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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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대격변
수빈이 접속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승희에게서 귓말이 날아온다.
언제 접속하나 하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좀 미안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해놓은 일과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제야 길드 가입 때문에 하루 종일 접속하긴 했지만, 그런 만큼 벌충을 해야 하니까.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할 생각이 있다면 게임 같은 것에 매달려서야 되겠나 싶은 것이 사실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정말로 공무원이 되고 싶은 건지도.
[어디야? 나 어디로 가면 돼?]잠시 현실의 일을 떠올리던 수빈은 다시 이어진 승희의 귓말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지금? 길드성.] [정말? 음… 그럼 내가 입구 있는 곳에 가서 다시 귓 넣으면 될까?] [응.] [알았어. 금방 갈게.]승희에게서의 귓말이 끝나자, 수빈은 그제서야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작은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작은 토끼 한 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본다.
수빈은 토끼를 향해 가만히 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하지만 토끼는 그런 그녀를 보며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깡충깡충 뛰어가 버린다.
“…”
사람 무안하게스리.
수빈은 멋쩍은 기분에 머리를 긁적이다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조용하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혹시나 길챗을 열어보았지만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고 있다. 설마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건가.
[저… 계세요?]머뭇거리며 그렇게 말을 걸어 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역시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려는데, 그제서야 대답이 뜬다.
[앗! 죄송해요. 아직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게 익숙하지 않아서. 어서오세요!]기운이 넘치면서도 귀여운 느낌 가득한 이 목소리는 틀림없이 카트린이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일 것이다.
[지금 막 접속했어요. 다들 어디 계세요?] [아… 오빠랑 여신님들은 일이 있어서 따로 어딜 좀 갔구요. 다른 분들은 저랑 같이 시내 구경을 하는 중이에요.] [그럼, 길드성에는 아무도 안 계시는 건가요?] [아마도요.]토끼들이 있으니 괜찮긴 하겠지만, 그래도 길드성을 이렇게 텅텅 비워놓다니. 누가 기습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고 보니 아직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괜찮은가.
수빈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다시 물었다.
[실은… 여신님께 말씀을 드리긴 했는데, 오늘 제 친구가 잠깐 놀러오기로 했거든요.] [그래요? 잠시만요. 오빠한테 물어볼게요.] [네. 부탁드립니다.]잠시 기다리자 이내 진이라는 남자에게서 귓말이 전해져 왔다.
[진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혹시 저나 여신님께 용무가 있으신 겁니까?]단도직입적인 형진의 말에 수빈은 잠시 우왕좌왕해야만 했다. 그녀가 승희를 부른 목적은 혹시라도 천식을 낫게 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제 친구가 아프니까 좀 고쳐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자니 어쩐지 염치가 없는 느낌이다.
[아뇨. 그건 아니지만…]그래서 그렇게 얼버무리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그렇습니까. 그냥 단순한 방문 목적이라면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길드성의 시설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좋으니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도 그렇고 카트린쪽도 그렇고 점심 때는 길드성으로 돌아갈 예정이니 달리 뭔가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그때 말씀해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그렇게 진이라는 남자와의 귓말이 끝나자 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후아…”
별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닌데 어쩐지 엄청 긴장해 버리고 말았다. 딱히 엄청나게 위압감이 느껴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남자와 얘기를 나눌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잔뜩 몸이 굳어 버린다.
어쨌든 허락을 받았으니 다행이다. 혹시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물론 그녀는 꽃과 바람이라는 여신님을 따르는 조향사가 되었지만, 아침에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해보면 그 여신님조차도 진이라는 남자를 제외하고 혼자서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여신님조차 그 정도인데, 하물며 그 아래에 속한 자신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응? 잠깐…”
뭔가 이상하다. 보통 신이라고 하면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 아닌가? 그런 신조차 함부로 못하는 남자라니. 도대체 그 진이라는 사람은 정체가 뭐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다시 귓말이 전해져 온다.
[언니! 나 왔어!] [어, 그래. 바로 나갈게.]뭐… 당장은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닌지라, 수빈은 마음 속에 떠오른 진이라는 남자에 대한 의문을 일단 묻어둔 채 길드성 입구로 향했다.
그녀가 입구에 도달하자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조금 떨어진 길가에 서있던 승희가 얼른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다.
하얀 목이 드러난 단발머리, 커다란 눈을 지닌 활기찬 느낌의 소녀. 바로 그녀가 수빈이 온라인상에서 자매처럼 지내는 유저인 승희다.
사실 수빈은 승희와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저 모습은 현실의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병으로 인해 바깥 활동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자신과는 다른, 활기차고 건강한 소녀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나마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엘리시온은 승희에게 있어 그 이름대로 진짜 이상향인지도 모른다.
“언니! 이쪽! 이쪽!”
“안녕. 빨리 왔네.”
입구로 지나가자, 그녀를 식구로 인식한 협객 토끼들이 척 하고 자세를 잡더니 거수경례를 한다. 그런 토끼들의 모습을 본 승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인형이 아니었어? 아… 그게 바로 그…”
승희는 그제서야 일전에 수빈이 언급했던 토끼 소환수의 일을 떠올리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귀엽지? 하지만 알고 보면 꽤 무서우니까 조심해.”
“하긴. 그러니까 경비를 서고 있는 거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수빈도 어쩔 수 없다. 가능하면 도와주고는 싶지만, 솔직히 말해서 수빈도 아직 머리를 쓰다듬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언니. 어쩐지 분위기가 좀 바뀐 것 같은데?”
