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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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눈덩이
수빈은 마침내 눈앞으로 다가온 꽃과 바람의 모습에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작고 가는 팔다리, 꽃잎처럼 나풀거리는 얇은 드레스. 그리고 타래지어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 멈칫해 버린다. 손에 닿으면 사라져 버리는 눈송이처럼,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선 여신이라는 존재도 그렇게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머뭇거리는 수빈의 모습에 꽃과 바람은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심정이 여과 없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 손을 뻗어 줘요.”
“네…”
마치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빈은 꽃과 바람의 말에 따라 손을 뻗었다. 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여신은 마주 손을 뻗어 그녀의 손가락을 감싸 쥐더니 가만히 거기에 볼을 비빈다.
“아…”
단지 손가락이 닿았을 뿐이다. 그것 뿐인데도 불구하고 수빈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충족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어딘지 모르게 비어 있는 것만 같았던, 마음 한 구석이 비로소 채워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나만 더 찾아서 끼워 넣으면 완성되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여태 찾지 못했던 마지막 지그소 퍼즐 조각을 마침내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빈은 비로소 충족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여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서로의 체온을 즐기며 교감하다가, 다시금 여신이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제 추종자가 되어 주시겠어요?”
추종자가 뭔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수빈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타나토노트10이라는 이름의 길드에 가입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이런 식으로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빈의 내면에서 그런 것은 이미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어느새 이것이 자신의 운명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여신과의 교감을 통해, 여태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대답했다.
“네. 되겠어요.”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난다.
[축하합니다! 꽃과 바람의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꽃의 낙인이 부여되었습니다. 이제 꽃과 바람의 권능이 항상 당신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꽃과 바람의 조향사가 되었습니다.
아직 형진이 무언가를 손대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막상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아직 미약하기 짝이 없는 여신의 권능을 약간 빌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이거 참.”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여신이 스스로 추종자를 만들어 버리자 형진은 난처한 표정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보호와 균형처럼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지 않고는 추종자나 신도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추종자를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신이라면, 그들 사이에 맺은 계약 자체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신의 생각은 달랐다.
무사히 추종자의 낙인이 수빈에게 새겨지자, 꽃과 바람은 눈물마저 글썽이며 얼른 형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님 덕분에 이 분을 만날 수 있었어요.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가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여신의 반응을 보고서야 형진은 이것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이해했다. 하기야 이렇게 간단하게 추종자를 만들 수 있는 여신이라면 조난까지 당해가면서 힘들게 바다를 건너 자신을 찾아오거나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방금 전에 벌어진 상황은 충분히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신이 이토록 감격해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본래는 서로의 세계가 달라 만날 수 없었던 인연이, 이렇게 형진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어지게 된 것이니 여신으로서도 충분히 감격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것이 아주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처음으로 맞이하는 추종자라면 그 감격스러움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리라.
어쨌든 그렇게 당사자에게도 보는 이로서도 조금은 급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의식이 끝나고 나서야 수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기… 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십시오.”
“추종자가 뭐죠? 이 낙인이란 건요? 꽃과 바람의 권능이란 건 뭐고, 조향사라는 건 또 뭔가요?”
일단 받아들이긴 했지만, 수빈으로서는 모든 것이 그저 생소할 따름이다. 아직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들에 대한 것을 알아가기도 전에 일단 추종자부터 되어 버린 식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지도.
형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원래는 천천히 알아가도록 할 셈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진행되는 바람에 많이 당황스러우셨을 겁니다. 부족하나마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추종자라는 것은 말 그대로 따르는 자입니다. 이 경우에는 특정한 신을 따르며 그 의지를 세상에 퍼뜨리는 자를 뜻한다고 해야겠죠. 지구 쪽에서 굳이 비슷한 표현을 빌자면 사도 정도가 적당할 것 같군요.”
“사도…”
지금껏 딱히 종교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는 수빈으로서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할 뿐이다. 게다가 이것이 단순히 게임 안에서만 통용되는 그런 개념이 아님을 그녀는 이미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아름과 새름 자매가 겪었던 당혹스러움을 피할 수 있으니 다행이랄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중간 과정을 다 접어둔 채 일단 결론부터 지어진 상황이니 오히려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꽃과 바람의 권능이란 건 사실 저도 뭔지 잘 모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여신께 직접 물으시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추종자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던 보호와 균형과는 달리, 꽃과 바람은 과거 추종자를 가져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형진이 아직 추종자나 다른 여러 가지 사항에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향사라는 이름까지 알아서 붙어 버렸다.
형진의 말에 꽃과 바람은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자신의 첫 번째 추종자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제 힘은 크게 두 가지에요. 꽃의 권능은 사물에 잠재된 향기를 이끌어 내는 힘, 그렇게 이끌어낸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는 힘이죠. 조향사라는 이름은, 향기를 다루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고요.”
여신의 설명에 수빈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혹시 향수를 만드는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건가요?”
