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10
310====================
65. 면접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어떻게 접촉을 시도해 보느냐인데.”
“…”
순간 연합의 수뇌부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전부 한꺼번에 몰려가면 바로 눈에 띄일 테고, 괜히 총대 매고 앞에 나섰다가 말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불사신과 같은 꼴이 날 수도 있고. 문자 그대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같은 상황이 되어 버린 셈이다.
혹시 간이 부은 누가 먼저 나서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 봤지만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 그러자 결국 참다 못한 사람이 하나 앞으로 나서서 제안을 한다.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말입니까.”
“주사위. 단판 승부.”
“…”
이곳에 할이 있었다면 대번에 벼락이 떨어졌을 법한 제안이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를 보러 들어간 셋이 그 자리에서 로그 아웃이라도 하는 날에는 방울이고 뭐고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니까.
“할 수 없군요. 전 찬성입니다.”
“저도.”
“저도 찬성입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참석자들이 찬성을 표하자 바로 주사위 굴리기를 시도한다.
방식은 간단하다. 주사위 두 개를 굴려 가장 낮은 수가 나오는 사람이 지금 길드 하우스 밖으로 나온 인원들과 접촉한다. 친분을 쌓든 뭘 하든 간에, 그들을 초식 연합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목표. 아니 동맹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최소한 적으로만 돌리지 않아도 다행이지만,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회의 석상에서 꺼내는 건 너무 비굴한 일이라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휴우…”
“헉.”
“하으…”
곧바로 주사위가 굴러가며 탄성과 신음 소리가 교차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두컴컴한 회의실에 그렇게 탄성과 신음 소리만 교차하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잘못 들으면 오해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주사위가 굴러간다.
덱데구르르…
단단학 흑단 탁자 위에 주사위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으샤!”
“휴우우우…”
“사, 살았다.”
이내 몇몇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지금까지 동률 최하위를 달리고 있던 몇 사람이 꼴찌로부터 벗어나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자, 잠깐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마지막에 주사위를 굴렸던 사람이 당황해서 그렇게 말했지만, 회의 참석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엄숙하고 진중하게 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낙장불입. 단판 승부라고 했을 텐데요.”
“으으으…”
결국 그렇게 방울을 달러 갈 인물이 정해졌다. 그 사람은 바로 요리사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한입만’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한스푼’이었다.
물론 한스푼은 캐릭명일 뿐이고, 실제 이름은 한수빈이다. 전문 요리사까지는 아니고, 그냥 요리를 즐기고, 가끔 잘 된 요리는 SNS에 사진 찍어서 올리는 정도의 그런 요리 애호가에 가깝다.
초식 연합에서도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 하도 털려서 이제는 길드 하우스조차 포기해버린 그런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길드의 길마인데, 운도 없이 이런 막중한 임무에 뽑히고 말았다.
수빈은 정말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렸지만 이럴 때만 매의 눈을 시전 하는 다른 길마들의 시선에 쫓겨 결국 회의장을 도망치듯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에휴…”
일이 잘못 되기라도 하면 근근히 버티고 있는 길드마저 와해되어 버릴 것이란 생각에 수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이슬라로 가기 위해 워프 포인트로 향했다.
“와아아아아…”
“…”
“허어…”
그즈음. 크루그와 카트린, 그리고 할은 눈앞에 펼쳐진 영상에 압도되어 계속해서 탄성을 연발하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영락없이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서 관람하게 된 것은 연극이 아니었다. 저쪽 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문화인 영화가 그곳에서 상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엘리시온 안에 여러 가지 미디어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게임이 지닌 압도적인 현실감은, 그 자체만으로도 미디어를 통합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영화. 그 자체로 완벽한 가상현실을 제공하는 이 게임 안에서라면, 실제로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영화 배급사는 새로운 관객 수요를 창출할 수 있으니 좋고, 엘리시온 쪽에서는 또 다른 현실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으니 좋고, 유저의 입장에서는 홈시어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멋진 환경에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으니 좋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다.
한편, 저쪽 세계에서는 연극 같은 것도 쉽게 접하기 힘들다. 고급 극장에서 상연하는, 문자 그대로 고급 연극은 어지간한 부와 명예를 지닌 이가 아니라면 접근하기 힘들고, 그나마 거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유랑 극단 같은 것도 때를 맞추지 못하면 볼 수가 없다. 보통 사람들도 그러한데, 어릴 적에 모진 일을 겪고 다른 나라에서 망명과 은둔을 거듭하고 있던 크루그와 카트린 남매야 오죽하겠는가.
이들이 보자마자 극장으로 바로 들어온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웬 걸.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입체 영상이었다.
산과 들을 달리고, 바람과 눈이 몰아치며, 비와 번개가 내리꽂히는 그 모든 광경이 생생하게 두 눈에 들어와 박힌다. 사람의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는 물론이고 때론 장엄하고 때론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쉴 새 없이 귀로 전해진다. 그들은 이 순간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상식이 단숨에 파괴되어 버리는 일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후아아아아…”
“휴우…”
“허허… 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꼼짝없이 두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크루그와 카트린, 그리고 할은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자막이 올라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큰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 일단… 나가자.”
“응.”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와서도 잠시 다른 곳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방금 전에 보고 들었던 그 모든 것들의 여운이 계속해서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느낀 문화적 충격은 그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오빠.”
“응?”
“다른 것도 보고 싶어.”
“…”
카트린의 말에 크루그는 할을 바라보았고, 그 역시 찬성한다는 듯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일단 하나만 더 보고 밥 먹으러 가자. 알았지?”
