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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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풍문
띵.
순간 형진은 머릿속에서 전자렌지 타이머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따로 설명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현재 여신이 처한 상황이 단박에 이해되어 버린 것이다.
본래 보호와 균형은 그나마 있는 힘을 토끼들에게 몰아주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신들의 존재감에 매몰되어 그대로 잊혀져 버렸다.
그러던 중에 형진이 미스틱 링을 찾아내 그 힘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과거 보호와 균형이 토끼들에게 힘을 넣어주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신물이었다. 그렇게 신물이 깨어나자, 여신은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그를 찾아왔고 계약을 맺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형진을 찾아오는 여정이 꽤 힘들었으리라는 점을 제외하면, 이후로 여신은 정말 꿈에서나 떠올렸을 법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문자 그대로 한창 꽃길을 걷는 중이다. 수많은 신도들과 신상을 통해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성물의 관리자로 카트린을 맞이했으며, 최근에는 마침내 정식으로 추종자를 받아들이기까지 한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져 있던 그녀의 처지를 알던 자라면, 여신에게 일어난 일은 이를테면 신데렐라 같은 얘기로 미화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아직 결말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중간 과정만 놓고 보더라도 다른 잊혀진 신들에게 부러움을 사고도 남을 일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전에 알고 지냈던 잊혀진 신들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에게도 그와 같은 비법을 알려달라고 추궁을 받았을 것이다.
“걱정 마세요. 아직 다른 이들에게 진님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어요. 저 때문에 진님이 번거로워지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
분명 이 호구스러운 여신이라면 유도 심문 몇 번에 홀라당 넘어가서 다 털어놓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특하게도 입을 꼭 봉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빚쟁이에게 내몰린 최고 사제 같았다는 유아의 추측은 빗나간 셈인가. 추궁을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틀림이 없으니 완전히 빗나간 것만은 아닌지도.
“얼마나 됩니까?”
“네? 뭐가요?”
“잊혀진 신들 말입니다.”
“아… 꽤 많아요. 제 일을 알아차린 신들이라면 아직 서넛 정도에 불과하지만요.”
“아하.”
서넛이라. 그 정도면 딱히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이건 프렌차이즈나 다름없다. 잊혀진 신이라는 컨텐츠를 발굴해 기존의 시스템을 통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수익을 올리고 그 수익에 빨대를 꽂는 그런 프렌차이즈. 이를테면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이들의 퇴직금을 노리는 치킨집 프렌차이즈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고나 할까.
특히나 이 경우에는 이미 보호와 균형이라는 훌륭한 선례마저 있다. 이미 한 번 갔던 길이니 시행착오도 그만큼 적을 수밖에 없고, 보다 효율적인 런칭이 가능하다는 점 외에도 보호와 균형 때보다도 훨씬 압도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계약을 맺을 수도 있다. 이미 눈에 보이는 실적이 있다는 건 이런 협상에서 훨씬 강력한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보통의 사람들도 아니고 신들과 거래를 트는 일이기에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이미 공포와 죽음께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 놓으신 상태다. 조정자가 되면서 형진은 오직 공포와 죽음에게만 벌을 받을 수 있다고 정해졌다. 물론 형진이 아닌 다른 식구들에게 폐를 끼칠 위험이 있으니 막 나갈 수는 없는 일이라 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되어 있는 셈이랄까.
잠시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형진은,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려도 딱히 공포와 죽음께서 딴죽을 걸거나 하지 않는 것을 암묵적인 허락으로 이해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불러 오십시오.”
“네?”
“물론 잊혀진 신들을 전부 불러오라는 건 아닙니다. 여신님을 귀찮게 하는 신들, 서넛 정도라고 했죠? 그 신들을 이곳에 불러들이십시오.”
여신은 깜짝 놀랐다.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아, 이곳에 온다고 제가 그분들의 일을 다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
“면접을 봐야죠. 회생 가능성이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식으로 일을 진행해야 할지. 이런 건 직접 만나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면접이라니. 스스로가 말해놓고도 뭔가 웃긴다. 인간이 신을 데려다 놓고 회생 가능성을 확인하고 회생 절차를 의논하다니. 무슨 개인 회생 절차를 밟는 것도 아니고. 아니. 인간이 아니라 신이니까 개인회생이 아니라 개신회생이라고 해야 하나. 크흠. 뭔가 어감이 이상하니 그냥 개인회생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생각해 보니 뭔가 좀 아닌 것 같다. 개인 회생은 이미 빚을 지고 있다는 전제하의 얘기니까. 적어도 이 신들은 빚을 질 능력조차 없는 무직자 백수 쪽에 더 가깝다.