지구에도 조향사라는 직업이 있다. 물론 지금 여신이 말한 조향사와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지구의 조향사는 향기를 만드는(調香) 직업이고, 여신의 추종자로서의 조향사는 향기를 다루는(操香) 능력을 가진 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상당히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었다. 여신의 권능을 폄하하는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꽃과 바람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그 말에 답했다.
“원한다면 그것도 가능해요. 사물로부터 잠재된 향기를 이끌어 내어 액체 안에 가두면 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향기란 단순히 후각을 통해 전해지는 그런 향기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에요. 사물에 내재된 본질적인 아름다움, 바로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죠. 이를테면, 지금 수빈님에게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향기처럼.”
“저요?”
수빈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하지만 원래 자기 냄새는 자기가 맡기 어려운 법. 그래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걸까 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문득 옆자리에 앉아서 지금까지 벌어지는 일들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카트린이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치며 외쳤다.
“맞아요!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언니랑 여신님이랑 마주한 순간부터 뭔가 달콤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어요.”
“네?”
달콤한 향기라니. 그게 무슨 소린지.
여전히 뜬구름 잡는 느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제랄딘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트린의 말을 받았다.
“카트린의 말대로네요. 굳이 표현하자면… 살짝 설레이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하루 일을 마치고 지쳐서 침대에 드러누웠는데 햇빛에 말린 보송보송한 장밋빛 시트에서 달짝지근한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요.”
제랄딘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또한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여신의 말대로, 지금 수빈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향기는 그저 후각으로만 느끼고 끝나는 것이 아닌 오감을 자극하는, 굳이 표현하자면 공감각적인 느낌이 강한 향기였기 때문이다. 제랄딘이 굳이 햇빛이나 장밋빛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이유에서다.
“큰일이군요. 앞으로 남성분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형진이 그렇게 덧붙이자 사람들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수빈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향기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간에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유혹하는 향기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아가 손바닥을 마주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이 가지고 있던 매료의 능력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런가?”
정신 보호의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집행자들로서는 조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말. 그러나 그런 형진의 귓가에 문득 짧은 한 마디 말이 전해진다.
[정확히는 호구들 쪽이 짝퉁이지만.]짝퉁이라고요? 호구신의 사제들이 지니고 있던 매료의 능력이?
형진이 그렇게 마음 속으로 되묻자, 공포와 죽음은 친절하게도 이렇게 덧붙여 주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이 왜곡되어 있었던 것은, 그 능력의 근본이 왜곡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과연. 그래서 그랬던 것인가.
따지고 보면 아무리 호구신의 사제니 뭐니 해도 결국은 신의 추종자. 그런 추종자에게 신이 하사한 매료의 능력이 음심을 자극한다는 건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일부러 추종자들을 위험에 내몰리도록 만들고자 하는 변태 같은 신이 있다면 몰라도, 희망과 생명에게 그런 성향이 있다고는 생각하기도 힘들다.
그렇다. 희망과 생명이 이 세계로부터 시선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단순히 호구신이라고 불리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도 몰랐다. 애초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자신이 부여한 능력으로 인해 사제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 상황 자체를 직시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럼… 위험한 거 아닌가요?”
유아의 말을 들은 크루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집행자들로서는 실감하기 어려워도, 만약 지금 수빈에게 부여된 능력이 이전에 호구신의 사제들이 지니고 있던 매료와 비슷하다면 그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 되어 버린다.
“그건…”
꽃과 바람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눈에 띄는 순간 사람들이 미친 듯이 달려든다든가 하는 식의 반응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는 건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간에 무척이나 위험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형진은 급히 꽃과 바람의 대리자로서 부여받은 관리 권한을 살폈다. 다행히 꽃과 바람이 추종자에게 부여해준 권능은 아직 그 효과가 크지 않아고, 또한 스스로의 단련을 통해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권능을 다루는 일을 충분히 단련한다면 적어도 호구신의 사제들처럼 원하지 않아도 매료의 능력을 마구 흩뿌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역시 위험한 건가요?”
뭔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라 수빈이 그렇게 조심스럽게 묻자, 형진은 씩 웃으며 답했다.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당장은 그렇게 효과가 큰 것도 아니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 정도는 얼마든지 전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다만…”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저희들과 식구가 되어야겠지요.”
형진의 말과 함께 수빈의 눈앞에 다시 메시지 하나가 나타난다.
[길드 ‘타나토노트10’으로부터 가입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어떻게 보면 수빈이 이곳을 찾아온 본래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또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가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반드시 가입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수빈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그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다시 하나의 메시지가 나타난다.
[‘한스푼’님이 길드에 가입하셨습니다! 모두 환영해 주세요!]============================ 작품 후기 ============================
원래는 조향사가 아니라 조향자로 할 생각이었지만…
써놓고 보니 어쩐지 자꾸 조향자 여사라는 말이 연상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