“응!”
그들은 곧바로 다시 매표소로 향했다. 이곳은 일반적인 금화가 아닌 캐시, 그러니까 이들의 입장에서는 공헌도를 요구했지만, 할은 물론이고 크루그도 집행자로서 일한 기간이 꽤 되는지라 표 값 정도는 아무 부담 없이 지불할 수 있었다.
“쟤들이 맞아요?”
“네. 틀림없습니다. 저기 저 덩치 보이시죠? 저 사람이 바로 골렘입니다. 불사신 길드를 혼자서 가지고 논 장본인이죠.”
“아하.”
크루그나 카트린은 거점전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지만, 할의 외모는 착각할래야 착각할 수가 없다. 수빈은 감시 중이던 초식 연합의 인원에게 설명을 듣고는 얼른 매표소에서 줄을 서있는 그들의 뒤에 따라 붙었다.
“다음 영화는… 저게 좋겠어.”
“아냐. 그것보다는 저쪽의 예쁜 그림이 걸려있는 쪽이 좋아.”
“크흠. 내 생각엔 저쪽의 불꽃이 터져 나오는 모습의 그림 쪽이…”
그때, 크루그와 카트린, 그리고 할은 서로 다른 영화를 보겠다며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영화 포스터에 적혀 있는 글자는 전혀 읽지 못한다. 그저 포스터에 찍힌 그림을 통해 내용을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수빈은 조용히 그들의 뒤에 다가선 채 그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엿들었다. 어쩐지 억양이 조금 어색한 느낌. 혹시 외국인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엿듣고 있는데, 문득 크루그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쳇.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으니 곤란하네. 형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역시! 그 말을 듣는 순간 수빈은 머리 속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거다. 이거라면 자연스럽게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외국에서 오신 건가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건다고 하긴 했는데, 어쩐지 입꼬리가 자꾸만 떨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기학원이라도 다녀둘 걸.
크루그는 대번에 뭐야 이 여자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뭔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천진난만한 카트린이 먼저 대답했다.
“네! 좀 멀리서 왔어요.”
“아하. 그렇군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영화 포스터 정도는 읽어드릴 수 있는데.”
“정말요? 와아! 감사합니다!”
해맑은 카트린의 대답에 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옆에 선 소년의 차가운 시선에 흠칫하며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무슨 눈빛이 이렇게…
수빈은 갑자기 온 몸을 죄어오는 듯한 기이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는 이 작은 소년과 소녀보다는 그들을 지키고 있는 듯한 인상의 할을 더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진짜로 위험한 건 할이 아니라 바로 이 소년이었다. 지금 이 순간 크루그가 은연중에 쏟아낸 살기에 직면하자 수빈은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쏟아져 내려가는 듯한 공포를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수빈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이자, 그녀의 이상을 눈치챈 카트린이 얼른 균형의 권능을 써서 그녀를 안정시키며 크루그에게 말했다.
“오빠. 그만해.”
“하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차근차근 물으면 되잖아. 다짜고짜 그렇게 몰아붙이면 어떻게 해.”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채 카트린이 그렇게 말하자, 크루그는 그제서야 살기를 거두어 들였다.
“헉… 헉…”
뭐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난생 처음, 강렬한 살기에 직접 노출된 수빈은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몸은 어느 새인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주 잠깐 크루그의 살기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그런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죄송해요. 저희 오빠가 낯선 사람에게는 좀 민감한 구석이 있어서…”
“아, 아뇨. 괜찮아요.”
다시 한 번 카트린이 균형의 권능을 사용하자, 그제서야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크루그는 물론이고 할 역시도 경계심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카트린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을 따라붙는 감시자들의 정체를 처음부터 알아차리고 있었고, 그들과 수빈이 접촉하는 것 역시 알아채고 있었다.
수빈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숨겨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이라는 남자는 그렇다 쳐도, 이 소년 역시 그 길드의 일원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카트린에 의해 수빈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크루그는 여전히 냉막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글자를 읽어 줄 수 있다고 했나?”
“네? 네. 물론이에요.”
“그럼 저것부터 읽어봐.”
“…”
무슨 꿍꿍이일까. 곧바로 배후부터 다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이 소녀 때문인가.
“저 포스터에는…”
“포스터? 그게 뭐지?”
“그러니까… 저기 붙어 있는 그림들을 포스터라고 불러요. 무언가를 알리거나 할 목적으로 붙이는 그림들 말이에요.”
“그렇군.”
수빈은 어느새 가이드가 되어 있었다. 영화 포스터의 내용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영화는 어떻고 저 영화는 어떻고. 안에 들어가서는 관람 도중에 궁금한 내용에 대한 설명까지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오빠. 나 배고파.”
“그럼 이만 돌아갈까.”
“응!”
카트린에게 가만히 미소를 지어보이던 크루그는 다시 수빈을 돌아보며 말했다.
“할 얘기가 있는 거겠지?”
“네? 그게…”
“아닌가?”
“아, 아뇨! 있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럼 따라와.”
방금 전 동생을 볼 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아무리 봐도 저 모습은 그냥 커스터마이징일 뿐이고, 실제로는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매서운 눈매와 존재감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물론 완전히 헛다리 짚은 거지만.
수빈은 마치 시녀처럼 크루그와 카트린에게서 몇 발자국이나 떨어진 채로 조심조심 그들을 따라 걸었다. 혹시나 그림자라도 밟을까 싶은 느낌으로 그렇게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수빈은 어느 새인가 소문 자자한 길드성의 입구에 도착한 자신을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