“그건 그렇게 하고. 그럼 언제쯤 이곳에 올 수 있겠습니까.”
“음… 사나흘은 걸릴 거에요.”
설마 그 신들도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 와야 하는 건가. 뭔가 좀 깨긴 하지만 아무 힘도 없었을 때의 보호와 균형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쩐지 눈앞의 여신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른다. 그땐 정말 영락없이 물에 빠져 죽은 요정의 변사체라도 발견한 건줄 알았다. 물에 젖은 빨간 치마가 훌렁 뒤집혀서 바닥에 펼쳐져 있고, 호박 팬티를 입은 작은 다리가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형진은 말미잘을 연상했었다. 여신도 그 충격적이었던 첫 만남이 다시 떠올랐는지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크흠. 알겠습니다. 그럼 도착하는 대로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할 게요.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드려요.”
“별 말씀을요. 저는 이미 여신님의 대리자이기도 합니다. 여신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것 정도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정말 감사드려요. 진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질 정도인 걸요.”
“그렇습니까. 하하.”
어쨌든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대담을 마친 그들은 다시 엘리시온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럼 다녀 오십시오.”
“네. 오귀스트님도 수고하십시오. 유아도.”
“네.”
오귀스트와 하마란은 가스트샵의 신입 사원들 교육 때문에 오늘은 엘리시온에 가지 않기로 했고, 유아도 회합장에서의 일이 있어서 오늘은 빠지기로 했다. 때문에 오늘 엘리시온에 동행하는 이들은 크루그와 카트린, 그리고 할 정도다.
그들을 데리고 대미궁의 접속 대기실에 도착한 형진은 곧바로 엘리시온으로의 접속을 실행했다.
“할, 그럼 부탁한다.”
“하하. 맡겨 두십시오.”
길드 하우스에 도착한 형진은 할에게 크루그와 카트린의 호위를 맡겼다. 오늘부터 형진은 희귀급 아이템 일만 개 수집을 위한 노가다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빠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미안. 나도 그러고 싶지만 공포와 죽음께서 맡기신 일이 있어서.”
“그런가요.”
카트린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더 조르지 않았다. 형진은 그런 카트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여신과 함께 사교도 인던으로 향했다.
“자, 그럼 우리도 가볼까요?”
“네!”
크루그는 카트린이 이런 식으로 바깥에 나서는 것이 별로 마땅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제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카트린은 이런 식으로 바깥 나들이를 한 적 자체가 거의 없었다. 망명 중인 엘 파르드의 공주라는 위치 때문에라도 함부로 바깥을 나돌아 다니는 것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적어도 엘 파르드라는 이름 때문에 이곳에서 곤란한 일을 당할 위험은 없는 것이다.
어렸을 때라면 몰라도 이제는 카트린도 그런 사정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엘 파르드라는 이름에 구애받지 않고 바깥을 나돌아 다닐 수 있는 상황이 너무나 즐거울 수밖에 없다.
길드 하우스를 나온 그들은 곧바로 시내의 번화가로 향했다. 길드 하우스가 위치한 한적한 외곽과는 달리, 도심 지역은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게임 속의 설정이긴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수도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우와아아아…”
마차 여덟 대가 동시에 오가도 될 것 같은 넓은 길. 그리고 그 주변에 자리한 수많은 건물들. 그리고 그 안을 하나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인파.
아직 제대로 구경을 시작하기 전이었지만,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카트린은 문자 그대로 압도되어 버리고 말았다.
“라야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
“그러네.”
사실 이렇게 한 나라의 수도를 구경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토너먼트 때문에 라야바르트 왕국의 수도인 라야를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때 보았던 것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오빠. 저게 뭐야?”
“흠… 글쎄. 잘 모르겠는걸.”
카트린이 가리킨 곳에서는 피에로 복장을 한 사람이 풍선을 나누어 주며 무언가를 홍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루그도 처음 보는 광경이긴 마찬가지. 그래서 느긋하게 남매를 호위하던 할이 빙긋 웃으며 대신 답해주었다.
