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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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풍문
아름이 그렇게 다시 한 번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 때, 형진은 식구들을 데리고 다시 섬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거점전을 한 번 치른 이상 일주일간은 다시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할 일도 없고, 형진이 로그아웃을 하더라도 문양에 넣어서 담아간 토끼들은 아무런 지장 없이 길드 하우스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거점전이다 뭐다 해서 조금 늦게 돌아온 탓에 식사는 림을 비롯한 요정들이 먼저 차려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미리 차려진 식사를 먹으며 형진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하자, 옆에 앉아서 고기를 썰어주던 제랄딘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왜요? 뭔가 고민이라도 있어요?”
“음… 그게.”
이전의 업데이트를 통해 여러 명이 한꺼번에 접속할 수 있게 되기는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다른 이가 접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진이 함께 접속해야만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만약 형진에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겨서 접속을 종료하거나 하는 상황이 생기면, 다른 이들은 뭘 하고 있었건 간에 바로 로그 아웃이 되어 버린다.
물론 이것은 엘리시온으로의 접속을 관리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누군가가 접속할 때 항상 형진이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함께 해야만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번거로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가만히 떠올리고 있자, 문득 누군가에게서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온다.
[방법이 있다.] “네? 그게 뭐죠?”식사를 하던 이들은 갑작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 떠드는 형진의 모습에 조금 놀란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그것이 공포와 죽음께 건네는 말임을 깨닫고는 못들은 척 식사를 계속한다.
[간단해. 코어의 능력을 확장시키면 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1만개. 종속된 서브 코어의 수를 그만큼 늘려라.] “…”
형진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1만개라니. 요즘 아무래도 숫자 개념이 이상해질 것 만 같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만 해도 은화를 벌면 대박 났다고 좋아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뭐만 하면 기본이 만 단위다.
코어가 1만개 필요하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 희귀급 아이템과 인간의 사념체 1만개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것만 듣고도 그냥 넋이 나가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형진은 조금 사정이 다르다. 인스턴트 킬이 있기 때문이다.
희귀급 아이템 1만개라고 해봐야 사교도 인던 같은 곳을 좀 열심히 돌면 된다. 물론 이것도 만만치 않은 노가다긴 하지만, 진짜 문제는 바로 사념체 1만개다. 이걸 바꿔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1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 1만명이 누구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끙…”
물론 집행자가 된 이후로 필요한 경우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 자체는 큰 부담이 되지 않게끔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만 단위가 되어버리면 이건 자칫 형진의 인격 자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가 되어 버린다. 아무리 공포와 죽음의 낙인이 정신을 보호해 준다고는 하지만, 일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도륙하고도 정신이 멀쩡할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설마, 저보고 전쟁이라도 일으키라는 말씀이십니까?
형진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말에 공포와 죽음이 답했다.
[아니.]당연한 일이다. 비록 공포와 죽음을 관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징벌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무차별적인 학살은 용인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공포와 죽음이 다시 답했다.
[사교도의 사악한 기운.] “아!”형진은 그제서야 인벤토리에 담겨져 있던 아이템을 꺼내 놓았다.
공포와 죽음이 언급한 그 아이템은 바로 사교도 인던의 중간 보스급 이상의 몹에게서 나오는 일종의 인챈트 아이템이다. 딱 봐도 사람을 인스턴트 킬로 죽였을 때 나오는 사념체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인챈트 되는 효과 자체가 터무니없이 저조한 수준이라 사실상 인챈트보다는 상점에 바로 팔아버리는 잡템 취급을 받고 있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과연. 그런 것인가.”
게임 안의 보스급들은 지능이랄 것도 없이 단순한 패턴으로 움직이는 일반적인 몹들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전용의 대사도 있고, 미약하기는 하지만 지능이라고 불리울 만한 것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매번 같은 보스를 잡아도 다른 반응이 나오고 그만큼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 봤던 이벤트 보스는 이런 식의 지능은커녕 일반 몹처럼 정해진 패턴만 반복했었다. 그래서일까. 그때는 이런 식의 인챈트 아이템이 나오지 않았다. 두뇌 역할을 할 사념체가 없는 그저 빈껍데기 보스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엘리시온이 기존에 나왔던 다른 게임과 확실하게 구분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었다. 단순히 보스만이 아니라, NPC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사념체가 적용되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존의 게임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이 될 테니까.
그러고 보면 이전에 생활러로 활동할 당시 NPC들의 응대에 놀랐던 경험이 꽤 있었던 것 같다. 단순히 프로그래밍된 반응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응대 때문에 GM 같은 이들이 NPC를 연기하고 있다는 식의 추측도 꽤 많았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런 옛 기억마저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다시 공포와 죽음께서 한 마디를 더 던지신다.
[그걸 쓴다면 열 배는 더 필요해.] “아하.”공포와 죽음께서 다시 덧붙인 말은 이런 뜻이다. 지금 형진의 손에 쥐어진 사념체는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사념체보다 미약한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열 개는 모여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1만 개의 코어를 제작하기 위해 필요한 사악한 기운의 수는 무려 십만 개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십 만개라.
물론 필요한 개수가 열 배로 늘었으니 그만큼 부담이 늘어났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이것은 오히려 희귀급 아이템 일만 개를 모으는 것보다 더 쉬울 수도 있다.
