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9
29====================
6. 역마차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바라보니 가죽갑옷 위로 드러난 흰 목덜미가 보인다.
쳇. 괜히 어젯밤 일 생각나게스리.
성깔도 제법 있어 보이고, 복장이나 무장을 봐도 녹록한 상대는 아닐 것 같은지라 알아서 조심하기로 했다. 괜히 허튼 짓 했다가 거품 물고 쓰러진 죄수 꼴 나기도 싫고, 그럴 생각도 없었는데 괜히 누명 쓰는 건 더 짜증나는 일이니.
팔짱을 끼듯 망토 자락에 손을 집어넣고 흔들리는 마차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버스 같은 것보다야 그래도 인간미 나고 여행하는 분위기도 있지 않겠나 싶었지만, 창가도 아니고 가운데 끼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상태인데다, 덜컹거리기는 왜 그리 덜컹거리는지 멀미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형진마저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다.
“웁.”
아니나 다를까, 옆자리에 앉은 풍채 좋은 아저씨가 기미를 보인다. 망할. 자칫하다가는 대참사가 날지도 모르기에 형진은 얼른 그를 향해 말했다.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가십시오.”
“네?”
“마부들은 멀미를 안 하는데 안에 탄 사람만 멀미를 하는 이유가 실제 흔들림과 눈으로 보이는 풍경의 움직임이 달라서거든요. 그러니 마차 밖의 풍경을 보면서 가면 좀 덜할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래봐야 전정기관에서 계속 자극을 받으니 멀미 자체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코앞에서 대분화가 일어나는 참사는 막을 수 있을 터. 한 명이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쇄반응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멀미가 오는 건 형진이나 옆자리의 남자만은 아니었는지 곧바로 마차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정도로 마음이 잘 맞으니 여행중에 딱히 문제가 생길 여지는 없을지도.
물론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한 일이었다.
창밖의 풍경에서 마을이 사라지고 인적 없는 숲길로 들어서서 조금 가다가 갑자기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추어 섰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지루함으로 인해 졸린다는 느낌이 오던 상황이라 화들짝 놀라며 깨어나는데, 문득 마부의 음성이 바깥에서 들려온다.
“죄송합니다만 바퀴에 문제가 생겨서 잠시 내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산적 같은 것이 출몰했나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아쉽게도 그런 몰상식한 복사 붙여넣기 식의 이벤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차에서 내려 보니 마부 둘이 뒤쪽의 바퀴를 살펴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큰일인데. 그러고 보니 예비 바퀴도 온전한 게 없는데.”
“어쩌지? 앞서 마을에라도 급히 다녀올까.”
“그 마을에 바퀴 수리 가능한 목수가 있었어?”
“없었지. 젠장. 어쩌지?”
어쩐지 명색이 대중교통 수단인데 요동이 너무 심하다 싶더라니. 형진은 한숨을 푹 쉬며 마부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바퀴를 좀 볼 줄 압니다.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어? 목수셨습니까?”
“그냥저냥 바퀴 수리라면 좀 해봤습니다.”
“와! 희망과 생명께 감사를!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군요!”
“…”
희망과 생명이라는 말을 들으니 어쩐지 좀 기분이 나쁘다. 형진이 속한 곳은 엄연히 공포와 죽음이기 때문이다. 딱히 열성적인 성도인 것도 아니고, 가입조차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다.
대충 살펴보니 바퀴 살 몇 개에 금이 간 정도다.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난 것 치고는 큰 파손은 아니지만,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갔다면 바퀴 하나가 그대로 박살이 나고 마차가 주저 앉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축부터 시작해서 손 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게 되니, 제때 적절하게 마차를 세우고 승객들을 내리게 한 마부들 덕분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여기서 수리할 재료를 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니 예비용 바퀴에서 필요한 부분을 떼어 교체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마차 바퀴 자체는 규격품인지 교체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 미나라는 여자만 생각하면 짜증이 왈칵 치밀지만, 그래도 극단의 일을 맡은 것 자체는 큰 도움이 된 셈이다.
