보았다.
“저…”
“환불은 안 되요.”
“아니, 그러니까…”
“환불은 안 됩니다.”
“그게 아니라, 제 말은…”
“다음 마차를 타려면 다시 표를 사세요.”
“…”
망할. 아까부터 왜 그렇게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하는가 했더니 이런 문제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반트 동화 하나 정도 못 낼 정도로 가난한 것은 아니다. 은화도 있고 무려 바이겔 기념 금화라는 크고 아름다운 금덩이도 가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머물 집이 처음부터 주어졌던 그란웰과는 달리 그리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돈 있다고 함부로 쓰다가는 크게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쩐다. 그냥 가자니 영 찝찝하고, 그렇다고 새로 표를 사자니 돈이 아깝고.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내 역마차가 도착했다. 좌석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터라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얼른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형진 역시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아차하는 순간에는 이미 줄을 서고 난 다음이었다.
“쳇. 할 수 없군.”
딱히 다른 사람들도 죄수 때문에 표를 포기하려는 의사를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단순히 새로운 표를 살 돈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반트 동화가 뉘집 개 이름이 아닌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역마차는 세 명씩 네 줄로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놓여있는 12인승짜리였다.
두 명의 마부가 우편물을 내리고 싣는 동안, 마차의 문이 열리고 어느 틈엔가 매표소를 나온 무뚝뚝한 아줌마가 표를 확인하며 승객을 내리고 태운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 보니 이게 웬 걸. 죄수를 별로 개의치 않았던 걸로 보이던 사람들은 모두 앞좌석 쪽으로 세명씩 낑겨 앉고, 죄수와 병사, 형진과 웬 풍채 좋은 남자 하나가 뒷좌석에 덩그러니 마주보며 앉게 되었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오?”
“…”
죄수를 호송하는 병사의 물음에 왜 사람들이 자신을 피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기야 백주대낮에 대판 쌈박질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듯이 얼굴에 휘황찬란하게 색깔놀이를 하고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마을을 떠나오면서 숙적이랑 결판을 내보려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대판 깨지고 말았습니다.”
“저런.”
안됐다는 표정을 짓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수배범이 아닌지 의심하는 모양새다. 물론 낙인을 그들에게 드러내 보이면 알아서 깨갱하고 입을 다물겠지만, 공포와 죽음께서 어지간하면 성도임을 드러내지 말라 하셨으니 따라야겠지.
망할 토끼 놈. 언젠가 반드시 네 놈을 이기고 통구이를 만들어 먹고 말리라!
그렇게 마음 속으로 다짐을 하고 목토시를 끌어올려 얼굴을 반쯤 가린 다음 달걀로 다시 눈을 문지르고 있자니, 우편물을 다 옮겨 실은 마부가 종소리로 출발을 알린다.
“잠깐만요!”
그렇게 출발하는가 싶었는데, 누군가 허겁지겁 마차를 불러세우더니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바라보니 꽤 발랄한 분위기를 가진 짧은 머리의 여성이다. 모험가인 모양인지 가죽 갑옷을 걸치고 짧은 숏소드와 채찍, 그리고 투척용으로 보이는 단검까지 허리에 차고 있었다.
“어, 음…”
그녀는 잠시 마차 안을 들여다보더니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앞쪽의 좌석은 이미 만원이고, 뒤쪽은 자리가 남긴 했어도 험상궂은 남자들이 버티고 있으니 아무리 모험가라 해도 망설여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안 탈거요?”
“타요! 탄다고요!”
하지만 마부가 그렇게 재촉하자 그녀는 내 옆자리로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솔직히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붓고 복면처럼 목토시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어서 기피의 대상이 될 줄 알았는데 좀 의외다.
하기야 시커먼 남자들만 앉아서 가느니 여자 하나 정도 끼어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일이지.
“출발합니다!”
마부의 외침과 함께 다시 한 번 종소리가 울리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죄수가 마지막에 탄 여자를 향해 씩 웃으며 묻는다.
“어이, 예쁜이. 얼마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여자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죄수가 아니라 그 옆에 앉은 병사에게.
“병사 아저씨. 처형장 가는 거면 내가 싸게 처리해 드릴게요.”
“안 돼. 안타깝게도 광산가는 중이야. 노역에 문제만 없다면 적당히 손을 보는 건 상관없지만.”
“아하, 그렇군요.”
“컥!”
어느 샌가 뻗은 여자의 발이 죄수의 가랑이 사이를 마구 밟아대고 있었다. 오오, 대단해. 이런 데서 전기안마 기술을 보게 될 줄이야.
“좋니? 좋아?”
“커헉! 자, 잠깐… 그, 그만…”
“좋냐고. 새꺄. 이런 걸 원한 거 아니었어?”
“크헙! 그만! 항복!”
결국 죄수는 견디지 못하고 항복을 외쳤지만 여자는 끝내 죄수가 거품을 문 채 기절하고 나서야 고문을 멈추었다.
대단하다. 뭔가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
옆자리에 앉은 풍채 좋은 아저씨는 자기가 당한 것도 아닌데 얼굴이 핼쓱해져 있었다. 혹시 죄수가 그랬던 것처럼 뭔가 야릇한 생각을 떠올렸던 것일까. 하기야 죄수가 당하는 꼴을 옆에서 보기만 했는데도 머리털이 쭈뼛하고 곤두서는 건 형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이 놈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이군.”
“별 말씀을요.”
여자는 병사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그대로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어디 건드릴 테면 건드려보라는 듯이, 아주 당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