어째서일까.
간단하다. 굳이 형진이 스스로 그것을 다 모으려고 할 필요 없이, 기존에 상점으로 직행했던 것들을 사들이면 되기 때문이다. 상점에 판매되는 가격보다 10퍼센트 정도 가격을 올려서 구매 등록을 해두고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모일 테니, 돈은 좀 들더라도 일일이 인스턴트 킬로 몹들을 때려잡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중간에 누군가 사념체들을 사들인다는 것을 깨닫고 역으로 사재기를 시도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다른 이들로서는 이런 용도를 알아챌 방법도 활용할 방법도 없으니 결국은 의미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만약 1만 개의 코어를 모아 시스템을 완성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단순히 다른 인원들의 로그인 제한을 푸는 것만으로 끝인 건가.
[그건 나중의 즐거움으로 남겨두도록 하지.]쳇. 좀 알려주면 어디가 어때서.
형진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새로운 목표를 머리 속에 기억해 두었다.
희귀급 아이템 일만 개라. 확실히 난감한 일이긴 하지만, 사교도 인던을 한 번만 돌아도 거의 백 개 가까운 희귀급 아이템을 얻을 수 있으니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간단하게 몸을 씻고 침대에 눕자, 제랄딘이 조용히 다가와 품에 안긴다.
“일은 어때?”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제랄딘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익숙해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며칠 정도만 지나면 저도 그 거짓된 천국이라는 곳에 가볼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그래? 그거 다행이군.”
혼자만 남겨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이다. 그렇게 가만히 제랄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자니, 카트린과 함께 목욕을 하고 돌아온 유아가 얼른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침대로 뛰어든다.
“있잖아요.”
“왜?”
“여신님이 좀 이상한 거 같아요.”
“그래?”
보나마나 새로 얻은 추종자들과 수다 떠느라 그런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어진 유아의 말은 형진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종류의 것이었다.
“그게… 음, 실은 여신님이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뭐?”
협박이라니? 다른 이도 아니고 여신을?
물론 그 여신이라면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겠다 싶긴 하다. 실제로도 형진이 계약서를 통해 밑밥을 깔아놓고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도록 열심히 부채질을 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형진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비슷한 일을 당한 것이라면 이건 의외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자칫하면 여신에게 꽂아둔 빨대가 생판 모르는 자들에 의해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확실해?”
형진의 말에 유아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틀림없어요. 여신님 표정이 꼭 예전에 빚쟁이에게 독촉 당하던 최고 사제님이랑 똑같았거든요.”
“…”
이걸 웃어야 하는 건지, 과연 그렇구나 하고 납득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유아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얻은 판단이라면 한번 믿어볼 필요가 있을지도.
하기야 이런 면에 있어서는 여자의 직감이 더 우월할 수도 있다. 뭔가를 숨기는 것 자체가 별로 능숙하지 않은 여신이긴 하지만, 정말로 중대한 문제라면 형진에게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내일 한번 모셔놓고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지.”
“네. 부탁드려요. 우리 착한 여신님, 상처 입지 않으시도록.”
“알았어.”
호구끼리 동병상련이라도 느끼는 건가. 형진은 속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리며 혹시 공포와 죽음께서 뭔가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는 잘도 한 마디씩 툭툭 던지더니 어쩐 일로 지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부부와의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라고 잠시 시선을 거둬주신 건가. 에이, 설마. 이전까지 다 봐놓고 이제 와서 무슨.
어쨌든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형진은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여신의 집을 찾아갔다.
“계십니까?”
“네? 네! 있어요! 들어오세요!”
갑작스런 형진의 방문에 놀랐는지 뭔가 허둥대는 느낌 가득한 대답이 돌아온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용의 옥좌 위에 자리 잡은 여신의 모습이 보인다.
“무슨 일이시죠? 그렇지 않아도 거짓된 천국으로 갈 준비를 하던 참인데.”
“실은… 여신께서 걱정이 있으신 듯 하여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여신은 이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걸… 어떻게…”
“어젯밤 유아가 잠들기 전에 저에게 부탁하더군요. 여신께서 걱정이 있으신 것 같으니, 어떻게 해줄 수 없느냐고.”
“아…”
여신은 그제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랬군요. 유아님이… 후우…”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게…”
여신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형진이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리자 결국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는지 조심스럽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았다.
“아시다시피, 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종자는커녕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잊혀진 여신이었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진님께서 제 신물을 손에 넣은 것을 알게 되어 만남을 청했고, 진님의 덕분에 신도와 추종자가 생기기도 했구요.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지. 형진은 얼른 본론을 꺼내지 않고 말을 빙빙 돌리는 여신의 모습에 살짝 조급함이 일어나려는 것을 꾹 눌러 참고 좋은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누가 들으면 제가 어디 무료 봉사라도 하는줄 알겠네요.”
“그런가요.”
여신은 형진의 말에 작게 웃었다. 계약이니 뭐니 해도, 어쨌든 지금처럼 신도와 추종자가 생기도록 만들어준 것은 분명 눈앞의 남자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실은…”
여신은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런 제 상황이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갔나 봐요.”
“다른 이들이라면?”
형진의 말에 여신은 탄식을 섞어 이렇게 답했다.
“저처럼, 사람들에게 잊혀져 버린 신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