“실력이 대단한 분이셨군요! 바퀴 수리하는 목수들을 여럿 봤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해치우는 분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아부에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닌지라 마부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댔다. 다른 승객들도 자칫 노숙해야 하나 싶다가 의외로 간단하게 수리가 끝나자 눈치를 보며 고맙다는 말을 던진다.
“아저씨 목수였어요?”
다시 마차에 타는데 옆자리 여자가 그렇게 물어온다.
“그냥 이것저것 합니다.”
“헤에. 안 그래 보이는데, 의외네요.”
“…”
무슨 의미냐 그거.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어 버렸다. 뭔가 자기 할 말만 하고 마는 그런 성격인 것 같다.
다행히 마차 여행 첫날은 그 일을 제외하고는 별 탈 없이 끝났다. 마을의 집을 다 합쳐봐야 한 십여 호나 될까 싶은, 그란웰보다도 훨씬 작은 마을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굳어진 팔다리를 두드리며 숙박을 위해 마차에서 내렸다.
“저… 죄송하지만, 주무시기 전에 마차 상태를 좀 봐주실 수 없겠습니까?”
형진 역시 기지개를 켜며 마차에서 내리는데 문득 마부가 나와 그렇게 말을 걸었다.
“…”
하지만 형진은 뚱한 눈빛을 보냈다. 아까는 상황이 급해서 무료봉사를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데 그런 식의 무료봉사를 바라는 건 너무하지 않냐는 식의 그런 눈빛 말이다. 자기가 희망과 생명 같은 호구신을 믿는다고 다른 사람도 다 그런 호구일 거라 생각하면 곤란하지. 암, 곤란하고 말고. 공포와 죽음의 이름에 걸고 정말 곤란한 일이다.
“아, 물론 도착하면 마차 요금도 돌려드리고, 별도로 수고비도 쳐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안되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
비굴하다 욕하지 마라. 무려 반트 동화 하나다. 지역에 따라 교환비가 다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주화 100개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 바로 반트 동화다. 바퀴 하나 고치고 자기 전에 마차 잠깐 살펴보는 걸로 그 정도 돈을 벌 수 있는 고수익의 일자리는 집행자의 임무 란에도 올라오지 않는다.
축과 바퀴 같은 부위를 꼼꼼하게 살피고 난 뒤에 여관으로 들어오자 다른 이들은 모두 식사를 마쳤는지 몇 명만 남아서 벽난로 근처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친 다음 뒤뜰에 나가 이제는 거의 습관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 매크로 수련을 이어간다. 이제는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가서 매크로 수련만 가지고는 능력치가 잘 올라가지 않지만 이렇게 조금씩 올려두는 경험치도 쌓이면 무시하지 못한다.
“헤에, 목수들은 자기 전에 그런 체조를 하는 건가요?”
“…”
돌아보니 옆자리의 여자다.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은 일이라 형진은 계속해서 수련을 이어갔다. 여자도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그냥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한다.
보는 눈이 있으니 아무래도 수련을 이어가기가 껄끄럽다. 기왕 하는 김에 은신과 잠행 같은 것도 연습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수련을 마치고 물통의 물로 간단하게 땀을 씻고 방을 얻어 위로 올라가던 형진은 방문 앞까지 계속 쫓아오는 여자의 모습에 비로소 얼굴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어디까지 쫓아올 생각입니까?”
그러자 여자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아저씨는 안 물어봐요?”
“뭘 말입니까.”
“얼마냐고.”
“…”
그게 그 얘기였나. 하기야 얼핏 들은 기억도 난다. 여자 모험가들 중에는 돈이 궁할 때 스스로의 몸을 팔아 충당하는 경우도 있다던가. 남자들의 술자리에 의례 나오는 카더라 통신인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다시 물었다.
“왜 납니까?”