“연극 공연을 홍보하고 있는 겁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극장인데, 그 안에서 하는 모양이더군요.”
“연극이요?”
카트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저쪽 세계에도 물론 연극은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기가 어려웠던 관계로 카트린은 아직까지 그것을 직접 본 일이 없었다.
“볼래?”
크루그의 물음에 카트린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래!”
“그럼 가보자.”
“응!”
그렇게 세 사람이 극장 쪽으로 다가가자 홍보중이던 피에로가 카트린에게 풍선 하나를 건네며 말을 건다.
“귀여운 꼬마 공주님. 제 선물을 받아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카트린의 모습에 피에로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고, 덤으로 작은 솜사탕까지 건네주었다.
하지만 크루그는 순간 자신들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느끼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낌새를 알아챈 할이 피식 웃는다.
“어제도 몇몇이 저렇게 따라 붙더군.”
“그런가요.”
“아무래도 어제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과 관계된 자들이 아닐까 싶은데, 딱히 적의는 없는 것 같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어.”
“…”
크루그는 대답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물론 이제는 카트린도 그냥 평범한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성물의 관리자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고, 이 직책은 필요할 경우 자신이 있는 곳에 언제든지 성물을 소환해 그 부근을 성역으로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즉,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닌 존재라도 그녀가 성물을 불러내는 순간 때리지도 못하고 무조건 두들겨 맞아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얘기다. 최소한 그녀가 불러낸 성물의 힘이나, 그 성물에 힘을 불어넣은 여신을 넘어설 정도의 위세를 지닌 자가 아닌 이상은.
“틀림없지?”
“맞아. 그 ‘골렘’이야.”
이미 들켰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곧바로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골렘은 이전의 싸움에서 불사신 길드를 혼자서 헤집고 다녔던 할의 모습을 보고 유저들이 붙인 별명이다.
“그래? 영화를 보러 갔다고?”
하지만 할의 예상과는 달리 세 사람을 감시하고 있던 것은 불사신 길드도, 그들의 라이벌이었던 바이러스나 별바람 길드 소속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끼리 치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르긴 해도 일주일의 유예기간이 끝나기 전에 기존의 3강 체제는 바이러스와 별바람의 양강 체제로 굳어질 것이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전력을 따로 빼내 길드성을 감시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들을 감시하고 있던 것은 누구란 말인가. 그 감시자들이 연락을 취한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이들은 바로 지금까지 3강으로 대표되던 육식 길드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일어선 초식 연합의 수뇌부들이었다.
어제 벌어졌던, 불사신 길드와 타나토노트10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길드 간에 벌어졌던 거점전은 여러모로 전설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고작 네 명의 유저가 이제까지 3강의 한 축이라고 일컬어지던 불사신 길드를 완전히 가지고 놀다가 항복까지 받아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이 일은 바로 유저들 사이에서 커다란 이슈가 되었지만, 그런 유저들 중에서도 한 부류들이 특히 더 크게 반응했다. 지금까지 육식 길드들의 횡포에 억눌려 지내던 초식 길드에 속한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이들이 느닷없이 나타나 3강의 한축을 박살내버렸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이 믿기 어려운 소식을 접한 순간, 그들은 불사신 길드가 그런 식으로 능욕 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커다란 희열을 느꼈고, 이내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달았다.
아직 타나토노트10이 육식인지 초식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들을 초식 연합으로 끌어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육식길드들이 지금처럼 미친 듯이 날뛰지는 못할 것이다.
“더도 말고 망할 육식 놈들이 우리를 건드리지만 않게 되면 그걸로 충분한데.”
“하지만 저들이 과연 이쪽으로 넘어오려고 할까?”
“그건…”
하지만 희망은 희망이고, 실제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저들은 그럴 마음만 있다면 기존의 육식 길드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일을 더 광범위하게 벌일 수 있을 테니까. 불사신 길드마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진 지금 상황에서 과연 저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가 있기는 할까.
“글쎄. 확신하긴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저런 힘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에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
밑져야 본전. 어차피 가만히 있어봐야 달라질 것은 없다. 초식 연합의 수뇌부들은 모두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