“그래?”
“응. 뭐랄까. 팜므 파탈 같은 느낌? 아니, 어쩐지 계속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하하…”
순간 수빈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접속하기 전부터 꽃의 권능을 차단하고 다시 목욕까지 한다음 들어온 건데, 그래도 역시 잔향이 남아 버린 모양이다.
사실 향기라고 칭하기는 하지만 이건 후각만으로 전해지는 냄새와는 별개의 무언가였다. 단순한 향기라면 카메라 등으로 찍힌 사진에는 그저 예전 모습 그대로의 수빈이 느껴져야 한다. 그러나 이 향기는 오감을 동시에 모두 자극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보는 것보다 효과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영상을 통해서도 매혹되어 버린다.
수빈은 얼른 얘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들어가자.”
“응.”
두 사람은 그렇게 길드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건물로 향하는 길 양편에서 둘의 모습을 발견한 토끼들이 일제히 풀숲에서 고개를 내민다.
“와아… 진짜 완전 토끼 천지네.”
“하하…”
“그런데 사람은 왜 하나도 안 보여?”
“그게… 다들 바빠서 지금은 나 혼자야.”
“잉? 그럼 우린 어떻게 해?”
“점심 때까지는 돌아온다고 했으니 기다려야지.”
“에에엣! 그럼 일찍 올 필요도 없었던 거잖아!”
따지고 보면 그렇긴 하지만, 그게 또 그렇지가 않다. 부탁해야 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상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문제는 그런 지금의 상황을 승희에게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느냐다. 수빈이야 꽃과 바람이라는 여신과 대면한 상태에서 운명처럼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 버렸지만, 자신이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을 다른 누군가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말 주변이라도 좋으면 모르겠지만 수빈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달변이라는 식의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입술을 쭉 내밀고 실망스러워 하는 기색을 보이는 승희의 모습에 수빈은 갈등했다. 원래 예정은 몰래 진이라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회복이란 걸 받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꿔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그렇게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잠깐만.”
“…”
또 왜 그러나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승희를 놔둔 채, 수빈은 다시 진에게 귓말을 넣었다.
[네. 수빈님.] [저… 죄송하지만…]승희에게서 등을 돌린 채 수빈은 그렇게 진에게 자신이 승희를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어차피 나중에 해야할 말이기도 하고, 승희에게 자신의 일을 털어놓으려면 그의 허락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습니까.]자초지종을 들은 형진은 속으로 씨익 웃음을 지었다. 어린 양이 뭣도 모르고 덫으로 들어와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알아서 약점까지 제시해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수빈님은 그 승희라는 분을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군요.]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수빈님도 아시다시피, 저희들이나 여신님의 존재가 지구상의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발설되는 것은 무척이나 곤란한 일입니다.] [그렇겠죠.]어차피 발설해봐야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어쨌든 비밀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실 생각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대놓고 자랑질을 하기도 어렵다. 괜히 검은 양복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어딘가의 알 수 없는 실험실로 끌려간 다음 마취 당한 상태로 각종 실험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절대로 없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것이 어디까지나 음모론에 입각한 예라 할지라도, 가능성이 만의 하나라도 있다면 사람은 스스로 위험한 일에 발을 담그려 하지 않게 마련이다.
수빈은 형진의 말을 듣고서야 일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너무나 경솔하게 일을 진행했음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이 일을 쉽게 생각한 것 같아요.]수빈이 그렇게 사과하자 형진은 웃는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다만 저는 이 일로 인해 여신님께 폐를 끼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사실 형진이 이런 식으로 주의를 준 것은 수빈이 이 사람 저 사람 마구잡이로 끌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물론 여신 입장에서야 신도나 추종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좋은 일이지만, 괜히 제대로 엘리시온에서의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허튼 소문이 퍼져서 일이 어그러지는 건 역시 형진으로서는 달갑지 못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 거짓된 천국을 만든 허세와 망상이 어딘가에 건재한 상황임을 고려하면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사실을 털어놔도 괜찮을까요?]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셨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그렇게 형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수빈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등을 돌린 채 누군가 쑥덕거리고 있는 수빈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승희를 돌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승희야.”
“응?”
“지금부터 말하는 건 비밀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돼.”
“킥. 뭐야. 그건. 꼭 누구 뒷담화 시작하려는 사람처럼.”
“…”
농담처럼 가볍게 받아들이려던 승희였지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 일말의 비장감마저 보이고 있는 그 모습에 이건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진짜야?”
“응. 진짜야.”
다시 한 번 다짐하듯 그렇게 대답하는 수빈의 모습에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원래부터 수빈은 그리 농담을 즐겨하는 성품이 아니다. 그건 승희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 약속할게.”
“고마워.”
수빈은 승희가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답하자, 비로소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이내 지금껏 잠궈두었던 꽃의 권능을 개방했다.
화아악!
순간 수빈의 몸으로부터 형언하기 어려운 매혹의 향기가 마치 만개한 꽃의 그것처럼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렇다. 그것은 향기의 폭발이었다. 억눌러 두었던 만큼, 더 강하게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그 향기가 주는 감동을 과연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승희는 그대로 넋이 나갔다. 그리고 눈앞에서 마치 꽃처럼 화사하게 빛나고 있는 수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