마부도 그러더니 이 여자도 설마 자신을 희망과 생명 신도로 보는 건가 싶다. 그렇게 호구스럽게 생겼나. 이렇게 토끼한테 얻어맞아서 엉망이 되었는데도? 그러고 보면 동네 아줌마들이 사람 좋아보인다고 했던게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아저씨만 안 물어 보길래요. 얼마냐고.”
“저만요?”
“네.”
“그럼 제 옆자리의 그 분도?”
“네.”
“죄수 끌고 가던 병사분도?”
“네. 마부들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어보던데요.”
“…”
마부까지 물어볼 정도면 말 다한 셈이다. 발랄해 보이긴 해도 그렇게까지 색기 넘치는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물었다.
“그래서, 얼맙니까.”
여자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잠시 머뭇거린다.
“음… 글쎄요. 얼마라고 해야 하나. 으아앗! 잠깐만요. 물어봤으면 대답을 듣고 가야죠!”
“물어봐달라고 해서 물어봐줬으면 된 거 아닙니까. 그럼 전 이만.”
형진은 그 말을 남기고 가차 없이 문을 닫아걸었다.
“자, 잠깐만요! 내 말 좀 들어보라고요!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나 그런 여자 아니거든요?”
그런 여자 아니긴. 그럼 어떤 여잔데. 그리고 아닌데 어쩌라고.
여자는 잠시 그렇게 외치며 문을 두드렸지만, 이내 투덜거리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뭐 나름 사정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지금은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니다. 쌓이고 쌓여서 풀 방법이 없어 미칠 것 같은 상황이라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이상 오늘 밤은 그저 조용히 잠들고 싶을 뿐이다.
잠을 살짝 설쳤다. 입맛이 없어서 인벤토리에 넣어둔 샌드위치를 하나 먹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더 가라앉는다. 대충 씻고 밖으로 나가니 아침 일찍부터 출발 준비에 여념이 없는 마부들이 형진을 반긴다.
“하하, 잘 쉬셨습니까? 오늘은 날씨가 괜찮은 것 같으니 팍팍 달려볼 생각입니다.”
“…”
팍팍 달리다가 또 고장이라도 나면 곤란한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마차에 오르자, 역시나 옆자리의 여자가 화난 표정으로 형진을 맞이한다.
“어쩜 사람이 그렇게 매몰찰 수가 있어요?”
“물어봐 달라고 해서 물어봐줬으면 된 것 아닙니까. 대답까지 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
맞은 편에 앉은 죄수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형진과 여자를 바라봤지만, 또 전기안마질을 당할까 두려운지 다소곳하게 다리를 오므린 상태다. 훌륭해. 그런 다소곳한 자세라면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 죄수들이 예쁜이가 왔다고 기뻐하며 반겨줄 거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가 생겼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장대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날씨가 좋기는 개뿔이.
그나마 다행인건 형진의 자리가 가운데라는 점이다. 옆자리의 남자와 여자는 비가 들이치고 스며들자 그것을 피하려고 난리가 났지만, 형진은 조금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도 이따금 정수리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좀 신경 쓰일 뿐 앉아서 가는 일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이 정도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과연 길이 온전할까 하는 점.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다시금 마차가 멈춰 선다.
“죄송하지만 남자분들은 좀 나와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뭔 일인가 하고 나가보니 길 한복판에 바위 덩어리 하나가 굴러 내려와 있었다. 사람이라면 그냥 대충 피해서 가면 될 일이지만, 이래서야 마차는 절대로 통과하기 어렵다.
혹시 산적 같은 놈들이 일부러 길을 막아놓은 건 아닌가 하고 얼른 주위를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이 세계는 좀 많이 평화로운가보다.
다가가서 보니 생각보다 바위가 좀 많이 크다. 비까지 억수같이 쏟아지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남자들 몇이서 밀어가지고는 언제 치울 수 있을까 난감할 정도다.
결국 형진은 또다시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비켜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